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미투’와 ‘위드유’ 운동,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다말,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교회는 ‘미투’와 ‘위드유’ 운동,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한국염
미투(#Me Too)란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경험을 드러냄으로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고, 생존자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며 우리는 함께 연대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그 취지가 있다. 그동안 권력형 범죄는 피해자가 오히려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드러내거나 고발하는 것이 힘들었다. 때문에 미투운동은 특히 가해자가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저지르는 권력형 성범죄에 주목한다.
한국에서 미투운동의 시작은 일본군‘위안부’였던 김학순할머니가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최근 미투운동은 서지현검사로부터 촉발되었다. 서검사가 8년 전 동기 부친 상갓집에서 고위상사에게 당한 성폭력을 고발했다. 성추행을 당하는 현장에 법무부 관계자들이 있었는데, 아무도 성추행을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성폭력 피해로 아이 유산, 발작, 극단적인 생각 등 여러 가지 고통을 겪었고 성폭력을 자기 잘못이라고 탓했다고 했다. 서검사는 인터뷰에서 “제가 범죄 피해를 입었고 또 성폭력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거의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닌가, 굉장히 내가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했구나 하는 자책감에 굉장히 괴로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나와서 피해자분들께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는 것을 야기해주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제가 그것을 깨닫는데 8년 걸렸습니다.”라고 증언했다. “피해자가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절대 스스로 개혁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또 “범죄 피해자나 성폭력 피해자는 절대 피해를 입은 본인 잘못이 아니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성폭력을 수사해야 할 검찰에서 동료를 상대로 성폭력이 발생했다는 서검사 증언은 검사와 같은 전문직 신분에서도 이렇게 성폭력이 발생하는데 일반에서는 얼마나 심하겠느냐?” 하고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고,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은 피해 여성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비단 서검사만이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피해를 입었고, 입는다. 검찰 뿐만 아니라 상명하복이 중시되고 위계질서가 강한 폐쇄적인 조직문화에서는 문제가 일어나면 꽃뱀으로 몰리거나 가해자뿐만 아니라 피해자까지 함께 찍혀 불이익을 받는 일이 다반사다. 이 때문에 피해를 당하고도 용기를 내어 고발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는 경우가 많고 급기야는 자기 잘못으로 돌려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서검사가 자신의 성폭력 피해사건을 언론에서 증언하고 고발한 이후 한국사회 곳곳에서 ‘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한국사회에 "Me Too!"운동과 “With You!" 운동을 촉발했다. 미투운동과 위드유 운동은 문화계와 예술계, 영화계, 교육계, 정치계, 그리고 종교계로 이어지고 있다. 가톨릭신부에 의한 성폭력, 개신교 목회자의 성폭력에 이어 불교계에서 스님에 의한 성폭력이 고발되고 미투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언론이 발표한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전문직 종사자의 성범죄 조사 결과는 참으로 무참하다. 2016년 9월 19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더불어 민주당 박남춘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의하면 지난 5년(2011- 2015)간 전문직 성폭력 범죄 검거자 1,258명 중 종교인이 450명(35.7%)으로 가장 많은 수를 기록하고 있다. 박 의원은 "전문직군에 의한 성범죄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피해 여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은폐의 여지도 많다"며 "종교인에 의한 성범죄는 전문 직군 중 성범죄 건수가 가장 많고 계속 증가추세를 보임에 따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종교인 성폭력 범죄 5년간 450명…의사 4백 명 넘어”, KBS 9월 19일자 뉴스. nforyou@kbs.co.kr). 이 통계는 형사 입건되었기에 드러난 것이고, 은폐된 목회자의 성폭력 사례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폭력을 죄라고 고백하고 치리해야 할 종교계에서 성폭력이 심각하게 자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미투운동과 위드유운동에 대해 기독교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2) 개신교 여성들의 반성폭력운동 한 사례
