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현장과 신학

다문화시대, 이주민의 인권과 기독교의 과제2

한국소금 2016. 4. 29. 16:14

. 다문화사회 속에서 이주민의 인권을 위한 기독교의 과제

 

 

종교의 가부장성이 갖는 역기능

 

다문화시대를 말할 때 종교를 빼놓을 수 없다. 문화와 종교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원론적인 중요성 말고도 사실상 한국사회가 다문화사회로 진입하는 데는 종교의 역할과 기능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먼저 국제결혼을 통해 세계평화를 구축한다는 이념을 갖고 있는 통일교(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1988년에 행한 일본여성과 한국남성의 합동결혼이 현대 2기 국제결혼의 효시가 되었다. 정부는 1990년에 국제결혼의 통계를 690명으로 잡고 있는데, 그것이 통일교를 통해 온 일본여성의 국제결혼이다. 그후 통일교를 통한 국제결혼은 필리핀, 태국으로 이어졌고 지금은 몽골까지 그 영역을 넓혀 통일교를 통한 국제결혼 이주가 전체 결혼이주의 15-20% 정도 되고 있다. 필자가 여기서 통일교를 거론하는 것은 이단논쟁이나 통일교를 통한 이주자 증가에 경계심을 갖자는 등의 논쟁을 벌이자는 것이 아니라 통일교를 사례로 종교가 이주민의 인권에 갖는 역기능과 순기능을 살펴보고자 함이다.

통일교를 통한 국제결혼에서는 한국남성들이 결혼하고자 할 때 드는 비용이 적고 또 결혼해서 들어오면 일단 교육을 하기 때문에, 남편이나 시댁에서 돈을 결부시켜 여성의 인격을 무시하는 경우는 중개업체를 통한 결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가부장적 의식만은 쉽게 고쳐지지 않아 문제가 생기기도 하는데, 여기서 종교의 역기능이 작용한다. 모 지자체에서 실시한 도내 실태조사에 의하면 종교(통일교) 알선을 통해 들어 온 결혼이주여성들의 결혼 만족도가 낮고 인권문제도 심각한 편으로 조사되었다. 통일교는 그 자체가 가정평화를 통한 세계평화이기 때문에 여성이 가정폭력이나 인권문제로 이혼을 하려고 할 경우 그것이 종교이념이나 이미지에 배치되기 때문에 참고 견딤을 강요함으로 결과적으로 여성은 질곡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경우는 비단 통일교의 문제만이 아니다. 최근 해외 선교사를 통해 간간히 한국남성과 아시아 여성과의 결혼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잘 사는 사람도 있지만 문제가 발생할 경우 여성들이 목회자나 이웃 기독교인들에게 의논하면 시련을 참고 견디면 나중에 복이 온다.”등으로 상담을 해서 여성들의 고통을 연장시키는데 일조를 한다는 것이다. 종교의 가부장성이 갖는 한계로 인해 이주여성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성차별적 신학과 신앙, 가부장적 교회 관행들을 성평등적으로 전환하는 것 자체가 이주민의 인권향상에 기여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하게 된다.

 

앞에서 필자는 다문화 사회라고 하는 것은 다문화의 담지자들이 모든 생활영역에서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성적 차별을 당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라는 정의에서 출발하였다. 허나 일반적으로 다문화에 관심하는 기독교적 측면을 보면 다분히 포교적 관점을 갖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이주민들의 인권이나 다른 문화를 수용하는데 관심을 갖기 보다는 이주민을 개종시키는 문제나 그 방법론에 더 관심이 많다.

하지만 필자는 이글에서 포교론적 관점이 아니라 기독교가 이주민의 인권보호와 옹호를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지 하는 측변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기독교의 과제를 두 측면에서 접근하려고 하는데 하나는 기독교교육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선교적 측면이다. 교육적 측면은 차이의 존중과 차별배제, 인권존중의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고, 선교적 측면은 룻기에 나타난 이주민 인권옹호의 모습을 통해 한국교회의 과제를 모색해 보려고 한다.

