여성현장과 신학

내 목회 이야기1-민중교회에서 목회를 처음 시작하다.

한국소금 2012. 2. 3. 12:53

 나의 목회관: 목회는 해방하는 일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성공하는 목회와 교회성장이 직결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성장이란 교인수와 교회크기로 나타나는 물량적이고 외형적 성장을 말한다. 그런데 소위 목회에 성공했다고 하는 목회자일수록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비민주적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교인수도 적고 그 교인들이 대부분 가난하기 때문에 교회가 경제난에 허덕이는 민중교회의 경우 비교적 교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져 있고 남녀평등적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목회가 무엇이며 바람직한 목회는 어떤 것인지 묻게 된다.

일반적으로 목회란 좁은 의미에서 목회자가 교회공동체를 위해서 또는 교회를 대신하여 행하는 모든 일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전통적으로 목회자는 교회를 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환자를 찾아가 위로하고 교인들을 방문하며 성례전을 베푼다. 여기서 목회자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부름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일한다.

넓은 의미에서 목회는 섬김과 봉사(Diakonia)로 정의된다. 그래서 목회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섬기는 자로서의 목회자상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목회자상과 결합되어 특별한 권위주의적 모습을 띠게 된다.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개념이 남녀의 성과 결부되면 하나의 성차별적 계급구조를 낳게 된다. 예를 들어 한국교회에서 남자 목회자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를 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특권을 가진 사람으로 불려진다. 그러나 똑같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을 여교역자에게 적용할 경우 글자 그대로 남자 목회자의 종 내지 교인의 종이라는 낮은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한국풍토에서 ‘섬기는 자’로서의 목회자상을 강조할 때는 그 대상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민중신학자  k목사는 ‘섬김’의 신학을 강조한다. 너무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인 한국 목회자들에게 섬기는 자로서의 목회자 상은 매우 필요하고 적절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가 여성들 앞에서 섬김을 강조할 경우 이제껏 ‘섬기는 존재’로서 희생당해 온 여성들에게는 분노의 대상이 된다. ‘섬김’을 말할 때는 ‘누구를 위한 섬김’이고 ‘무엇을 위한 섬김’인가가 분명히 말해져야 한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섬김이며 무엇을 위한 섬김이어야 하는가? 예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선적으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죄인취급을 받으며 사는 ‘눌린 자’들을 섬겨야 한다. 이 눌린자를 섬기는 길은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눌린 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억누르고 있는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그러기에 목회는 해방하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땅에서 눌린 자들의 표상인 민중과 여성의 인간성회복을 지향하는 민중목회, 여성목회야 말로 참다운 목회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민중목회’와 ‘여성목회‘를 특수목회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 민중목회, 여성목회는 특수목회가 아니라 전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과제다. 여성과 민중목회의 관점에서 목회를 할 때 전 한국기독교인들의 인간성이 회복될 수 있다고 본다. 해방이라는 목회의 관점은 민중이나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억압자들 역시 인간성이 파괴되어 있다. 이들의 인간성회복을 위해서 눌린 자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 것처럼 이들의 인간성회복을 위해서 억압하려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기에 목회란 총체적으로 해방하는 일이다.


내가 이런 목회관을 갖게 된 것은 여성신학의 영향에서다. 유감스럽게도 오늘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가부장적이고 물량적이며 개교회중심의 기복주의 입장에 서 있다. 따라서 나는 한국교회의 과제를 여남평등공동체를 이루는 일,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를 이루는 일, 그리고 창조의 보전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당연히 목회도 여남공동체를 지향하는 목회, 섬김과 나눔을 지향하는 목회, 창조의 보전을 지향하는 목회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 땅에서 눌린 자들의 표상인 민중과 여성의 인간성회복을 지향하는 민중목회, 여성목회야말로 바람직한 목회라는 생각으로 나는 민중교회에서 남편과 함께 공동목회를 하고 있다. 목회자가 해방과 고난의 영성을 가지고 해방하는 목회를 한다고 할 때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민중교회 목회였다. 민중교회야말로 한국에서 가장 눌린 민중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며 바로 이 민중교회의 목회는 남편과 내가 섬김과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방편으로 택한 길이기도 했다.


내 목회의 시작: 민중목회의 막차를 타고

남편 최정의팔과 나는 소위 민중 목회자로서 막차를 탄 사람들이다. 민중교회사 분류에 따르면 제 2기말 또는 3기가 시작되는 때 목회를 시작하였다. 동구권이 무너진 후 94년을 기점으로 민중교회는 침체기를 겪는다. 교인이 줄고 재정 상태가 열악하고 민중 교회 목회자와 실무자가 소진 상태에 빠지면서 이제까지의 민중교회 정체성에 대해 흔들리는 사람들이 생겨나 민중 목회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1). 이러한 때 “남들은 떠나는 마당에 너희는 40살이 넘어 이 길을 시작하느냐”는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의 걱정을 들으며 우리는 민중목회를 시작했던 것이다.