사실 개신교의 미투 운동은 1990년대 후반에 이미 시작되었어야 했다. 한국 기독여성운동에서는 1991년 아동성폭력 후유증으로 성인이 되어 가해자를 죽인 김부남사건을 시작으로, 성폭력 문제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1992년 한국여신학자협의회(이하 여신협)에서 “기독교와 성폭력”이란 주제로 한국여성신학정립협의회를 열어 교회에서 성폭력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루기 시작했다. 이어서 성폭력문제 작업반을 통해서 교회와 가정, 지역사회, 국가와 성폭력 사례들에 대한 현장 성서연구 작업을 하였다. 아동성폭력 김부남사건, 친족성폭력 김보은사건, 국가성폭력으로 주한미군에 의해 살해된 윤금이사건과 일본군‘위안부’문제,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문제 등에 관한 여성신학 작업을 하였다. 필자가 여신협 총무로 일하던 때, 부설 ‘기독교여성상담소’에 목회자에 의해 성폭력을 당했다는 피해자 신고가 접수되었다. 피해자가 자매였다. 그 상황이 너무 끔찍해서 교회내 성폭력 추방 공청회를 열기로 했다. 이때 안기부 직원이 공청회를 열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유인즉 개신교 성직자의 성폭력 문제를 들고 나오면 다른 종교지도자의 성폭력이 불거져 나올 텐데 한국 사회가 감당하기 어렵겠지 않느냐? 하는 요지였다.
여신협이 교회내 성폭력 문제 공청회를 연 이후 공개적으로 비공개적으로 “한국교회에 정면 도전을 하는 것이냐? 기독교 단체가 교회에 먹칠을 해서 선교에 장애를 주는 일을 할 수 가 있느냐? 성폭력 하는 목사수가 얼마나 된다고. 몇 사람이 저지른 일을 공개해서 한국교회 목사 전체가 그렇게 한 것처럼 망신을 주느냐?, 비난하였다. 이런 비난은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신학자들에게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청회에서 제기된 가해자는 결국 교단에서 제명되었는데, 그 후 발생한 교회지도자의 성폭력은 그 교단에서 아무런 처리도 하지 않았다. 그 과정을 보며 엄청난 자괴감이 들었다. 1차 공청회 목회자가 그 교단에서 치리된 것은 그 목회자의 위상이 교단에서 낮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후자의 경우 가해목사는 교단에서 입지가 대단했기 때문에 교단이 치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공청회를 진행하면서 여신협,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공동으로 ‘교회내 성폭력추방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교회내 성폭력추방운동을 펼쳐 나갔다. 2000년 세계교회협의회가 선언한 ‘폭력극복을 위한 에큐메니칼 10년’에 발맞추어 교회내 성폭력극복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성윤리메뉴얼’을 만들고, 교단에 성폭력방지와 처벌을 할 수 있는 법제정 운동 전개, 피해자 재판지원 활동을 하였으나 워낙 교단의 가부장벽이 견고하여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미투운동은 염두도 내지 못했다. 힘의 논리가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었고, 남성중심인 교회정치구조가 교회조직 보호차원, 선교라는 명분을 내세워 문제를 외면하고 왜곡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교회여성들이 침묵만 한 것은 아니다. 교회내 성폭력 문제가 교회여성운동으로 다시 이슈가 된 것은 2016년 우리 교단 K목사 여신도 성추행사건이 불거지면서다. 피해자가 교회개혁실천연대에 상담을 했고, 교단 총무에게도 피해사실을 알렸으나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노회에 고발을 하였다. 이 사실을 접한 기장 4개 여성연대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첫째 교단은 K 목사의 성추행사건에 대해 진실을 밝히고 사회에 사죄하고 대안을 제시할 것을 촉구하며, 이 사태를 초래한 K 목사는 목사직을 내려놓을 것, 둘째 교단의 총무가 구차한 변명으로 가해자 K목사를 편들고 두둔한 행동은 기장 교단이 성차별과 성폭력을 묵인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갖게 하고, 피해자와 교단 여성들에게 2차적인 상처를 가한 것으로, 부적절하게 대응한 P 총무는 교단과 사회에 사죄할 것, 셋째 사건 재발방지를 위해 성평등교육과 목회자 성윤리교육을 교단, 노회, 신대원, 개교회별로 실시할 것, 성차별 폭력 방지를 위한 교단차원의 성윤리 지침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성명서를 발표한 기장여성들은 101회가 열리는 총회에서 목회자 성폭력 문제를 계기로 “교단 성윤리 예방, 법과 제도 마련방안(성윤리강령) 제정의 건”을 교단총회에 상정하여 양성평등위원회에서 초안을 작성하고, 헌법위원회가 받아 연구하여, 총회실행위원회에서 보고하도록 통과되었다.