 

 

1. 열린 다문화사회를 위해 교육되어야 할 신학적 명제

 

다문화의 담지자인 이주민이 차별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람이 존엄한 존재로서 존중받는 풍토,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차별하지 않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기독인들로 하여금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다름을 존중하고 차이를 차별하지 않도록 일깨우고 신앙화하도록 하는 것이 열린 문화사회를 향한 기독교의 과제라고 본다.

 

1) 이주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엄한 존재이며,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를 범하는 것임을 교육해야 한다.

 

창세기 126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되 자기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고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말이 뜻하고 있는 바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엄성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유엔인권선언 제1조의 기초가 된 사상이다. 이 창조선언이 기독교인의 신념이 되도록 선포하여야 하며, 타인이 나와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성적, 문화적으로 다르다고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차별하는 죄를 범하는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2) 차별을 조장하는 배타적인 민족주의 교육에서 이방인을 포용하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

 

성서에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본문과 외국인에게 우호적인 본문이 있다. 외국인 혐오증을 조장하는 분문은 시대적 특성을 살펴서 그 배경을 이해하고 일반화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에스라, 느헤미야서 속에 들어있는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인 사상들, 즉 유대인 이외의 이방인과의 혼인금지, 이방인과의 교류를 배척하는 기사, 또한 노아의 세 아들 중 에 본문을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이런 유의 본문을 복음의 빛에 비추어 재해석해서 외국인혐오증을 정당화하거나 조장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교육해야 한다.

이렇게 이방인을 거부하는 성서를 재해석하는데서 한 걸음 나아가 이방인을 포용하는 성서의 내용들을 적극적으로 교육할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 11장의 베드로와 고넬료 이야기라든지,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방인 백부장의 이야기 등 이방인에 대해 호의적인 성서의 분문들을 적극 활용해서 교육할 필요가 있다.

 

3)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됨을 교육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328절에 의하면 유대인과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선언되어 있다. 이 말은 인종차별, 계급차별, 성차별을 금하는 것으로서, 이 인종차별, 계급차별 성차별은 인권운동에서 세계 3대 차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 328절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성은 이 말씀이 초대교회의 세례의식에서 중요한 신앙고백문이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도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세례 교육시에 이 말씀을 가르치고 고백하도록 의무화한다면 교인들의 차별감수성이나 인식이 매우 증진될 것이다.

 

4) 이주민을 돌보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당연한 의무임을 교육해야 한다.

출애굽기, 레위기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약자보호법이 있고 그 약자보호법 가운데 나그네 보호법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법과 십일조 법, 첫 열매를 드리는 법을 통해 이주민 보호를 의무화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추수할 때 이삭 남기는 전통을 통해서 외국인 나그네의 생계를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 나그네 보호법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인에게 있어 이주민 보호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며, 이를 실천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5. 이주민과 파트너쉽을 이루도록 교육해야 한다.

이주민과 파트너쉽을 이루는 모델은 룻기에 잘 나타난다. 생계를 위해 이삭줍기를 하러 자기밭에 온 룻에게 보아스는 이삭줍기만 허용하는 것에서 나아가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일군들에게 룻을 성희롱하지 못하게 금한다. 이런 보아스의 태도에 용기를 얻은 룻은 이렇게 말한다. “저를 이처럼 위로하여 주시니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아스는 룻과 나오미의 권리찾기에 호응하여, 법을 확대하여 나오미와 룻에게 의무를 이행하여 땅을 사주고 결혼까지 성사시킨다. 그리고 이 룻이 다윗의 증조모가 되어 예수 구원사의 한 줄기로 서게 된다.

파트너쉽이란 "권위를 나누는 것이고, 억압의 구조를 자각하여 평등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약자에게 용기를 내도록 붙잡아 일으켜 주고 사회적 약자가 자기 권리를 찾아 평등한 관계를 이룰 수 있도록 함께 길을 찾아주며, 그로인해서 새 역사를 이루도록 연대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아스처럼 사회적 약자와 연대를 할 수 있는 교인을 만드는 교육이 필요하다.

 

 

2. 다문화사회 교육의 대상은 이주민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인들이다.

