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땅을 향한 기장여교역자들의 행진
가나안 땅을 향한 기장여교역자들의 행진
-기장여교역자, 그녀들을 기념하며-
한국염/전 기장여교역자협의회 회장
역사학자요, 언론가요, 독립운동가인 단채 신채호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이 말은 비단 민족 역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사를 보면 여교역자의 역사는 간 데 없고 온통 남성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여교역자들의 한 일과 공헌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래도 되는 걸까? 역사라는 말 자체가 남성들의 이야기 History 이니 이제 여성들의 이야기 Herstory 를 새로운 역사의 이야기로 써야 한다. 교회사에서도 우리 여성들의 교회사를 새로 써야 한다. 복음을 위해 기독여성이 한 일, 여교역자들이 한 일을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기념해야 한다. 특히 이 시간 한국기독교장로회 여교역자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향한 과제를 모색하고자 한다.
1. 기장여교역자회 전사
초창기 한국교회의 디딤돌 전도부인
우리가 우선 기억해야 할 여성들은 기장이 출발하기 전 초창기 우리 한국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애를 썼던 우리 선배 여교역자들인 전도부인들이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는 가부장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압제당하고 차별받으며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여자도 남자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하나다.‘라는 남자와 여자, 성의 구별없이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유교 전통의 가부장제 하에서 시달리는 여성들에게 말 그대로 복음이었다. 이 복음에 접한 여성들은 성서를 읽기 위해 사경회를 통해 읽기 쓰기를 배웠고 이들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전도부인이 되었다. 여성이 집 안에만 있지 않고 전도부인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 일반적 규범을 깨뜨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가족과 마을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한 전도부인은 매를 맞으면서도 ”여자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주 예수님 안에서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 복음을 버릴 수 없다며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기 목숨을 내걸고 복음을 증거했는데, 그것은 복음이 준 해방과 자유의 감격 때문이었다. 이런 전도부인이 지나간 곳에 새신자가 생겨났다. 전도부인들의 역할과 공헌에 대해서 브라운 이라는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교회의 성공에는 전도부인의 노력이 있다.“ 처음에는 선교사들을 돕는 조력자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명실공히 한국교회 여신도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전도부인들은 개별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개교회 여성들을 조직하고 성장을 도왔다. 이렇게 전도부인들이 조직한 교회의 여신도조직들을 기반으로 국제보상운동 등 일제하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하는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교회의 만세운동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런 전도부인의 역할과 공헌은 묻혀버리고 교회가 커가면서 교회제도와 질서는 복음의 본질을 벗어나 가부장적 교회가 되어 버렸다. 전도부인들에 의해 해방과 자유로서의 복음을 맛보게 된 교회여성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성차별의 질곡 속에 다시 놓이게 되었다. 신학교가 생기고 여성들도 신학공부를 해 전도부인에서 전도사가 되었지만 여교역자들의 역할과 위치는 딱 거기까지였다. 오죽했으면 춘원 이광수가 1917년 청촌지에 ”금일 조선야소교의 결정’이라는 글에서 ‘제일은 금일 조선 예수교회는 계급적이외다.’라고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목사와 장로를 비판했다. 사실상 남자만 목사와 장로가 될 수 있는 교회 제도에서 여성은 목사나 장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의 계급주의는 전도부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오죽 차별이 심했으면 1922년이 여전도사들이 남교역자들과의 불평등한 임금을 시정해 줄 것을 요청한 일도 있었다. 이렇게 임금차별 뿐만 아니라 1930년 남녀 평등에 입각한 교회치리권과 운영권, 여장로와 여목사 안수를 요청하였다. 이미 이 시대부터 여교역자들의 지위행상과 평등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요구는 남성교역자와 장로들이 지배하는 한국교회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바울의 말 때문에 묵살되고 말았다.