맨 처음 우리가 목회할 청암교회를 방문했을 때 교인들은 20명 남짓이었는데 야학 출신의 노동청년들과 선생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서울 도심 한 복판에 있는 산동네인 창신동 언덕의 빈민가의 어느 무허가 건물의 방 하나를 세 내어 있었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좁고 허름한 공간에서도 낮에는 그 지역의 가난한 맞벌이 부부들을 위하여 탁아소를 하고 밤에는 노동청년들이 모여 독서회나 성서읽기 모임을 하고 있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인원은 적었지만 주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댔다. 1987년 이전 각 지역에서의 민중운동은 교회, 혹은 기독교가 가지는 합법적 성격을 바탕으로 전개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노동자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민중교회는 지역운동가들에게 소중한 공간이 되었고 많은 활동가들이 민중교회로 몰려들었다. 교회에서 여러 가지 노동자, 주민프로그램이 개설되었고 많은 노동자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매개로 교회와 만나 함께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 참석 인원은 적어도 주중에는 늘 노동자들로 북적였던 것이 민중교회의 모습이었다.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때를 같이 한 92년부터 시작된 한국의 유사 민주주의의 확대 역시 민중교회에 영향을 입혔다. 많은 민중교회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 역시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이 떠나갔다. 구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몰락은 한국의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의 대안이었던 마르크스식 분석틀을 무력화시킴으로 이들 운동가들에게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 혼란은 민중교회에도 파급되었다. 특히 신앙보다는 사회 운동성이 강한 민중교회의 목회자들과 선교 실무자들, 노동운동에 종사하던 교인들에게 대안의 상실에 따른 정체성의 위기감이 만연, 사회주의 편향적이던 진보 운동가들이 교회를 떠났다.

노동조합이 합법화됨에 따라 그 동안 노동운동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던 민중교회의 필요성이 약화되었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이 활기를 잃게 되었다. 여기에 지방자치가 실시되고 복지정책이 진행되면서 그 동안 민중교회가 담당해 오던 빈민을 위한 탁아소나 무의탁노인센터 등의 지역선교사업을 이제는 정부 차원에서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함으로 민중교회의 입지가 그만큼 축소되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와 국내의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는 그 동안 민중교회를 지지해 후원을 하던 사람들이 이탈함으로 민중교회는 재정적으로도 취약해지게 되었다. 그야말로 수적 물적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교인수의 감소와 재정적 어려움으로 민중교회의 선교활동이 소강상태에 빠지게 되고 사회적 관심 또한 예전보다 줄어듦으로 대부분의 민중교회 목회자는 소진상태에 빠지게 되어 민중교회 목회를 포기하거나 경제문제 때문에 목회 이외의 다른 직을 이중적으로 갖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우리 교회에는 그야말로 노동자 중에도 힘없는 노동자만 남게 되었다.


창신동에서 민중을 위해서가 아닌 민중과 함께,


이러한 민중교회의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민중목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로만이 아니라 민중의 편에선 목회를 한다는 사실에 신이 나서 목회를 하였다. 우리의 경제적 여건은 이미 교인들의 수준과 비슷했다. 남편이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는 30만원인데 그 사례비는 남편의 손에서 없어졌다. 나는 밤과 주말에는 교회의 부교역자로 일하면서 주중에는 아시아여성신학교육원에서 여성신학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내 월급은 60만원, 우리 두 사람의 사례비를 합쳐도 노동부에서 정한 최저 봉급에도 못 미치는 수입이었다.  목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우리는 민중목회자가 되려면 삶의 여건도 그들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회로 이사왔다. 세놓았던 공장을 내보내고 그 공장을 베니다판으로 칸을 막아 한 칸은 낮에는 교회 사무실로 쓰고 밤에는 중학생인 아들의 잠자리로 사용했다. 다른 한쪽은 남편과 나, 딸의 침실 겸 살림집이었다. 우리의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던지 여교역자들이 우리 집에 들렸다가 많은 힘을 얻고 간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실상 나는 그곳에서 사는 게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친척들은 판잣집에 사는 우리 처지를 가슴아파 했지만 교인들과 탁아방 자모들은 우리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교인들과 주민들이 목회자인 우리와 자신들과의 일체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걸 통해서 깨달은 것은 민중목회란 민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남편과 나의 목회방향은 우리가 계획했다기보다는 우리 교회가 몸담고 있는 이 지역적 필요에 의해 정해졌다. 텍스트나 교리의 형성이 주변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듯이 우리의 목회도 우리 한국의 상황, 구체적으로 우리 교인들인 민중과 우리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창신동의 상황과 관계가 있다. 그러면 창신동은 과연 어떤 곳이었나?