 

한국사회가 다문화사회에 접어 들하면서 다문화교육이 교육의 키워드가 되고 있다. 여기서 다문화교육이란 주로 이주민과 그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열린 다문화사회를 향한 다문화교육은 다문화 담지자인 이주민이 아니라 이들과 더불어 사는 한국인이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할 때는 소수자가 아니라 그 사회 구성원의 다수가 바뀌어야 변화가 가능해진다. 단일민족의 허구에 젖어있는 한국인의 의식전환 없이는 열린 다문화사회는 불가능하다.

바람직한 다문화 사회를 위한 기독교교육도 마찬가지다. 이민자를 교인으로 만들어 구원받게 하는 교육이기에 앞서 오히려 교인들이 이주민의 이웃이 됨으로서, 이주민을 섬김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그런 교육이 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기사에 의하면 이들을 섬기는 것 여부가 심판과 구원의 분기점이 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는 디아코니아 신학을 정립하고 확산시켜 이주민을 섬기는 한국교인들이 되도록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3. 열린 다문화사회를 위한 기독교교육의 준비

1) 다문화사회의 실태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

한국의 기독교교육이 열린 다문화사회를 향한 기독교교육이 되기 위한 방향성과 비전을 마련하게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사회의 다문화 현실을 고려해서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실상, 즉 우리 사회의 다인종/다민족/다문화에 대한 실태를 파악하고 이에 대한 교육과정과 정책, 비전 등, 다문화 기독교교육적 대응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현재 이주민은 주민등록 인구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이대로 이주민의 유입이 증가되면 2020년이 되면 도시의 20%, 농촌인구의 80%가 다문화가족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런 시대적 추이를 인지하고 다문화사회에 걸맞는 기독교교육을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

 

2) 다문화 기독교교육전문가 육성과 목회자 의식개선

다문화교육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한국사회에서 관심 갖는 분야가 다문화 전문가 양성이다. 다문화전문가 양성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전문 강사풀을 육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문화인식 개선을 하는 교사훈련과 다문화가정 자녀를 전문적으로 지도할 교사 훈련이다. 기독교교육에서도 이런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본다. 기독교교육 분야의 다문화 전문가 육성과 더불어 교회학교 교육에서 다문화적 인식을 갖고 교육을 담당할 교사 훈련이 필요하다. 특히 목회자들로 하여금 다문화 사회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신학교는 물론이고 각종 목회자 교육에서 한국의 다문화 실태와 특성, 목회자가 섬겨야 할 이주민에 대한 이해와 존중, 인권보호, 다문화감수성과 신학적 이해 등에 관한 특별한 교육이 필요하다.

 

3) 교육내용

 

현재 한국사회에서 추진되고 있는 이주민을 위한 다문화교육의 중요 내용은 1)한국어와 한국문화 이해를 중심한 한국사회 적응교육, 2)이주민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정체성교육, 3)공동체 육성지원, 4) 이주민 특히 다문화 가족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한 인식개선 교육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미 일부 교회에서는 이주민을 대상으로 한국어와 한국문화 이해 등의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는데, 앞으로 농어촌 교회의 활성화는 다문화 가족에게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에서 교회가 적극적으로 다문화가족을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권장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사항에 주의가 필요하다. 첫째는 이미 앞서 인권문제에서 살펴보았듯이 동화위주의 적응교육을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동화주의가 아니라 다문화주의 관점에서 이주민의 문화를 존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대상화가 아니라 주인의식을 키워주고, 양성평등적인 교육으로 가부장문화를 개선해 나가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실시되어야 한다. 둘째는 이주민 프로그램의 목적을 이주민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어야지 포교를 목적으로 삼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섬김을 통해 이주민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 포교를 위해 섬기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이방인을 향한 보아스의 태도에 룻이 종과 같은 이 몸이 용기를 얻었습니다.”하고 고백하듯 한국교회가 이주여성에게 힘이 된다면, 그럴 때 굳이 포교를 하지 않더라도 룻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듯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십니다.’하는 이주민의 신앙고백이 들려질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하는 다문화적 기독교교육의 내용은 타문화 수용과 편견극복, 다름을 수용하고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교육을 통해서 의식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이주민이 우리에게 적응하기를 고집하는 데서 탈피하여 우리가 이주민에게 적응하는 갈등해소 등의 훈련도 필요하다.