한국초대교회의 디딤돌이 되었던 전도부인들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 여교역자들이 생각할 점 하나는 왜 이들이 각자 복음전도로만 그치지 않고 조직을 만들었나 하는 것이다. 교회여성들의 조직을 만들고 자기들의 조직을 만들어서 그 조직 틀 속에서 서로 뭉쳐서 민족을 위한 일, 자신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활동을 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덕지 목사와 여성안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한명의 인물은 최덕지목사다. 해방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었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들 주에 경남노회 안에 들어가서 교회재건을 하자는 파와 안된다는 파가 달라졌다. 그때 재건파에서 신사참배 반대를 해 옥고를 치루었던 최덕지 전도사에게 공로를 인정해서 1951년 4월 3일 목사안수를 주기로 했다. 여성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최덕지 선생에게 주는 것이라고 목사안수 허락 이유를 밝혔다. 그러자 최덕지 전도사는 일서서서 ‘오늘 나 개인 최덕지에게 목사 안수한다면 안받겠습니다. 여자에게 성직을 줄 수 있는 것이 성경적으로 진리냐 아니냐, 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분명히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자 찬반토론 끝에 여성들도 성경에 따라 안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헌법에 여성안수권이 명시되었다. 이에 최덕지목사의 뒤를 이어 김영수그 김가숙 두 여성을 목사로 안수시켰다. 이후 여성안수에 반대하는 파가 나오고 이러한 의견대립으로 지지파와 반대파가 분열되었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여장로와 여목사직을 여러 가지 이유로 번번히 기각하였다. 여성안수를 위해서는 분열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무튼 이 시간 우리는 여성안수의 역사에서 여성 전체의 권리를 위해 자신 개인에게 주는 영광의 자리를 거부한 최덕지목사를 기억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전도부인들의 이야기를 살려내고 기억하려는 것은 당시 여교역자들의 복음을 향한 열정과 공헌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교회를 향한 이들의 투쟁의 역사도 함께 기억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분들이 우리의 젖줄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초창기 한국교회의 산 증인이었던 우리의 선배 전도부인들처럼 그렇게 복음을 향해 열정적인가? 복음을 통해 자유와 해방을 맛보는가? 복음의 본질인 남자와 여자의 평등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가? 이런 것이 없다면 우리는 전도부인을 제대로 기억하는 게 아니다.
2. 여교역자들의 권리와 연대를 위한 기장여교역자협의회, 출애굽역사를 시작하다.
기장여교역자회의 탄생
무엇보다 우리가 여교역자회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기장 여교역자들이고, 기장여교역자회는 우리 회원들에 의해서 회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회원의 단체로서 우리의 고향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1954년 6월 10일은 우리 교단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탄생된 날이다. 기장은 ① 우리는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복음의 자유를 확인한다. ② 우리는 전 세계 장로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건전한 교리를 수립함과 동시에 신앙 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 ③ 우리는 노예적인 의존사상을 배격하고 자립자조의 정신을 함양한다. ④ 그러나 우리는 편협한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전 세계 성도들과 협력, 병진하려는 세계교회 정신에 철저하려 한다“는 새로운 기치를 내걸고 전통과 교권주의에 사로잡힌 기존 한국교회에서 탈출한 출애굽교회(기장성)다. 출애굽 해서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모세와 아론의 역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십보라와 브아 같은 산파들, 모세아 아론과 같이 출애굽의 지도자였던 미리암 그리고 히브리인들의 가나안 입성을 가능케 한 라합이라는 특별한 여성 지도력이 있었고, 이 여성들이 있었기에 출애굽의 역사, 가나안 입성의 역사가 가능했다. 마찬가지로 기장의 오늘이 있기까지 기장의 십브라와 브아, 미리암, 라합인 기장 여성들, 특히 기장 여교역자들이 있었다. 이 여성들, 기장 여교역자들을 기억하고, 전승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제목을 ‘가나안 땅을 향한 여교역자들의 행진’이라고 잡았다.
기장 여교역자회가 만들어진 것은 1956년으로 여전도사 김계성, 조정동, 조남순, 홍화숙, 김운자, 박명필, 정순원 등이 처음에는 여교역자의 친목을 위해 여전도사회를 조직하였다. 1957년에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정기총회에서 여전도사의 회원권을 청원하여 여전도회 회원이 되었다. 같은 해 여전도회의 회원이 된 여전도사들은 여전도회 회장이면서 교단 부녀부장이던 강정애 회장을 통해 여목사제를 교단총회에 청원하였으나 부결되었다.
여교역자회가 탄생된 이면 에피소드다. 당시 교단 평신도들 특히 여성들 교육을 위해 카나다교회의 지원으로 교단에서 설치한 베다니학원에서 1967년 10월 26일-28일 ‘현대교회의 새로운 여교역자상’이라는 주제로 여교역자 교육이 있었다. 이때 주제 강사인 김정준교수가 “여교역자도 교역자다. 목사와 다른 점이 없다. 언제까지 남자 목사들이 시키는 일만 맹종하려느냐? ...자신의 위치 확보에 힘쓰지 않는데 누가 갖다 줄 줄 아느냐?”는 내용으로 각성을 촉구하고 권리의식을 고취시킴으로 여교역자협의회 탄생의 촉매역할을 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참석자들이 여교역자협의회 탄생을 적극 추진했다. 1967년 11월에 전도사로서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총무이던 김영희 총무와 한신 여동문회장 강혜순씨가 여전도사회와 여동문회를 통합하여 여교역자협의회를 발족할 것을 제의했고, 1967월 12월 7일 월례회에서 여교역자협의회 발족을 결의하였다. 마침내 1968. 1. 경동교회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김영희 전도사가 초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기장여교역자협의회는 다음과 같이 회의 목적을 정했다.
