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한국소금 2019. 3. 25. 15:59

네가 낫고자 하느냐

 

헌정사상 초유로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킨 사태를 보면서 저는 이런 경우에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실까 ,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묻게 되었습니다. 이번 사태는 대통령이 크게 나라를 망쳤다든지, 탄핵을 받을만한 잘못을 하여 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국민 모두가 압니다. 대통령이 기자의 질문에 답하면서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열린 우리당을 국민들이 더 많이 지원해 국회의원으로 보내도록 하겠다는 것에 대한 선거법위반여부로 시작되었습니다. 정치인인 대통령이 자신의 당을 위해 선전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은 기자에 대한 답을 갖고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규정한 것도 납득이 되지 않지만, 그것을 가지고 대통령 탄핵사유로 들고 힘으로 밀어붙여 탄핵안을 결의한 것은 더더욱 용인할 수 없는 만행입니다.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되면 엄청나게 국가적으로 위기가 생깁니다.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다고 하지만, 엄연히 대통령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서는 다시 대통령으로 임무를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과연 그것이 제대로 되리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폭설과 조류감기 파동으로 국민들은 힘들게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이런 민생문제에 대처하기는커녕, 이런 문제를 정부가 잘 대처하도록 힘을 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켜 혼란을 야기하였습니다. 이들은 이에 책임의식은 전혀 염두에도 없습니다. 이들은 단지 415일 선거에서 자신들이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되질 못할 것을 염려할 뿐입니다. 이미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듯이 밀리고 있는 선거전에서 그대로 질 수 없다고 최후의 발악을 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인식에 대해 모두가 공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만행에 대해 찬사를 보냅니다. 이제까지 기득권을 누리다가 노무현 정권으로부터 심각하게 위협을 받았던 무리들은 기뻐합니다. 전체 인구의 30% 정도가 잘 했다고 박수를 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차떼기로 도둑질을 하던 무리들은 이런 만행을 사필귀정이라고 합니다. 부정부패로 감옥에 간 국회의원들도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동안 이 사회를 지배해왔던 기득권층에서는 다시 한 번 자신들의 기득권을 회복할 절호의 찬스로 생각하고 벌써 대통령이 스스로 하야하여 새로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는 상식이하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기반에 의해 판단이 이렇게 다르게 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비록 2천년 전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우리의 상황에 던져주는 의미가 큽니다.

38년 동안이나 병을 앓고 있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베데스다 못가에서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의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던지 낫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병자를 보고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참 어처구니없는 질문입니다. 당연히 모든 병자는 병을 낫고 싶어 합니다. 더구나 이 병자는 그 병을 고치고자 베데스다 못가 행각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는 그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을까요?

 

예수의 질문에 병자는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표시로 남을 원망합니다.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으로 들어갑니다.” 이 환자가 진심으로 간절하게 원한다면 그렇게 되도록 남에게 부탁하여 놓으면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부탁하여 장시간 대기하도록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미 38년 동안이나 익어온 습관대로 사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기다리다가 물이 움직일 때에 우연히 제일 먼저 물에 들어갈 것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하면서도,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면서도, 이런 우리의 삶의 목표를 위해서 과연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우연히 남들의 노력으로 되기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들이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에, 수구세력의 반대로 안 된다고 핑계를 대지는 않습니까?

이런 환자에게 예수는 두 말 없이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는 그 날이 안식일이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환자의 핑계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병이 낫기 위해서는 즉시적인 행동만을 요구합니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기를 명령하십니다. 상황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즉각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익숙했던 것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새로운 것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기득권층에서는 이렇게 병자가 낳은 것보다는 자신들의 권위가 도전받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예수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한다고 하여 박해하였습니다. 사람이 죽든 말든, 아프던 말든 그런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걷게 되어 새 삶을 살게 된 것에 대해서는 외면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굽히지 않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이 일하시니 이 사회의 변화를 위해 일합시다.

 

20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