 창신동은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었다. 인구, 불량주택, 가내공장 등 세 가지가 많은 3다(多) 지역이라고. 동대문역에서 창신2동 입구에 들어서면 벌써부터 어수선하고 시끌벅적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유일한 통로인 중앙도로는 6m폭의 좁은 도로로 산꼭대기까지 이어졌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창신 2동만의 거리 풍경과 만나게 된다. 빵빵거리며 달리는 자동차 사이로 유난히 많이 오토바이가 눈에 많이 띈다.

간신히 한 사람이 드나들 만한 좁은 골목, 가정집 지하실에서 들려오는 미싱소리 등등. 이러한 거리풍경이 창신 2동 주민들의 생활을 나타내 주고 있다. 종로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주거환경이 열악하고 주민의 생활 수준이 낮은 것이 창신2동의 현실이었다.

얼마 전부터 개발바람이 불어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그 현대식 건물의 주인은 강남에 살고 그 건물에는 일자리가 이곳에 있어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세를 들어 살고 있다. 건물이 새 건물이고 보니 집세가 비싸졌다. 결국 동네 모양은 좋아진 듯 하나 가난한 사람들의 집세만 올린 격이 되었다.

창신 2동은 전가구의 10%가 소규모 봉제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공장은 대부분 소규모로 운영되는 가내수공업형태라 등록업체는 한 곳도 없다고 한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각종 제품들은 길 건너 청계피복상가에 납품되고 있는데 청계상가 전체 물량의 40%이상을 공급하고 있다고 하니 놀라운 규모이다.

이렇듯 공장이 많고 그곳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거리를 메우다 보니 여러 가지 이색 풍경도 연출된다. 이곳 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오토바이는 이곳 공장에서 청계상가로 물건을 나르는 수단이다. 오토바이는 좁은 길과 가까운 거리에서 기동성이 좋기 때문에 창신 2동에서 가장 절실한 교통수단인 것이다. 실제로 동사무소 통계에 따르면 총 1천 4백대로 서울에서 오토바이가 많은 동네 중의 하나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갖고 있는 창신동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 정신에 입각하여 지역주민을 위한 선교활동을 실시하였다. 창립 당시부터 우리 교회의 표어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표어에 맞추어 우리 교회가 벌인 선교활동의 대표적인 것이 탁아방과 공부방 활동이었다.

부모들이 일나간 자리에 방치된 아이들은 학교생활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또 적은 수입으로 인해 어린 아기를 먼지 구덩이인 작업장에 함께 데리고 가서 일하는 부모들, 이런 삶 속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보며 우리는 이곳에서 탁아방과 공부방을 시작했다. 청암탁아방은 만 20개월부터 4세까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8시까지 전임교사와 자원 봉사자들이 아이들을 돌보았다. 우리가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미 두 명의 탁아방 아이가 재래식 화장실에 빠져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돈이 없으니까 잡일은 교인들이 거들고 아는 기술자에게 부탁하여 무료로 일을 맡겼다.

그 다음 해 여름, 여름성경학교를 열었다. 그 어린이들 중의 많은 수가 한글을 제대로 못쓰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는 6학년 어린이도 있었다.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원인을 조사해 보니 이 동네의 아이들은 저소득층의 부모가 맞벌이를 하러 공장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돌아와도 마땅히 공부할 곳도 없다. 아이들은 자연히 방치된 채 길에서 헤매기 마련이다. 또 이들은 잘못된 학교교육의 희생자들이다. 요즈음 학교에서는 일 학년에 들어가면 한글 기초를 가르치지 않는다. 극성스러운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이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한글을 가르쳐 많은 어린이들이 한글을 익혀 학교에 간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한글을 안다는 전제로 공부를 가르치기 때문에 고학년이 되어도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생겨난다. 우리는 이 지역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방과 후 학교를 시작했다. 대학생 자원 봉사자를 모집하여 어린이들에게 숙제와 한글, 산수 등 기본적인 공부를 가르쳤다.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치 못하는 아이들, 오락실이나 어른들의 퇴폐문화에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을 위해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오후 2시부터 7시까지 초등학생을, 저녁 7시부터 9시까지는 중학생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이렇게 수업중심으로 공부방을 운영하다가 1998년부터 공부방에서 밥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아이에프다 터진 어느 겨울 밤, 퇴근하고 오면서 교회 앞에서 놀고 있는 여자 아이 두 명을 만났다. 저녁식사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안 먹었단다. 밥을 차려주었다. 하도 허겁지겁 먹기에 사정을 살펴보았더니 지금 먹은 밥이 이틀 만에 처음 먹는 것이란다. 사연을 들으니 엄마가 아빠와 싸워 집을 나갔단다. 그래서 동네 특성 상 이런 아이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 공부방에서 저녁식사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 일을 정부의 지원 없이 모금을 해서 충당해야 했다. 2004년부터 지역아동센터가 생기고, 청암공부방도 지역아동센터로 등록을 해서 정부의 보조금을 받게 되면서 지역의 빈곤 아동들을 보호하는 지원체계가 나아졌지만, 여전히 창신동 어린이들의 삶은 고달픈 것같다. 이렇게 창신동에서 남편과 나의 목회활동이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작지만, 안정적 목회기반을 마련하다.