“우리 회는 여교역자들의 자질향상과 지워확보를 도모하며, 회원들간의 친목과 유대를 강화하고, 동지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교회와 사회를 섬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목적은 그 단체의 정체성과 과제를 보여준다. 우리 회의 목적에 의하면 우리 회의 과제는 ‘여교역자들의 자질향상과 지위확보 도모, 여교역자들간의 친목과 동지애적 유대강화, 그리고 교회와 사회를 섬기는 일’ 세 가지다. 우리가 우리의 지난 역사를 점검할 때는 목적과 정체성에 맞게 살고 행동해왔는가를 물어야 한다.
1) 여교역자의 자질향상과 지위확보를 위한 활동
여교역자협의회는 창립 이래 여교역자의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여신도회전국연합회 제 34회 정기총회에 여목사제도를 교단총회에 청원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 청원은 해마다 이어졌다. 1971년 여목사제도 재청원, 여장로의 총회 자동총대권, 여전도사의 당회참석권을 교단총회에 청원하였으나 역시 부결되었다. 마침내 1974년에 여목사 안수제가 통과되어 77년에 1호 여목사가 배출되었다. 여교역자협의회는 여목사 안수제도와 더불어 교단총회에 은퇴여교역자 은급지급을 위한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은퇴여교역자를 위한 안식관을 준비하고 있는 여신도회에 기금을 보내기도 했다.
여교역자 자질향상을 위한 노력은 월례회와 총회 교육강좌 등, 각종 교육을 통해 이루어졌다. 총회 주제를 보면 여교역자회의 관심을 잘 알 수 있는데, ‘지도자로서의 여교역자상’, ‘네 발의 신을 벗어라’, ‘교회의 민주화를 위한 여교역자의 역할’ 등이었다. 특히 10주년 총회 주제는 ‘기장의 기장성’으로 교단의 정체성에 맞는 여교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돋보이고 있다.
여교역자의 자질향상과 지위확보를 위한 노력은 세계교회협의회가 선포한 ‘기독여성 10년’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는 1988년부터 1997년까지 ‘여성과 함께 하는 교회’라는 구호를 내걸고 교회가 여성과 함께 하는 ‘기독여성10년’을 선포한 바 있다. 기독여성 10년의 목적은 교회가 여성들이 교회와 사회에서 한 공헌을 인정하고 평등교회를 이루라는 것이었으며, 교회가 인정해야 할 여성의 공헌은 ‘교회와 사회공동체 전역에 걸친 여성들의 참여, 정의와 평화와 창조의 보존을 위한 여성들의 결단과 헌신, 그리고 여성들이 스스로 신학하는 일과 영성을 나누는 일’이다. 이 기독여성 10년은 이후 2000년부터 10년 동안은 ‘폭력극복 10년’으로 이어졌는데, 우리 기장여교역자회도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여교역자들의 자질향상과 지위확보는 사실상 ‘기독여성10년’의 여성참여증진과 ‘여성의 눈으로 신학하고 영성을 나누는 일’을 합친 것이다.
1) 여교역지 지위향상과 참여증진을 위한 활동.
-여교역자 지위문제 법안 개정을 위해 활동하고 , 개교회가 여교역자를 청빙하도록 하는 일과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건의한 일.