타문화수용과 존중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영역에 관한 것이다. 유엔 인권선언 2조는 피부색, 성별, 종교, 언어, 국적, 갖고 있는 의견이나 신념 등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고 선언함으로 지구상에 종교로 인한 차별이 있음을 직시하고 종교를 인간의 기본적 권리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다문화사회는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 향유를 권리로서 보장하는 사회임을 인지하고 이주민의 종교를 존중하는 태도를 기르도록 해야 한다. 문화적 정체성과 종교적 정체성의 권리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타문화와 타종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연대감이 중요하다”.

 

4) 교육의 비전

다문화 기독교교육적 비전은 한국인과 이주민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이주민과 한국인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당당히 서고, 이주민이 한국사회에서 더 이상 손님이나 낯선 이가 아니라 우리 이웃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소외된 자로서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이주민이 중심부에 서서 우리와 같은 한국의 주인으로 자리잡는 것이다. 한국인과 이주민이 파트너쉽을 갖고 서로가 서로에게 동반자가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비전이다.

 

. 룻기를 통해 본 이주민 인권옹호 실제

 

룻기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살이 이후 주전 5세기 중엽에 씌어진 작품이다. 룻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모압 여인으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이주 노동자로 일하다가 나오미의 주선으로 보아스와 결혼한 여성이다. 룻기는 국제결혼에 배타적인 느헤미야나 에스라서와 달리 외국인이라고 차별하지 않고 서로 평등하게 자유로이 사는 것이 올바른 공동체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전통적으로 룻기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거나 이방인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이 룻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인종차별, 민족차별, 계급차별, 성차별을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이주민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국제 결혼하여 우리 땅에 살고 있는 이주여성들을 어떻게 돌보고 보호해야 하는지 좋은 귀감이 된다.

 

1. 룻기는 이주민(국제결혼)에 대한 편견을 거부한다.

 

룻기는 이주민의 삶의 전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사람들이 왜 이주하는지, 이주노동자의 삶의 모습, 국제결혼으로 이루어진 가정사의 한 형태로서 많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서에는 국제결혼 이주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다 함유되어 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타민족과의 혼인은 일관되게 배타되거나 긍정된 것이 아니라 민족이 처한 상황에 따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 면모를 보이고 있다. 아무튼 룻기에서는 국제결혼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발견할 수 없고 오히려 지지를 받고 있다. 나오미는 이방 여인을 며느리로 맞았으며 그 며느리와 일심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보아스는 이방여인과 결혼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 이방여인이 결국 이스라엘의 민족의 중심이 되는 다윗왕의 증조모가 된다. 나오미와 보아스의 이웃들도 보아스와 룻의 결혼을 비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격려한다. 룻이 아기를 낳자 이스라엘 사람은 룻의 행위를 그들의 옛 조상인 유다의 며느리로 유다의 부인이 된 다말의 행위에 견주어 축복한다.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반열에 세운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단일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배타적인 인종편견에 의해 국제결혼으로 이주한 여성들이 차별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 여성들이 룻과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있도록 한국교회가 노력해야 할 과제가 있다.

2. 나그네 보호법과 이주민의 생존권보호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에 온 룻은 생계를 위해 보아스의 밭으로 이삭줍기를 나갔고 보아스는 이스라엘의 전통인 약자보호법 중의 하나인 나그네 보호법에 따라 이삭줍기를 허용한다. 이스라엘민족에게는 이주민보호를 위한 약자보호법을 지킬 의무가 있었는데 추수법과 십일조 법, 첫 열매를 드리는 법등 세 종류의 법이다.

이스라엘에게 그 공동체에서 가장 힘이 없는 이주민, 과부, 고아는 공동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인데 이들의 보호와 하나님의 복은 서로 직결되어 있다. 약자 편에 서계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가난한 이들이 이삭을 주을 수 있도록 남겨놓는 전통을 만들었다. 이렇게 율법은 소외된 이주민을 보호할 것을 법으로 규정해 놓은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레위기 2535절에서는 가난한 동족을 돌보기를 나그네 돌보듯 하라는 말로 하나님이 이주민의 인권보호를 위해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잘 드러난다. 가난한 동족을 보호하듯이 이주민을 돌보아주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자기 동족을 이주민처럼 잘 대우하라고 할 정도로 이주민 대우가 약자보호의 이상형으로 나타나 있다.