다른 교단에서도 교회내 성폭력추방을 위해 성윤리제정, 성폭력방지메뉴얼 등을 준비하는 중에 미투운동이 시작되었고, 종교계까지 확산되고 있다. 개신교차원에서 미투운동에 지지하는 선언들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기독교대한감리교여선교회전국연합회, 교회개혁실천연대,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성연대, 감리교여성개발원, 한신과 감신 둥에서 미트와 위드유 지지와 동참선언을 하고 있다. 사회의 #미투운동 힘을 받아 교회가 ‘미투’운동에 ‘위드유’운동으로 응답해야 할 것이다.
2. 다말을 통해 본 성폭력에 대한 성서적 응답
과연 한국교회는 미투와 위드유 요청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어떻게 보면 미투운동의 시조는 성서로 볼 수 있다. 성서는 성폭력으로 고난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묻어두지 않고 적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들판에 놀러나갔다가 세겜에게 강간당한 야곱의 딸 디나, 집단강간당하고 죽은 레위인의 첩, 다윗에게 강간당한 우리아의 처 밧세바 등, 다윗의 딸 다말공주가 당한 성폭력 등. 성서가 성폭력으로 고통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승하도록 한 것은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성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합리화될 수 없음을 고발하고, 성정의를 실현하도록 촉구하기 위함이다. 이 여성들의 이야기들 중에서 사무엘하서 13장에 나오는 ’다말‘이야기를 통해 성폭력의 발생원인과 주변인들의 처리과정, 피해자들의 고통 등을 알아보고 교회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살펴보겠다.
1)성폭력 발생과정
다말은 다윗의 딸로 공주였으나 이복 오라비 암논에게 성폭력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일생을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 다말 이야기는 왜 성폭력이라는 것이 일어나는지,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주변에서 어떻게 사건을 처리하는지, 성폭력으로 고통 받은 여성들이 얼마만큼 참담한 삶을 사는지 잘 보여준다.
성폭력은 다말 경우에서 보듯이 사랑이라는 말로 은폐되지만, 욕정을 채우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이복 오라비 암논이 아름다운 다말을 보고 욕정을 품고, 꾀를 내어 꾀병을 알았고, 다말이 병문안을 오자 강간을 한다. “오라버니, 이스라엘에는 이런 법이 없습니다. 제발 나에게 욕을 보이지 마십시오. 오라버니가 내게 이런 일을 하면 내가 수치를 당하고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다말이 사정하지만 성폭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암논은 기어코 다말을 욕보인다.
성폭력은 근본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성을 지배하려는 성 지배욕이 원인이다. 암논 경우에서 보듯이 성폭력가해자들은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동원한다. 암논에게서 보듯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폭력을 했다는 것도 핑계일 뿐 욕정을 채우려는 욕망이 컸고 그 욕망을 채우는데 권모술수, 권력, 힘이 뒷받침된다. 암논이 다말을 욕망의 대상으로 보았듯, 성폭력은 사람을 인간이 아니라 성적 욕망의 도구로 보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가하는 범죄행위다.