1995년 한국교회에서 선포한 희년의 해에 우리는 교회당을 새로 마련했다. 우리 교회는 그 판잣집에 월세를 지불하고 있었는데 이 월세가 해마다 올라가서 월 80만원까지 올라갔다. 이 월세를 감당하고 탁아방 교사와 공부방 실무자의 사례비를 마련하는 것은 교인들의 힘이 아니라 순전히 목회자의 손에 달려 있다. 비록 민중 교회의 주인은 민중이라고 하지만 그 민중은 재정적으로는 책임을 질 능력이 없었다. 실정이 이러니 우리는 이 많은 월세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후원비도 줄어드는 마당이었고 월세 부담 때문에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할 판이었다. 1992년 무렵부터 한국민중교회는 ‘운동성’이 강조되던 틀에서 ‘교회성’과 ‘운동성‘ 양면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반성이 일어나게 된다. 기층 민중운동을 지원하던 민중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었고 민중교회 역시 교회이므로 교회성이 있어야 한다는 데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교회성에 대한 정의는 구체적으로 내리지 못한 채 '교회성과 운동성'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는데 잠정적 일치를 본 가운데 민중교회가 진정한 운동체가 되려면 일차적으로 근거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 무렵 한국 민중교회의 일각에서는 매년 올라가는 전세금을 더 이상 부담하기 어려워 기존의 민중교회의 틀을 버리고 가정교회의 틀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민중교회가 건물을 가지려면 기성교회의 후원을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지원으로 기성교회와 타협하게 되고 이는 민중교회의 이상을 흐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건물 없이 예배를 교인의 가정을 돌아가며 드린다는 안이었는데 가정교회는 더 이상 민중교회가 아니라는 비판 가운데 현실화하지 못했다.

우리는 용단을 내려 그 월세만큼을 은행에서 융자를 얻기로 하고 교회건물을 마련하는 모험을 벌이기로 하였다. 바자회, 다른 교회의 지원금, 친지의 후원금을 모았다. 이때는 교인들에게도 참여를 호소했고 일부 교인들이 이에 동참했다. 힘겹게 이층 짜리 개인 주택을 한 채 사서 이사를 했다. 은행 빚이 있지만 일단 우리 교회 건물이 생긴 것이다. 건물을 마련하면서 사연도 많았다. 바자회 한 돈을 몽땅 도둑맡아 시험에 들기도 했고, 뜻하지 않은 헌금으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기도 했다. 잔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3천만원이 부족했다. 그런데 한 여성이 전화를 했다. 신문을 읽었는데 헌금을 하겠으니 만나자는 것이다. 약속한 다방에 남편이 나갔다. 그 여성은 모 교회 집사였는데, 3천만원 여유 돈이 생겨 시골에 땅을 사려고 했는데,  국민일보에 실린 우리교회 사정을 읽게 되었고, 그 기사를 읽으면서 자기 돈으로 땅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러면서 보자기에 싸서 갖고 온 돈을 내놓았다.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돈을 만원짜리 현금으로 가져 온 것은 수표는 가볍긴 하지만, 추적을 해서 자기를 밝혀낼 데니 그걸 방지하느라 그랬다고 한다. 난생으로 처음 현금 3천만원을 본 것도 놀랍지만, 그 집사님의 드러내지 않으려는 신앙심에 더둑 놀랐다. 이런 사연을 안고 교회 건물을 마련했다. 한 층에 20평짜리 건물로서 1층은 평일에는 탁아방과 공부방을 하고 주일에는 예배 장소로 사용했다. 최근에는 주차장으로 되어 있는 곳을 개조해 외국인노동자센터로 사용하고 지하는 외국인노동자 쉼터로 사용했다. 다른 민중교회에 비하여 우리는 그나마 자기 건물이 있어 안정적으로 목회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