룻이 나오미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이삭줍기를 하듯 오늘날 한국 땅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가족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일을 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한국인들이 하지 않는 3D업종이며, 한국인들의 떨어드린 이삭과 같은 일자리다. 보아스가 이스라엘의 약자 보호법에 따라 이삭줍기를 허용했듯이 이주민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3. 이주민에게 힘을 주는 위로와 격려, 그리고 함께 음식을 나눔

보아스는 이삭줍기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물을 마시도록 허용한다. 이런 보아스의 배려에 대해 룻은 이렇게 응답한다. “저는 한낱 이방 여인일 뿐인데, 어찌하여 저 같은 것을 이렇게까지 잘 보살피시고 생각하여 주십니까? 이에 대해 보아스는 댁은 친정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고, 태어난 땅을 떠나서 엊그제까지만 해도 알지못하던 다른 백성에게로 오지 않았소? 댁이 하나님의 날게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넉넉히 갚아주실 것이오.“

이주민들은 보아스의 말처럼 부모와 고향을 떠나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 사이로 왔다. 이들을 보살피는 것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 온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보아스의 말을 듣고 룻은 이렇게 응답한다. “저를 이처럼 위로하여 주시니,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힘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주민의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배려하는 일은 이주민에게 힘을 준다.

한편 보아스는 이렇게 룻을 배려할 뿐만 아니라 식사 때가 되자 음식을 나누어 준다. “이리로 오시오. 음식을 듭시다(2:14). “보아스가 룻을 함께 음식을 먹도록 초청했다는 것은 더 이상 룻이 타국인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같은 한 공동체에 속한 일원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보아스처럼 우리도 이주민을 우리의 식탁에 초대해서 음식을 나눔으로 같은 식탁공동체를 일굴 필요가 있다.

 

3. 성적 착취와 성의 상품화에서 보호

룻에게 이삭줍기를 허용한 보아스의 이야기에서 특이한 것은 그의 일꾼들에게 룻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여기에서 일꾼들이 괴롭힌다는 말은 룻에게 성 희롱이나 성적 착취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보아스의 이런 행동은 이주민의 생계를 보장함은 물론 여성의 성을 함부로 짓밟지 못하도록 보호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 공동체의 법정신임을 깨우쳐 준다.

우리나라에서 이주민 여성들은 가정폭력, 성폭력의 위협 앞에 노출되어 있다. 이주여성노동자의 12%가 성폭력의 경험이 있다. 사업장 내 성폭력 경험에 있어서는 12.1%가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중 30.4%가 신체 만지는 성폭력을 당했다고 하였고, 55.6%가 한국인 직장상사에 의해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였다. 성폭력은 55.0%가 퇴근시간 이후에, 56.3%가 작업장 내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보아스가 모범을 보여주었듯이 이주여성들의 성을 착취하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일에, 이주여성들을 성의 상품화에서 존엄한 인간으로 대접하는 일에 한국 교회가 나서야 할 것이다.

4. 자기 권리를 적극적으로 찾도록 도와

룻이 돌아와 그날 있었던 일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말하자 나오미는 룻의 행복을 위해 보아스와 룻을 결혼시키려고 보아스에게 레비라토 법을 이행하도록 요청한다. 신명기 255-10절의 자식이 없이 남편이 죽었을 경우 죽은 형의 동생이 형수를 맞아들여 그 형의 후손과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는 레비라토율법에 근거한 것이다. 룻기에서는 이 레비라토 율법을 직계 형제가 아닌 집안 친척에게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가난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률의 한계가 없음을 뜻한다.

보아스에게 레비라토 법을 요구하며 행동에 나선 나오미와 룻의 자세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그저 가진 자들, 힘 있는 자들의 자선이나 처분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용기와 지혜로 나서야 함을 뜻한다. 인권이 무시되는 불의한 사회에서의 권리회복은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에서 비롯됨을 룻과 나오미가 가르쳐준다. 이주민의 권익보호 문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산업연수생으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에 대해 항의했을 때 처우개선이 된 사례가 있다.