다말 사건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권력가진 자의 욕망에 가담하거나 방조하는 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요압은 암몬이 성폭행을 할 수 있도록 꾀를 내었고, 최고 권력자인 다윗은 상황을 잘 검토하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음에도 무신경으로 다말이 암논에게 가도록 방조했다. 그 결과 다말이 속수무책으로 성폭력을 당하였다.
2)보호 받지 못한 다말
다말 이야기에서 우리는 성폭력피해자가 그 사실을 알려도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가 침묵을 강요당하는 현실을 주목해야 한다. 다말은 자신이 무고하게 성폭력을 당했음을 율법에 따라 알린다. 이스라엘 율법에서는 본질적으로 어떠한 형태의 성폭력도 금하고 있으며, 특히 근친에 의한 성폭력을 금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율법(신명기 22장 25절-27)은 “소리를 질러도 구하여 줄 사람이 없었을 경우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죄가 없고 가해자를 살인죄인으로 규정하고 반드시 책임을 묻도록 했다. 여기서 소리칠 수 없는 상황이란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저항할 힘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물리적 힘뿐만 아니라 위계나 권력 등,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성폭력을 당할 경우 피해자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성폭력을 당하면 당한 피해자가 문제가 있고, 잘못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성서에 의하면 성폭력 피해를 당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성폭력을 가한 사람의 범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까지도 성폭력이 발생하면 피해자 편에 서서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 입장을 두둔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강간을 당한 다말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고발하는 당시 법에 따라 머리에 재를 뿌리고 입고 있던 색동옷 소매를 찢고 목을 놓아 울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율법에 정한 바에 따라 성폭력 피해를 입은 것을 호소했지만, 다말을 보고 사태를 짐작한 오라버니 압살놈은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한다. 비록 율법에서는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하도록 되어 있지만, 현실에서는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다말이 정조를 잃어버린 여성으로 비난받거나 암논을 유혹한 ‘꽃뱀’으로 간주되어 기피되는 현실을 압살롬이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율법이 정한 바에 따라 암논을 심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암논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말에게 돌아온 것은 침묵하라는 강요와 외면뿐이었다. 다말은 침묵을 강요당한 채 한 많은 삶을 살아야 했다. 성서는 다말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다말은 오라버니 압살롬 집에서 처량하게 지냈다.” “처량하게”라는 말 속에 엄청난 고통이 함축되어 있다.
아버지 다윗 역시 딸 다말이 암논에게 강간당한 것을 듣고서 몹시 분개했지만, 암논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자신이 밧세바를 성폭행한 경험 때문이었을까? 그 후에 압살롬이 동생 다말에게 한 보복으로 암논을 죽였을 때는 입고 있는 옷을 찢으며 누워버린다. 만일 다윗이 율법이 정한 바에 따라 암논을 처벌했다면 형제살인이라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권력으로 악을 덮으려 했기 때문에 더 큰 참사가 발생했다. 딸이 강간당했음에도 암논을 심판하지 않는 다윗의 태도, 암논이 다말에 대한 보복으로 죽임을 당했을 때 애통해 하는 다윗 모습은 피해자 편에 서지 않고 가해자 편에 서서 사건을 바라보는, 가부장 사회의 단면을 여지없이 드러내준다.
3) 여성들의 고난에 대한 전승과 기억
그런데 다말 이야기에서 우리는 한 희망을 본다. 다말사건은 강간당하고 침묵당한 고난의 사건으로만 끝내지 않는다. 압살롬은 자기 딸 이름을 희생당한 고모 다말의 이름을 따서 ‘다말’이라고 지음으로써 억울한 다말의 고통을 기억하고 위로한다. 신명기에 기록된 하나님 법은 성폭력을 악이라 규정하고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악의 뿌리를 뽑기 위함이라고 증언한다. 다말 사건은 이렇게 성폭력 범죄자를 처벌하지 않고 은폐하는 가부장사회의 잘못된 태도를 고발하고, 우리가 무엇을 경계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를 경고하고 있다. 나아가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여인들의 한과 고난을 기억하고 전승하고, 이를 통해서 성폭력 없는 사회를 일구도록 촉구한다.