-여교역자 복지문제 협의회 개최와 여교역자 지원향상과 복지향상운동을 펼친 일(출산휴가, 안식년제도, 교육기회, 은급가입, 연금가입, 생활보장 개선 등)
-기장여성연대(여신도회, 여교역자회,여장로회,한신여동문회)에 참여하여 교단에 양성평등위원회를 신설토록 했으며, 기장여성총대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그 결과 총대 10명당 여교역자1인, 여장로1인씩을 총대로 선출하도록 하고, 교단 총회 각 위원회에 여성 1인 이상 의무공천, 세습불허용 항목에 부부목회자 삭제, 기장양성평등실태조사, 기장양성평등선언서채택, 노회와 교회별 성평등교육을 위한 헌의, 성윤리강령 제정과 성폭력예방을 위한 제도 마련 헌의, 성윤리강령과 성폭력예방을 위한 특별법 제정 헌의 , ‘생명다리 이어가기’ 성평등교회지침서 제작과 배포 등을 통해 기장 여교역자의 위상과 지위를 높이도록 한 일
-한신대 신대원 학생 목회실습을 위해 목회현장 제공, 여신학생과의 대화 등을 통해 후진들로 하여금 여교역자와 여교역자현장에 대한 이해를 증진토록 하고, 신대원여학생에게 장학금, 청년여성지도력 계발을 위한 기장청년회 여성실무자 인건비지원, 여성신학 박사과정 여학생에게 장학금 지원 등을 통해 후진 양성을 한 일
2)여교역자의 자질향상과 여성의 눈으로 신학하고 영성을 나누는 활동
-교육훈련원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회원들의 영성개발과 지도력개발을 활성화한 일
-총회 교육대회와 전회원만남의 날 교육을 통해 회원들의 역량강화와 지도력개발, 시대적 과제를 모색한 일(총회와 교육대회 주제 참조)
-회원들의 목회영역인 특수선교, 민중목회, 여성목회 영역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고 효율적인 목회전략을 모색하고, 모성목회 신학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
-지역사회선교를 위한 전문지도자 훈련을 실시(각 지역회 이동강좌, 미래지도자훈련, 상담교육과 훈련, 지역사회선교훈련, 출판, 홍보등)
-외국교회 여성지도자와 연대활동을 전개하고 영성을 나눔(일본기독교여성교역자회, 캐나다연합교회 여성목회자회, 재일동포선교현장 담방)을 통해 글로벌 목회과제와 일치를 강화하고, 미국장로교 여성대회에 초청받아 총무와 국제위원장이 참여하고, 임보라목사의 가나 아크라 국제성평등회의 참석에 앞서 준비모임을 함께 하고 회의 참석에 대한 보고회를 한 일
- ‘여성목회와 지도력’을 주제로 지역 이동강좌, ‘비상-여성목회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여 여성목회와 여교역자의 오늘을 진단하고 미래 비전과 과제를 모색한 일
-성서와 설교, 여성신학 이해 등을 주제로 한 여성신학 연구모임과 여성신학 영어공부 등 소모임을 통해 여성의 눈으로 신학하고 영성을 나누는 일을 함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여성사전대회와 총회에 참석하여 세계교회의 과제와 여성목회의 비전을 넓힌 일
- 회원들의 논문발표를 여성목회 특별강좌로 열고 회원들의 관심사와 새로운 여성신학의 흐름을 파악한 일
-회보에 여성신학을 소개하여 여성신학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출판물을 통해 회원들 간의 목회현장을 개발하고 공유한 일(‘목회현장’발간, ‘여성목회’발간, 회보발간)
-타 기관과 연대하여 여교역자들의 교육 현장을 넓힘(선교교육원에서 하는 계속교육/ 상담교육-영성상담연구소,한국심리치료연구소,크리스찬치유목회연구원/성서연구-여성교회,아시아여성신학교육원,여신학자협의회/평화교육-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 한국여신학자협의회)
기장여성연대 구성과 한 일
위 활동에서도 보지만 여교역자들의 지위향상은 여교역자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장여성연대가 큰 힘이 되었다. 교단의 4개 여성단체들, 여신도회와 여교역자회, 여장로회, 한신여동문회가 기장여성연대라는 이름으로 모여 가부장적 교단을 성평등한 교회로 바꾸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교단의 여성정책과 교단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분석하고 양성평등 교단으로 가기 위한 대안들을 구체적으로 모색해 기장여성10년 달력을 만들었다. 또한 교단 총회에 대비해서 여성총대모임을 갖고 총회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한 전략논의도 하고 총회장과 총무를 초청하여 기장여성연대가 제출하는 헌의안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는 모임을 해마다 하고 있다. 또한 교단 총회 전 여성총대들이 모여 총회에 나오는 헌의안과 양상평등위원회에서 헌의한 사항들을 통과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 모임을 하고 있다. 이 일을 통해서 교단에서 여성들의 지위가 하나 둘 확보되어 가고 있다.
초교파여교역자 교류와 연대
교회에서의 여교역자를 비롯한 교회여성의 지위를 위해 노력하던 여교역자회는 1972.년 11월 6일 예장, 감리교, 천주교 등 초교파 여교역자 초청, “한국이 사는 길”이라는 주제로 서울 경동교회에서 일일세미나를 개최하여 최초의 초교차여교역자 모임을 실시하였다. 이때부터 몇 년간 돌아가면서 초교파여교역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다가 1974년 10월부터 한국교회여교역자연합회로 이름을 바꾸어서 교단간의 친교를 도모하며 여교역자의 지위향상을 위한 초교파적으로 연대강화를 하고 있다. 기장여교역자회가 초교파여교역자회의 산실 역할을 한 것이다(한국교회여교역자연합회는 1981년 여신학자협의회와 병합하기 위해 해산되었다가 1989년에 다시 재창립된다).
