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나라가 임하시며

한국소금 2018. 2. 20. 17:55

나라가 임하시며

 

                                                                         한국염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며하는 기원에는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이 있다. ‘당신의 나라라는 말과 임하시며하는 간구다. 여기서 당신의 나라는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뜻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떤 곳에서는 하늘나라라고도 하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전통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는 구약사상 속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것으로서 예수임 가르치심의 중심테마였다. 예수는 우리에게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며하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 그런데 대다수의 교인들은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보다 죽어서 가는 천국에 더 관심이 많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일차적으로 관심해야 할 바는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나라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임하시며, 우리는 그 임재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의 임재에 대해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도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완성시키신다. 따라서 그 날과 그 때는 하나님만이 아실 분이다(마가13:32, 25:1-13) 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7:20-21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 하는 제자들의 몰음에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대답하셨다. 이 말을 어떤 이들은 우리의 마음에 있다로 해석하는데, 이 말씀은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분의 인격과 삶 그 자에가 이미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가까이 온 징표로 그 분이 한 일은 희년을 성취하는 일이었다. 예수는 누가복음 418절이나 722절에서 보듯이 가난한 자, 눌린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등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셨다. 예수는 이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선언한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임하시는 징표는 불의한 세력으로부터 억압당한 사람들이 해방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가난한 이들, 양심범들, 장애자, 흑인들, 이주민들, 그리고 여성들이 기 펴고 살 수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거기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동트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한 징표는 사탄이 축출되는 것이다(누구11:20). 사탄은 돈과 권력, 명예로 예수를 유혹하고 시험한 것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답게 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이런 악령에서 해방되는 일 역시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존재한다. 우리 안에서 다 이상 착취와 억압이 없어지고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질 때, 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보전될 때 하나님 나라의 표징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라가 임하시며라는 기원은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임하는 역사의 완성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

1. 하나님 나라는 작은 것, 작은 자에게서 비롯된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마태 13:31-33)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극히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가 자라나서 공중의 새가 깃들 수 있는 그런 나무가 되는 것처럼, 작은 누룩이 밀가루 세말을 부풀리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이 세상의가치관과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준다. 이 세상은 힘세고 강한 자가 최고 이고 그들만이 대접을 받는다. 힘이 센 남자들, 권력가진 자들, 부자들이 대접받는다. 힘이 없는 여성들은 매우 작은 자들에 속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보잘 것 없는 여성들이 하는 작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된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작은 자들이 뿌린, 작은 씨앗에 의해 커진다. 예수는 달란트 비유에서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하셨다.

 

2. 하나님 나라는 모두에게 열려져 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가? 원칙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 누구14:15-24, 마태22:1의 큰 잔치 비유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구약 전통이나 예수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에는 의인만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예수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선인이든 악인이든, 그 사람의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어떤 사람들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예수의 말씀 때문에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자에게도 하나님 나라는 열려 있다. 다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웃과 나누라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는 결단을 하느냐, 안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여기서 부자란 돈이나 재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권력, 명예, 지식, 백임이라는 우월감, 남성이라는 특권의식 등, 우리가 가진 모든 기득권을 말한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 기득권을 포기하는 사람에게 열려있다.

자기 기득권을 포기 하고 마음이 가난해져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을 성서는 온유한 사람이라고 한다. 온유한 사람은 남에게 자비를 베풀어 하나님의 자비를 얻는다. 마음이 깨끗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려고 한다. 예수는 자신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종의 모습으로 자기를 낮추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예수! 우리는 그분을 완벽하게 닮기 어렵다. 자존심 하나 못버리고 아둥거리며 사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부모가 강팍하면 자식고 강팍해진다. 나를 열자.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나는 물론 내 자녀에게까지 열릴 것이다.

 

3.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어떤가? 마태8:11,누가 14:15에 보면 하나님 나라가 먹고 마시는 잔치로 비유되어 있다. 잔치란 더불어 먹는 공동의 행위를 뜻한다. 더불어 먹는 기쁨의 자리,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그 기쁨이란 어떤 기쁨인가? 여인이 은전 한 잎을 잃엇다가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 집나간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기쁨, 목자가 양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 그 기쁨을 못 이겨 잔치를 열고 이웃을 불러 모아 함께 기쁨을 나누는 그런 모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함께 기쁨을 나누는 밥상공동체다. 이 밥상공동체는 끼리끼리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계층과 함께 즐기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도 성도들이 네 것, 내 것 없이 빵을 나누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사도행전 2:43-47).

이렇게 공동체적으로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에는 정의와 평화가 넘친다. 정의와 평화의 구체적인 모습은 이사야서 111-9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가져 올 나라를 평화와 정의의 나라로 노래한다. “늑대와 새끼양이, 표범과 염소가, 새끼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노는 곳, 어린아이가 그들과 함께 놀고,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 뗀 어린 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어도 괜찮은,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없는 그런 곳이 바로 정의와 평화의 나라다.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함께 공동체를 일구어 사는 그런 세계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표상이다. 구체적으로 누르는 자가 없어 눌린 자가 해방되고 모든 것이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약한 자의 권리를 보호하며, 가난한 자의 재판을 정당하게 해준다. 오늘날 성차별, 인종차별, 빈부차별, 자연차별로 우리 공동체가 일그러졌다. 힘없는 자, 가난한 자, 이주노동자의 인권이 무시되고 자연이 착취당해 신음하고 있다. 힘 가진 자만을 위한 세상을 더불어 사는 공동체로 되돌릴 때,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


4. 희년정신이 넘치는 곳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어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켜야 할 공동체의 규칙을 주셨다. 그것이 십계명에 들어있고, 구체적으로 출애굽기와 레위기, 신명기 곳곳에 기록되어 있는 약자보호법이다. 특별히 레위기 25장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꼭 지켜야 할 희년법을 제정해 주셨다.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그 다음 해 즉 50년 마다 종을 해방해주고 빚을 탕감해주고 사람과 자연이 함께 안식하라는 희년법은 50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생을 희년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희년정신이 실현되는 곳이다. 억눌린 사람이 해방되고, 권리를 빼앗긴 자가 자기 권리를 되찾으며, 자연도 쉼을 얻는다.

때가 찾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4). 이 말씀은 예수께서 하신 첫 설교다.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에게 다시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이루어졌다.“ 예수의 오심과 삶, 그 자체로 희년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희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희년의 완성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필수조건이다.

희년정신이 넘치는 곳,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곳에는 분열이 있을 수 없다. 실제로 이스라엘에 희년정신과 정의가 없어졌을 때, 이스라엘은 나라가 둘로 갈라졌다. 백성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자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렸을 때, 나라와 민족이 분열하게 되었다. 갈라진 두 나라가 외국의 압제에 신음할 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민족이 하나가 되는 환상을 보여준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고 두 막대기가 하나로 이어지듯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리라는 환상이다. 분열된 나라와 민족은 죽은 뼈, 마른 뼈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를 이루되 힘센 한쪽이 다른 한쪽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막대기를 연결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열이 아니라 하나 되는 것이다. 나라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이듯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권면하셨다.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존재한다. 교회의 공동체적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200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