3. 오늘의 다말을 위한 교회의 응답
오늘도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 앞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 우리가 다말 이야기를 다시 상기하는 것은, 다말, 디나, 레위인의 첩, 밧세바 등 남성들에 의해 성폭행 당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그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 현장에서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동성폭력, 집단강간, 근친강간, 납치강간, 일본군성노예제가 보여주듯 전쟁 중에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 권력에 의한 성폭력 등, 성서에서 고발한 여성들에 가해지는 성폭력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성(폭력)범죄율이 현재 전쟁과 내전을 겪고 있는 나라들을 제외하고 세계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높다고 한다. 율법에서 성폭력 범죄자를 살인죄와 같은 중벌로 처벌하도록 정해져 있음에도 다윗왕이 이 법을 무시했던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에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성폭력특별법이 엄연히 있지만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피해자 여성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고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성폭력피해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성폭력피해에 대한 고통도 문제지만, 성폭력피해를 드러냈을 때 가해지는 2차 폭력이라고 한다. 성폭력을 폭로해도 그 조직 안에 있는 자들이 조직 보호 차원에서 사건을 은폐하거나 축소하고, 냉담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충격을 받고 입을 닫는다. 드러낼 경우 가해자가 부인하면 입증을 해야 하고, 되레 무고나 명예훼손으로 고발된다. 법정에 가도 피해자가 목숨을 걸고 저항한 증거가 없을 경우, 가해자가 처벌되는 사례가 드물다. 특히 종교계로 오면 가해자 처벌은 매우 어렵다. 한국교회가 #미투에 위드유로 응답하기 위해서는 교회를 성평등교회로 만들고, 교회지도자의 성범죄를 막을 수 있는 법적 장치와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1)교회를 성평등교회로 만들어야 한다.
왜 이렇게 성폭력이 끊이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사회가 성차별사회이기 때문이다. 성차별 사회는 자기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계층에 대해 무시하고 함부로 한다. 그 결정체가 바로 성폭력이다. 성폭력은 강자가 약자를 성적으로 억압하려는 사회구조 문제다. 힘 중심인 사회에서 남성들이 자기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힘을 무기로 힘없는 여성과 아동들을 짓밟는 행위가 성폭력이다.
특히 교회내 성폭력은 권력형 성폭력이다. 교회내 성범죄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절대적인 권력과 위계 속에서 여교역자와 여신도, 여자청소년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속성상 근친강간에 가깝다. 피해 횟수는 1회성 피해이기 보다는 한 성직자에 의해 장기간 지속적인 경우가 많다. 1~2년은 보통이고 심한 경우 10년을 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목회자 한명 당 피해자는 보통 2명에서 많게는 그 피해자가 40-50명에 까지 이른다. 피해 장소는 주로 당회장실, 기도실, 교육관 등 교회 안이나 기도원, 별도 시설에서 이루어진다. 피해 동기는 개인 상담이나 신앙상담이 동기가 된 경우도 있지만 안수나 안찰 등 치유행위를 빙자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있으며, 죄 씻음 등 영적 체험과 결혼을 빙자한 강간이 있다. 고발을 할 경우 주의 종에게 해를 가하면 벌을 받을까봐, 또는 선교에 지장을 줄까봐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잘못된 신학과 신앙을 주입해서 성폭력을 하기 때문에 피해 증거를 제시하기 어렵다.