2) 여교역자 간의 친목과 동지애적 유대강화
여교역자들의 친목과 유대강화 활동은 몇 자기 사례를 통해 잘 드러난다. 여목사 안수제도 통과에서 보여준 연대와 결속, 은퇴여교역자를 위한 베다니집 관장 선임, 지도력개발원 프로그램에 참여한 회원들간의 자매애, 20주년 기념교회 설립, 회가 위기에 빠졌을 때 회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기금을 살리기 위해 돈을 모으고 회의 재건을 위한 활동 등에서 여교역자들의 끈끈한 연대와 자매애를 볼 수 있다.
여성목사안수제도 통과와 여교역자들의 연대
드디어 1974년 대망의 여목사 안수제도가 교단총회에서 통과되었다. 세계여성의 해를 일년 앞두고 통과되었는데, 서울노회에서 헌의하였다. 이때 통과를 도와준 것이 총회 헌장 개정이었다. 헌장에서 목사자격을 35세 이상된 者로 되어있던 것을 35세 이상된 사람으로 바꾸었고 이 사람에는 남자와 여자가 모두 속한다는 이유로 헌의를 해 통과되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여성목사 안수가 통과된 다음해 세계여성의 해인 1975년 여교역자협의회는 5. 26~27일베다니집에서 “교회의 민주화를 위한 여교역자의 역할” 이라는 주제로 총회를 실시하면서 본격적으로 교회민주화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77년에 실시된 준목고시에 양정신, 김정희 두 전도사가 합격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이 합격한 데는 여교역자회의 공헌이 컸다. 목사안수제가 통과된 다음 여교역자회에서는 여성안수의 첫 단계인 준목고시 준비를 위해 강좌를 열었다. 안수를 받고자 하는 여전도사를 모으고 준목고시 시험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를 초방해 시험공부를 지원한 것이다. 그리고 양정신, 김정희 두 사람이 준목고시에 합격하자 당시 장로였던 양정신선생이 1호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아 김정희 목사가 안수를 미루고 양정신목사가 기장 여목사 1호가 되었다. 기장여교역자들의 자매애가 꽃피는 좋은 본보기였다. 기장 여교역자회 창립 1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렇게 기장 여교역자들은 여교역자회 안에서 서로 동지애를 키워가며 격려하고 지지하면서 힘을 키워갔다.
은퇴여교역자를 위한 베다니집과 초대관장 이야기
1956년 여전도회 총회에서 당시 총무였던 이주선 총무의 간곡한 호소로 여교역자 노후를 위한 사업추진위원회 구성되었다. 1958년 2월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길리에 임야 13,830평을 639,359환에 매입해서 이 집 이름을 베다니집으로 명명하고 1958. 11. 24 . 베다니집 건축 설계도를 작성하고 제1차 건축비로 800만환 예산을 세우고 건축 기금으로 캐나다연합교회에서 500만환, 여신도 모금 1,362,550환, 찬조금 1,563,900환 해서 모두 ,931,384환을 조성하였다. 1961년 7월 11일 베다니집 낙성예배를 드렸다. 건물은 반부양관과 정양관으로 지어졌다. 1962년 3월부터 현직 여교역자들이 베다니집에서 모임을 가지기 시작해 해마다 총회를 베다니집에서 실시했다. 이때까지는 관장이 없이 여전도회가 사찰집사를 두고 베다니집을 관리했다. 한편 1963년 여전도사회에서 은퇴여교역자를 위한 기금 모금을 결의해서 은퇴여교역자를 위한 기금 681,245원 모금 중 서울시내 여교역자들이 196,995원을 헌금했다. 1972. 5. 초대관장으로 안계희 전도사 취임했다. 안계희 관장이 베다니집관장으로 취임하게 된 데는 여교역자들의 정의를 위한 분노와 연대정신이 빛을 발휘한 때문이다. 당시 안 관장은 모 교회 전도사로 있었는데 부당하게 해고가 되었다. 이에 분개한 여교역자협의회 회원들이 모여 안전도사를 베다니집 관장으로 부임시키기로 하고 1년간 인건비를 여교역자들이 부담하였다. 이후는 여신도회가 은퇴여교역자를 위한 10월 헌금으로 베다니집을 운영하고 있다. 베다니집 관장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교역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결국 당사자들로 이루어진 모임을 통해서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지도력개발원 교육 참여자들의 결속과 회의 위기극복을 가능케 한 회원들의 연대
우리 회는 1986년 유급총무제도 도입, 1992년 지도력개발원 설립, 1988년부터 일본과 카나다교회와의 국제교류 시작 등을 통해 여교역자회의 활성화와 역량강화에 나섰다. 상근 총무제도는 여교역자의 자질향상과 여성목회 개발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 대외협력 강화, 회원 연대와 결속에 힘이 되었다. 특히 독일 기독교개발기구(EZE)의 지원을 얻어 설치된 지도력개발원의 프로그램으로 사실상 거의 모든 회원들이 영성개발훈련에 참여해 회원들 간의 일치감과 연대감을 다졌다. 목사, 전도사 호칭이 아니라 서로 언니, 동생으로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이때 형성된 일치감은 후에 여교역자회가 시련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P총무 사건으로 회가 깨질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어떻게 해서라도 여교역자회를 살려야 한다는 회원들의 의지와 영성훈련에서 다져진 회원들의 회에 대한 애정이 위기를 극복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위기를 겪으면서 두 가지 변화가 생겨났다. 하나는 교계전통에 따라 총무 중심이던 여교역자회 체제가 임원중심의 체제로 이동하면서 회원들의 주인의식이 강화된 일면이 보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회원 간의 결속을 다지고 역량강화를 위한 방안으로 2002년 시작된 ‘전회원만남의 날’에 많은 역량을 기울였고, 지역장들의 열정으로 지역모임이 강화되어 여교역자회가 서서히 위기를 극복해갔다. 사회문제에 관심하던 역량을 회원들의 현장에 돌려 서로 정보와 관심을 공유하고 지원체제 마련등을 통해서 회원들의 자매애를 넓혀갔다. 그 결과 위기가 생겼을 때 상처받은 회원들이 회를 떠나기도 했으나 이제는 돌아서 거울 앞에선 회원들이 되었고, 위기가 기회임을 증명한 사례가 되기도 하였다.
