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향유를 부은 마음을 기억하자

한국소금 2019. 3. 25. 18:23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자

 

오늘은 수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특히 오늘은 31절을 기념하면서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그 당시 민족의 독립을 위해 고통을 받았던 선조들도 함께 되돌아보면서 사순절 동안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에 함께 참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주요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고 예수님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될 때에 우리는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고 그 분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에 사순절을 의미 있게 지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행렬에는 몇 사람의 배역이 등장합니다. 예수를 처형할 때 앞장섰던 대제사장과 유법학자, 그에 동조했던 당시 예루살렘 백성들, 그리고 예수의 처형을 실시했던 빌라도와 그의 군사들을 제처 놓고 가장 가까운 예수의 제자들도 각기 다양한 태도를 보입니다. 제일 먼저 가롯 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를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줍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잡혀가 붙들려 있는 곳에서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됩니다. 예수의 죽음을 애타하면서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여인들도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사람 가운데 예수를 가장 잘 이해하고 그의 죽음을 미리 알고 예비한 여인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자입니다. 요한복음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누나 마리아라고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어 있지만, 오늘 본문과 마태복음에서는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죽음과 부활을 세 번씩이나 미리 예언했는데도(마가 1032절 이하), 이 여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아마도 예수님을 정말 사랑했던 분입니다. 이 여인이 무명의 여인인 것으로 보아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죽음과 부활에 대해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말로 듣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죽을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트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왕을 임명할 때에 행하는 것이지만, 기름 바르는 일의 좋은 영향은 매우 일반적으로 서술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같이 식사하던 몇몇 사람이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당연히 여인의 고귀한 행동을 고마워하고 칭찬을 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이들은 이 여인의 행동을 나무랍니다. “어찌하여 귀한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이들은 왜 이 여인이 그 비싼 향유를 깨서 예수께 발라 드렸는지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이 여인의 안타까움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돈만 보이지요.

이들의 비난 이유는 그럴 듯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자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진정 이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요? 물론 물질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요.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돈만으로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지요. 죽음을 앞둔 예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합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오히려 죽음을 앞둔 예수님 ,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닌분이 더 중요하지요.

 

엔소니 드 멜로의 일분지혜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목은 여기에 있기입니다.

제가 어디서 깨달음을 찾아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그게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지.”

그럼 왜 저는 그걸 못 느낍니까?” “자네가 안 보니까 그렇지.”

무엇에 눈길을 주어야 하나요?” “아무 것에도. 그냥 보게.”

무얼 말입니까?”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것을.”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보아야 합니까?” “아니, 보통 방법으로 보면 되네.”

하지만 저는 늘 보통 방법으로 보지 않습니까?" “아니지.”

아니라니요?” “보기 위해서는 여기에 있어야 하지. 자네는 대개 딴 데 있거든.”

 

지금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도 예수와 함께 있지 못합니다. 그러니 죽음을 앞두고 곧 겟세마네 동산에서 괴로워하며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를 해야 되는 예수님의 심정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구해줄 메시야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향유를 바른 여인은 예수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그처럼 비싼 나드 향유도 아까운 마음이 없이 예수께 발라 드립니다. 예수님도 그 여인의 마음을 알고 그 여인과 함께 있습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고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가 한 일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그 여자의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마음을 같이 하고 있는 그 여인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여인이 향유를 바른 행위를 기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순절에 우리도 이 여인처럼 예수님과 함께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때에만 우리도 예수를 진정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0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