교회 내 성폭력이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 성폭력피해 여성들이 겪는 고통에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 신고해서 주의 종을 해롭게 하면 벌 받을 텐데…. 내가 죄가 많아서…. 하나님이 계시기는 한 건가?”등등 영적· 신앙적인 면에서 위기까지 겪게 된다. 사건이 드러나면 피해자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2차 가해를 받는 경우가 많다. 교회 구성원이 피해자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를 목회자를 유혹한 뱀으로, 교회를 깨뜨리는 사탄으로 몰아 교회에 더 이상 발을 못 붙이도록 한다. 목회자의 가해 사실이 드러나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법의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교인들 앞에서 증언한다(구체적인 자료는 2016년 12월 22일 기윤실과 기독법률가협회가 남윤인순, 권미혁의원실과 공동주최한 ‘늘어가는 종교인 성폭력범죄, 어떻게 할 것인가?’토론회에서 발표한 한국염, ‘교회내 성폭력의 실태와 과제’ 참조).
서검사의 증언도 같은 맥락이다. “가해자가 최근에 종교에 귀의해서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하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회개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그 가해자는 서울 강남 모 교회에서 회개하고 구원을 얻었다는 간증을 했다는데, 이 간증 때문에 서검사가 증언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교회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성차별적인 신학과 교리를 성평등신학으로 바꾸고, 성폭력을 방지할 수 있는 정책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모든 인간이 존엄한 존재며,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성폭력은 여성을, 아동을 차별해서 생기는 잘못된 범죄이며 악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특히 교회에서는 성폭력이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중죄임을 고백하고 믿음으로 생활화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여성과 남성의 동등성을 인정하는 교회와 사회에서 성폭력은 일어날 수가 없다.
유엔인권선언 1조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주창은 창세기 1장 26절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고,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천부인권론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형상으로서 존엄한 존재임을,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엄한 존재임을 선언한다. 어느 한 성을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 형상을 차별하는 매우 큰 죄를 범하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 신앙이다. 이것이 성 정의이며, 이를 기반으로 한 교회에서 성폭력이 설 자리가 없다.
성평등교회가 미투에 대한 교회의 위드유 응답이라고 할 때, 한국교회의 성평등 위치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성평등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인과 교회조직, 교단이 모두 변화되어야 한다. 그동안 기독여성운동은 성평등교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정책과제를 제시했지만, 교회에서 그 인지도가 매우 낮고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
유엔기구들은 10년 전부터 성평등 정책의 결과가 성평등한 효과를 낳았는지를 평가하고 측정하기 위한 정책효과성 진단프레임을 개발해왔다. #UNDP (유엔개발기구)에 의하면 정책효과가 개인적, 조직적, 공식적, 비공식적인 4가지 측면 모두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인식하면서 변화를 5단계로 제시한다. 젠더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는 저항적인(negative) 단계→ 젠더를 알지 못하는 몰이해(blind) 단계 → 젠더문제를 주류화시키지 않은 채 별개로 취급하는 특별화(targeted) 단계 → 젠더를 고려하지만 성주류화를 위한 구조개선 노력은 하지 않는 반영(responsive) 단계 → 불평등한 젠더권력관계와 성차별적인 구조개선을 추구하는 전환적인(transformative) 단계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국제위원장 조영숙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따옴).
지금 한국교회는 어디쯤 와 있는가를 분석하고, 변화를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전략을 세워야 한다.