창립20주년 기념교회로 갈릴리교회를 세우다.
1987년 여교역자협의회는 창립 20주년을 기념해서 ‘갈릴리’라는 이름의 기념교회를 세운다. 부활의 첫 증언자인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는 예수의 사명을 전한 것처럼, 여교역자들이 그 소명을 감당하겠다는 다부진 꿈을 갖고 의정부에 기념교회를 세웠다. 현말렬목사가 첫 목회자였다. 그러나 이 기념교회는 여교역자들이 지탱하지 못하고 겨우 2대를 넘어 일반교회가 되어버렸다. 20주년 기념교회가 지탱을 하지 못한 것은 여교역자회 역량부족과 무관하지 않다.
여교역자회의 자립을 위한 회원들의 연대
이런 사례 외에도 회원만남의 날을 통한 회원들간의 연대강화, 은퇴여교역자 초청의 날을 통해 은퇴여교역들을 기리는 일과, 해외선교를 하는 동역자들, 단독목회와 미자립교회 여성목회자를 지원하기 위한 옥합기금과 협력기금 운영, 여교역자회 주일을 제정해 예배하고 여교역자들의 공헌을 기리고 여교역자회와의 일치감을 증진하는 등, 회원들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일을 통해서 회원들의 친목과 동지애적 유대강화를 위한 일을 해왔다.
우리가 속한 교단 기장은 주지하다시피 물적 토대가 타교단보다 약하다. 다른 교단 여성모임은 돈 때문에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교단의 취약한 물적 토대는 우리 여교역자회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여교역자회가 자립하기 힘들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도 여교역자들은 여교역자의 자립을 위해 기금을 조성하고, 회 운영비는 물론, 회원들을 지원하고 후배들을 기르기 위한 각종 헌금에 동지애와 자매애를 발휘해서 적극 참여해왔다. 이런 회원들의 열정으로 여교역자회가 50주년을 맞기에 이르렀다. 50주년을 맞아 우리 회원들의 열정과 수고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3) 교회와 사회를 섬기는 일
여교역자회의 목적에서 보듯이 여교역자들은 그 자체가 교회를 위해 존재해왔고, 교회를 섬기는데 열정을 다해왔다. “한국교회의 성공에는 전도부인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라는 브라운 선교사의 말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도 곳곳에서 여교역자들이 교회를 위해 여교역자들이 없었으면 피와 땀을 흘리고 있다.
한편 우리 기장 여교역자들은 눈에 보이는 건물인 교회 안에만 안주하지 않고 사회를 섬기는 일도 계속 해왔다. 이 역시 세계교회협의회의 ‘ 기독여성10년’과 맥이 닿아있다. 기독여성10년에서 여성들의 공헌을 기리는 두 번째 사항은 ‘정의와 평화, 청조의 보전을 위한 여성들의 결단과 헌신’이다. 우리 회 세 번째 과제인 사회를 섬기는 일은 ‘정의와 평화, 창조의 보전’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우리 여교역자들의 사회를 섬기는 일, 정의와 평화, 창조의 보전을 위해 다음과 같이 활동해왔다.
