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을 두고
그물을 두고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이면서 또한 한 해를 정리하는 12월의 첫 주이다. 이렇게 대림절을 맞으면서 어떤 크리스챤은 주님을 맞기 위해 한 주간 조용한 곳으로 묵상하러 떠나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특별 새벽기도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매일 매일 일상적인 일에 빠져서 말로는 대림절을 지내면서도 전혀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마치 오늘 읽은 구약 이사야서처럼 듣기는 늘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늘 보아도 알지는 못한다. 왜 그럴까?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우둔하게 하고 귀 막고 눈 감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된 것이 오늘의 나의 자화상이 아닌가 되새겨 본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오늘 두 번째 읽은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마음으로 깨닫는다. 그리고 예수의 부름에 응한다. 예수께서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또한 세베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도 예수가 그들을 부르자 아버지 세베다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떻게 이들은 낚던 그물을 버려두고 또한 아버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두고 예수가 말하자마자 곧 예수를 따라 나설 수 있었을까? 이들은 어떻게 해서 예수의 참된 모습을 보고 듣고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을까?
제자들이 이렇게 주저 없이 예수를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현주소를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제자들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나날을 희망 없이 살고 있었다. 당시 어부생활을 사회밑바닥의 사람들이 하는 일로서 이들은 내일이 더 낫다는 희망이 없었다. 더군다나 로마의 압제 하에서 매일의 삶이 고통의 연속이었다. 현재 한국의 농민들이 희망을 갖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국회의사당에서 절망으로 나락을 쌓아놓고 절규하는 모습이 바로 그들의 모습일 것이다. 더 이상 미래에 아무런 소망을 두지 못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현실에서 과격해질 수 있다. 광주민주화 항쟁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항거한 분들은 지식인이 아니라 당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현주소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삶의 변화에 주저하게 된다. 현재 별 것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하고 있다
바로 우리가 후에 읽은 누가복음에 그러한 사실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자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허락하여 주십시오.”하거나 또 다른 사람처럼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인사를 나누게 해주십시오.”하고 지연시키고자 한다. 예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절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것이나 집안 식구들에게 인사하는 것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망설임에 대해서 예수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하라”고 하신다. 도대체 아버지가 죽었는데, 어떻게 장례를 치루지 않고 예수를 따라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내버려 둔다는 말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어머니의 간청으로 비록 내 때가 임하지 않았다고 하시면서도 물을 포도주로 바뀌게 한 분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집안 식구들에게 하는 작별인사가 얼마나 많이 시간 걸린다고 그것도 못하게 하신다는 말인가?
그에 대한 해석은 그 다음에 분명히 나온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거나 인사를 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여러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을 끊으라는 말이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이 당연히 할 일을 쟁기에 온 정신을 집중하여 밭을 잘 가는 것이다. 그런데 쟁기를 잡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 밭은 잘 갈 수 없는 것이다. 예수의 부름을 받았으면서도 부모, 집안 생각을 한다면 어떻게 온전히 예수를 따를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말로는 쉽게 예수를 따른다고 말한다. 또한 본문에서처럼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고 결심한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선생님이 가는 곳이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 곳만 가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 이것저것 다 챙기면서 예수를 따라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굴이나 보금자리는 변화를 두려워하면서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을 뜻한다. 이미 되어진 것에 머물게 되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2005년 대림절, 우리의 마음은 진정 어디에 있는가? 여기저기에 흐트러진 마음을 모아서 오로지 예수가 우리 마음에 오심을 기다리면서 그 분이 우리에게 오실 때 온전히 그 분을 맞이하자.
20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