2) 교회내 성범죄, 법적 처리의 어려움과 한국교회의 성범죄 예방과 치리 시스템
교회내 성폭력(성 범죄)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또 다른 사항은 법적으로 처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목회자에 의해 발생하는 성폭력문제를 사회법에 제소할 경우 증거를 입증하기 어려워 처리가 힘들다. 위의 토론회에서 김병규 변호사는 “ 종교지도자 성폭력 범죄는 ‘영적 아버지- 신앙의 자식’이라는 특수 위계 관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범죄사실이 은폐되거나 인지되지 못해 사건처리가 어렵다. 설령 피해사실이 드러나도 ‘위계에 의한 성폭력’ 사건으로 인정받기 어려워 화간의 형태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성폭력사건 처리에서 법조계에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강력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종교계의 특수상황을 이해시켜야 하는 과제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어려움은 설령 사회법정에서 유죄를 인정받아도 교회법으로 치리가 되기 어렵고, 또 치리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목회자 중심의 권력과 위계구조, 교단과 교회의 불평등한 성의식과 성범죄 은닉구조 하에서 성범죄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미국 장로교회(PC USA),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독일 개신교(EKD), 캐나다연합교회(UCC) 등 해외교회에서는 교회 내 성범죄는 목회자가 그 권위와 힘을 남용해 기독교 윤리상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목회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성범죄 예방을 위해 목회자 강력처벌규정을 헌법에 명시, 신학생과 목회자 대상으로 성평등과 윤리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성범죄피해신고를 할 수 있는 상담기관 운영과 피해자 구제과정에서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특히 우리 교단과 파트너관계에 있는 캐나다연합교회의 경우 모든 교회직원을 대상으로 년 1회 3일씩 성폭력·성 학대 예방교육을 매뉴얼에 의해 실시한다. 이런 예방교육과 더불어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교단의 성범죄 관련기구에 여성위원이 다수여야 한다고 규정함으로 남성들끼리 봐주기 여지를 방지하고 있다는 점이다(자세한 것은 교회개혁실천연대 주최, '교회 성폭력 근절을 위한 정책제안 포럼‘에서 한 김애희 발제 '해외 교단의 성 정책 관련 자료 조사' 참조).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헌법에 목회자 성폭력을 처벌규정을 넣은 교단이 하나도 없으며, 성범죄 예방을 위한 장치가 총체적으로 부실하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제기된 목회자 성폭력의 경우도 교단에서 성폭력이나 성윤리규정에 의해 처벌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 또는 ‘교인을 실족케 한’ 잘못으로 치리되었다. 윤리규정이 있는 유일한 교단인 감리교의 경우 ‘동성애’에 관한 조항일 뿐, 성폭력 범죄에 대한 규정은 없다. 법규정이 없으니 상담기구설치라든지 예방교육 등의 시스템은 전무하다. 따라서 한국교회에도 교회내 성범죄를 예방하고 치리할 수 있는 법제정과 제도적 정치가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법적 장치와 제도가 필요한가? 앞에서 소개한 토론회와 포럼, 교회내 성폭력추방대책위원회가 제시한 정책제안을 보면 ▼ 가해자에 엄격한 징계조항을 교단헌법에 넣고 제대로 징계할 것, ▼교단 내에 성폭력 전담기구 설치와 피해자 상담기관 운영, ▼신학교와 교단내 성폭력특별법 제정과 성윤리위원회 설치, ▼신학생과 목회자 대상 성평등, 성윤리교육 강화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해자 중심 대응방안이다.
미투는 “나도 피해자다!” 하는 고통의 비명이지만, 그 증언은 단순히 자신이 받은 고통에 대한 보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같은 피해자가 더 생기기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미투운동은 곧 위드유 운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미투’가 ‘위드유’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 미투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주변 사람들의 위드유로 인해서 침묵을 깬 사람들의 용기에 힘입어 제2, 제3의 미투가 나오게 되고, 그 위드유에 의해 미투를 한 사람들이 치유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투에 대한 위드유 응답은 한국사회의 잘못된 성문화와 관행적 성폭력, 한국교회의 잘못된 성윤리에 대해 아니요! 하는 경고로 이어지게 된다.