-내란 예비음모협의로 수감 중인 박향규, 권호경목사를 위한 진정서 보내기, 민청학련 사건, 민주 구속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를 위한 기도회와 후원금 보내기, 명동성당삼일민주선언 구속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와 서명운동,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피해자를 지원한 일
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 성고문반대 대책활동, kbs 시청료거부운동, 여대생성추행반대운동 등
- 가족법 개정 여성연합회에 가입해 가족법 개정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한 일
-518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 지원과 진상을 알리는 홍보활동, 기도회등에 참여하고, 전두환 외 50명을 내란목적 살인으로 고소·고발하는 운동에 동참한 일
-1988-1995 ‘95통일희년교회여성협의회 참가단체로 활동(희년대회, 희년음악회, 여남평등공동체, 남북한 해외여성만남의 광장등에 참여한 일, 한국교회의 희년운동인 평화통일운동의 상징물인 색동스톨과 색동강단보를 만들어 보급하고 평화통일의 의지를 높이도록 하였으며, 평화통일기금을 모으고, 평화통일을 위한 금식기도회에 동참한 일, 교회여성 17개단체와 평화기간 기도회와 평화기도운동을 전개한 일
- 문익환목사와 박용길 장로 방북과 구속에 즈음한 우리의 입장 성명서와 석방청원서를 낸 일
-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회원단체로 참여하여 연 2회 수요시위와 서명운동, 캠페인에 동참하고 , 일본교과서 왜곡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한 일
-철도노동자들의 농성시 기도회, 경찰난입사건시 기도회를 연일
-걸프전쟁중지, 이라크 파병반대, 우르과이 라운드 거부운동, 방위비 삭감운동, 고문철폐서명운동, 우리 농수산물 먹기 홍보와 서명운동에 동참한 일, 국가보안법과 노동법 개악 반대에 서명운동을 한일
-성폭력피해자 김부남 사건 후원, 주한미군에 살해당한 기지촌 윤금이 사건 집회와 기도회, 서명운동에 참여한 일
-주한미군 교통사고로 죽임을 당한 효선이 미순이 사건 대책에 참여한 일
-한국여신학자협의회, 기독교교회협의회여성위원회, 교회여성연합회가 결성한 교회내 성폭력추방대책위원회에 참여하여 교회내 성폭력추방운동전개, 기장여성연대 일원으로 기장 목회자 성추행사건 피해자를 지원하고 교단차원 대책을 촉구, 기장여성연대와 함께 ‘교회 내 미투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 세미나 개최한 일
-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를 통하여 동강 살리기 운동, 4대강 살리기운동, 교단 내성천 살리기운동 등 창조보전을 위한 활동을 전개한 일
-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 일원으로 한일여성위원회 교류와 연대 사업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우토루지역 방문, 쓰나미 현장인 후꾸시마를 돌아본 일
-재일동포 1세를 위한 양로원건립지원(색동의 집)과 재일동포 2,4세 초청 모국방문을 지원한 일
-북한 어린이 돕기 교회여성연대 회원단체로 참여하여 북한어린이 지원한 일
-교단 평화통일을 위한 월요기도회를 주관한 일
-세월호 참사 아픔에 함께 하는 기도와 간담회에 참여하고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고, 관련 영화를 서대문 기독연대와 공동으로 상영한 일
위에 열거된 사회활동은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임원과 사무처 차원에서 총무 중심으로, 또는 지역회 중심으로 참여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참여해 활동을 펼쳤다. 여교역자회 전 역사를 통해 본다면 60-80년대 초기 민주화운동 시절에는 기장교단이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피해자 지원을 하는 일을 실시했음으로 여신도회전국연합회와 교회여성연합회와 연결된 회원들이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고, 개별 회원들이 여교역자회에 의제를 갖고 와 회가 참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1988 한국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가 실시한 ‘한반도평화통일을 위한 세계대회’와 90년에 열린 ‘정의와 평화, 창조보전을 위한 세계대회(JPIC)’, 2000년 이후 세계교회협의회의 폭력극복 10년 프로그램으로 평화와 통일문제, 성폭력추방운동, 전쟁반대 등으로 이어져왔다. 이 운동에는 이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 한 단체(전문위원)으로 당연하게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런 흐름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왜 여교역자들이 사회변혁을 위해 일하는가? 물론 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기독교인의 사명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성안수문제에서 보듯이 기장에서 여성목사안수제가 통과된 것은 세계여성의 해 흐름을 탄 덕을 본 것이다. 사회의 소리가 그만큼 교회에도 영향을 미친다. 정치계가 여성할당제를 실시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여성할당제를 요구하기 쉬워졌다. 세상이 평등해지면 그만큼 교회에서도 평등한 소리를 낼 수 있다. 교회 일이 아니라고 사회문제에 외면하거나 침묵하면 교회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여교역자회의 역사와 활동을 간략하게 돌아보았다. 우리는 왜 여교역자회를 기억해야 하는가? 여교역자회는 누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니고 여교역자 스스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친교로 시작했지만 바로 여교역자의 지위향상을 위해 활동하였다. 이 여교역자회의 활동과 노력을 통하여 이마마 여교역자의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여교역자회에 속한 선배 여교역자들의 희생과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없다. 여전히 가부장교회전통 속에서 종처럼 지내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신학교 졸업할 때 파송찬송으로 부를 찬송이 부름받아 나선 이몸이다.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이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하는 찬송을 부를 때마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는 남성목사와 장로가 지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여교역자와 여신도들이 지는 현장 때문에 분노가 치밀 때가 있다. 이런 분노를 여성신학자들은 ”거룩한 분노“라고 하는데, 아무튼 여교역자회가 없었다면 여교역자들의 미래는 바로 이 노래처럼 되어 있을 것이다.