기독교가 이주민들을 위해 일한다고 할 때 이들의 인권이 향상되도록 법을 개정하고 국민 의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룻과 나오미처럼 이주민 당사자 스스로가 일어서도록 해야 한다. 이주민과 함께 하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주여성이 자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4. 법을 제정하고 악법을 바꾸는 일에 앞장

나오미와 룻의 요청을 받은 보아스는 나오미 집안의 유산지분으로 있는 땅을 속량시키고 이를 통해서 레비라토법을 이행하려 한다. 레위기 2524-28절의 속량법에 의하면 누가 가난하여 땅을 팔 경우 가까운 친척이 사서 나중에 형편이 좋아질 경우 되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아스는 이 법에 따라 나오미의 땅을 속량할 뿐만 아니라 레비라토 법을 이행한다(룻기 4, 10). 본래는 별개인 속량법과 레비라토법을 서로 뒤섞어 적용하고 있는 이 상황은 우리에게 힘없고 가난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어떤 법 보다 우선하며 또한 가난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률마저 바꿀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5. 종교를 초원한 새 날을 여는 사람들의 연대

 

교회가 이주자와 연대한다고 할 때 그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할가? 우리는 그 원형을 나오미와 동행한 룻, 룻을 보호한 보아스의 태도에서 볼 수 있다. 나오미가 모압을 떠나 고향으로 귀향하려고 할 때 나오미와 동행하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자기 의지를 밝힌다.

 

어머니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룻기 116-17).

 

룻은 나오미와 함께 하기 위해 자기 일신상의 편안함은 물론 민족과 종교까지도 포기한다.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하는 본문 즉 룻이 자기의 신을 포기하고 나오미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겠다고 한 것에 대해 한국교회에서는 기독교우월주의를 내세우거나 시집을 왔으면 시집종교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 본문의 진정한 의미는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맹목적으로 따른다거나 기독교의 우월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외롭고 힘없는 나오미에 대한 룻의 민족과 종교를 초월한 자매정신과 연대성으로 파악해야 한다.

 

진정한 연대란 룻처럼 힘 가진 자가 약한 자의 편에 서서 철저히 자기 것을 포기하는 데서 가능하다. 세계화 시대에 고통받는 이주민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룻과 나오미가 보여준 자매애와 연대정신이 필요하다. 오늘날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에게 관심을 갖는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이주민의 인권문제 보다는 이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그러나 진정한 형제, 자매애는 자기가 갖고 있는 강한 힘을 바탕으로 개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한 상대의 종교를 포용하고 존중하면서 그들의 편에 서는 것이다. 힘을 바탕으로 개종을 추진하는 것은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바람직한 선교가 아니다.

 

나가는 말

 

오늘날 우리사회에 화두가 된 다민족, 다인종, 다민족 공생사회라는 말은 구호로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진정한 다문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문화의 담지자인 이주민들에 대한 존중과 존엄성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 만일 기독교가 선교라는 이름으로 이주민의 인권과 안전을 도외시하면서 다문화사회를 말한다면, 교회는 다문화라는 양의 탈을 쓴 늑대에 불과해진다. 우리사회에서 가장 차별받는 계층인 이주노동자와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차별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주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고 우리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룻기에 나타난 타민족에 대한 수용과 존중성, 나오미와 룻이 행한 연대정신, 보아스가 룻에게 한 나그네보호와 힘을 주는 행동을 한국교회가 실천에 옮겨야 한다.

열린 다문화 사회를 위해서 한국교회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다문화사회로 이행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면밀히 검토하고, 중장기적인 비전과 방향성을 갖추어 다문화교육과정을 개발하여 기독교인을 교육한다면, 한국의 다문화사회는 은총의 다문화사회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사실 우리, 한국인 원주민과 이주민을 구분하는 것은 기독교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리 의미도 없다. 베드로전서 211절에 보면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 시민권을 두고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이주민이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한국염은 2001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를 설립, 대표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기독교장로회 청암교회 목사/한국정신대문제공동대표/한국기독교장로회 양성평등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이 글은 2009년 기독교학회에서 발제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