2)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야
성정의와 더불어 우리가 신앙인으로 생각할 것 하나는 사마리아인 비유다. 교회에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만난 사람을 돕고 함께 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쳤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성폭력피해자와 강도만난 사람으로 연결하지 못했다. 성폭력 가해자는 강도며, 피해자는 강도만난 사람이다. 이제 성폭력피해자를 강도만난 사람으로 인식하고 위드유를 해야 한다. 강도만난 자를 두고 피해간 바리새인이나 레위인처럼, 한국교회는 성폭력피해자를 외면하고 그 편에 서지 않았다. 왜 하필 예수님이 강도만난 사람을 버리고 간 계층을 바리새인, 레위인으로 지정했는지, 그 연결고리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한 예수님이 누가 강도만난 이의 이웃이냐고 물은 초점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마리아인 비유의 핵심은 강도만난 사람 편에 서는 것이 이웃이라는 것이다. 국제인권기준이 피해자 중심주의이듯이, 피해자의 편에 서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폭력 문제가 발생할 경우 피해자 중심에 서야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성폭력 문제가 발생하면 교단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성폭력 피해자의 편에 서기 보다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그 자리를 피해가려고만 한다. 굳이 최후의 심판 비유를 들지 않더라도, 강도만난 사람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용납이 안 되며, 더더욱 강도의 편에 서서 성폭력 피해자를 외면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강도만난 이를 여관에 데려다주고 회복할 때까지 보호토록 한 사마리아인처럼, 교회는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회복하고 이웃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사마리아인이 되고 여관이 되어야 한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당신은 강도를 만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함께 하겠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할 ‘위드유’다.
교회의 미투와 위드유 운동은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상대를 성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범죄라는 인식을 키우고, 이런 범죄를 방지하고 줄일 수 있는 문화를 이끌어 내는데 큰 기여를 한다. 그러나 최근 미투운동이 전개되면서 미투에 대한 잘못된 반응들이 일어나고 있다. 여성들의 미투운동에 대해 가해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임을 묻기보다 남성들을 잠재적 성폭력가해자로 본다며 남성이 가해자면 여성은 꽃뱀이라고, 여성혐오를 조장하거나 남녀갈등을 부추기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성서는 성폭력이 죄이며, 악임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또 하나의 잘못된 반응은 펜스룰 조짐이다. 팬스룰이란 미국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자기는 아내 외엔 밥을 같이 먹지 않는다며, 남녀 둘이 있는 것을 금기시하여 성폭력 가능성을 차단한다고 말한 데서 비롯된다. 문제는 이에 동조하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성폭력 의혹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는 것이라 좋다는 반응인데, 남자와 여자의 소통을 막고, 장벽을 쌓는 길이다. 펜스 룰은 남성과 여성의 파트너쉽을 깨고, 여성을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잘못된 결과로 이어진다. 펜스룰은 여교역자의 목회 자리를 위협하고, 교회 코이노니아를 방해한다.
사실 교회에서 이 펜스룰은 오래전부터 일각에서 시행되어 온 것이다. 여목회자와 문제가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아예 여교역자와 함께 일하지 않는 남자 목사님들이 있다. 교회에서 여교역자를 청빙하지 않는 성차별문화도 문제지만, 펜스룰을 적용해서 여교역자를 기피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성적인 오해도 피하고, 임신과 육아라는 불편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이기적이 목회관이 목회자들 사이에 회자되어 온지 오래다. 이 역시 성차별이며, 부정 탈까봐 강도만난 사람을 피해간 바리새인이나 레위인과 다를 게 없다.
교회내 성폭력 문제는 비단 목회자나 종교지도자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 없다. 성폭력 문제에서 우리 모두는 가해자이거나 피해자, 방조자이거나 방관자라는 점에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제 교회가 미투운동, 위드유운동에 적극 나서야 한다. “당신 잘못이 아니예요. 힘내세요, 함께 하겠습니다!” 이런 격려와 함께 성폭력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교회를 성평등교회로 만들고, 성폭력을 추방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교회가 자정될 때 그 힘으로 사회를 자정시킬 수 있고, 이 땅에서 다말의 울음소리가 그치게 될 것이다.
이 글은 2018년 3월 26일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세미나실에서 개최된 기장여성연대 정기모임에서 한 발제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