회원들 개개인의 힘으로는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고 여교역자의 지위향상을 꾀할 수 없다. 모이면 힘이 모아지고 서로가 힘을 받아 더 큰 힘이 난다. 여교역자회가 강해질수록 여교역자들의 지위가 향상된다. 여교역자들이 소리와 힘을 모아야 여교역자들이 원하는 성평등한 목회자리, 보수의 평등 등이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은 과거 우리 선배들의 땀과 고난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걸 기억하고 계승할 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남을 상기하자.
나가면서: 제2의 희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는 여교역자회가 창립부터 10주년까지를 출애굽을 한 출발여정으로, 이후 희년총회를 맞는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광야 40년 삶으로 본다. 지난 10년이 여성교역자들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위해 가부장적 기장교회에서 여교역자협의회를 만들어 평등과 해방의 가난한 땅을 향한 출애굽을 준비하고 출발한 출애굽의 여정이었다면, 10년 이후는 가나안 땅에 걸맞는 교역자들이 될 수 있도록 훈련받은 기간이라고 본다. 시련도 있었지만 우리 기장 여교역자회는 이 시련을 잘 견디어 내고 이제 ‘평등한 교회’, ‘평등한 제자직’이라는 가나안 땅 앞에 와 있다. 여교역자회가 맞는 50주년, 희년은 숫자상의 희년이 아니다. 희년은 세월의 의미가 아니라 ‘기쁨의 해’라는 이정표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에게 50주년은 지나간 시간을 그냥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과거를 기억하고 전승하며, 앞으로 나아갈 여교역자회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꿈을 꾸는 날이다.
앞으로 우리가 꿈꾸어야 할 가나안 땅은 어떤 곳인가? 그건 가나안 땅을 수식하는 형용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그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다. 성서는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땅을 왜 하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묘사하고 있는가? 물론 풍요의 의미가 있지만, 젖과 꿀의 의미를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전통적으로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을 말하는 것으로 상징되었다. 그런데 엘리지베스 몰트만 벤델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책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여성문화의 가치기준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젖이란 여성성의 표징으로서 모든 생명을 살리는 일과 관계가 있다. 젖은 생명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며 자양분이다. 낳고 기르는 모성성의 상징이다. 꿀은 어떤가? 이 꿀은 여왕벌과 일벌에게서 얻어진다. 벌들의 조직 사회는 여성공동체다. 이 여성조직인 꿀벌 사회에서는 자기 꿀을 훔치러 오는 이들에 대한 방어만 있을 뿐이지 침범하기 위한 선제공격이 없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 공동체에게 필요한 꿀을 채취하는 순간에도 꽃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꽃가루를 옮겨주는 꿀벌처럼 자기 공동체의 이익에만 급급하지 않고 다른 공동체도 생각하는 공생의 관계를 이룬다. 또한 꿀은 힘을 돋게 하고 병을 고치고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의 역할을 한다. 이는 사회의 병폐를 치유하고 감쌈은 물론 썩어져 가는 사회를 썩지 않게 지키는 여성성의 상징이다.
이렇듯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표상은 사회의 병폐를 치유하고 썩어져 가는 사회를 살리는 생명공동체와 여성성의 표상이다. 생명을 먹이고 보호하고 감싸는 모성적인 원리, 작은 생명이라도 보호하고 다른 공동체와 공생관계를 누리며 평화를 위해 애쓰는 여성적인 원리가 흐르는 곳이다. 이런 교회, 이런 사회에 대한 비전을 갖고 제2의 희년을 향해 나가야 한다.
우리 여교역자회는 작년에 종교개혁 500주년과 한국기독교장로회 전국여교역자회 창립 50주년을 맞는 여교역자 선언문을 발표하고, 10대 과제를 명시했다. 제2희년을 향한 우리의 행진은 이 선언을 실현해나가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글은 2018년 6월 18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전국여교역자회 50주년 희년 토크쇼에서 한 발제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