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같으신 하나님
어머니 같으신 하나님
설 명절을 맞아 대부분 부모나 친척을 만나러 귀향하거나 또는 집안의 큰 집으로 모입니다. 설의 의미는 새 해를 맞아 조상이나 부모에게 차례(제사)를 드리면서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주일이라고 하여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도 조상과 부모를 기린다는 면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부모와는 어떻게 관련이 있는가를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된 이야기입니다. 온갖 고통을 다 겪고 이제 숨을 거두기 전에 한 절박한 상황의 이야기입니다. 이 때 예수는 자기의 어머니를 보게 됩니다. 자신이 죽은 후 어머니의 노후가 걱정이 된 예수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자기 대신 아들의 역할을 하라고 합니다. 어머니에게도 그 제자를 아들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 때부터 이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는 기록입니다.
실상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잘 이해되지 않는 부문도 있습니다. 예수는 외아들이 아니라 형제자매가 있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예수가 자기의 제자에게 노후를 부탁해야 하는지, 그리고 평상시 예수가 어머니에 대한 태도와 전혀 다른 이러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등입니다. 예수의 부모에 대한 태도는 양면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 1절 이하에서 예수는 아직 자신의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이 때 예수는 갈릴리 가나에서 혼인잔치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자 “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고 하면서도 물을 포두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해 잔칫집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3장 31절 이하에 보면 예수는 부모에게 참 냉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가 악한 귀신이 들렸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이 되어 예수를 만나러 왔지만, 예수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형제이냐”고 하면서“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내 자매요 어머니다”고 합니다. 전후 사정을 보면 이 때 예수는 그의 형제자매나 부모를 만나는 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이런 상반된 이야기는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를 기른 상황을 보면 얼핏 이해도 됩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버지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예수를 혼자 길렀습니다. 당시에 여자가 혼자 자식을 기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곳곳에서 과부를 돌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열악한 환경에 대해서 절망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크신 사랑에 대해서도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의 양면성이 나타났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최근 저는 이도환의 어머니라는 작품을 보면서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이도환의 어머니라는 작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 어머니는 시장 한 귀퉁이에서 나물을 파셨습니다. 다리도 불편하신 몸으로 매일 시장 귀퉁이로 나가 나물을 팔던 어머니, 그러나 그런 어머니가 싫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에게 시장 근처를 지나는 일은 고통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지나고 있을 때 다리까지 불편한 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부르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초라한 어머니가 싫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도 없이 자라면서, 궁색한 살림과 가난 그리고 초라한 어머니가 너무도 싫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원래 공사장에서 노동을 하던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해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다리를 다쳤던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어머니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물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제가 이토록 초라하고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 길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끔 어머니가 절룩거리는 몸으로 학교를 찾아올 때면 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외면했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반드시 성공하겠다. 아버지, 어머니처럼 초라한 삶은 살지 않겠다.” 결국 저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의 소원처럼, 어머니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부자인 아내를 얻어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병원도 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헤어진 저는 매달 넉넉한 생활비를 어머니에게 보내는 것으로 아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구질구질한 지난날이 떠오를까봐 어머니를 직접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고향에 있는 모교의 선생님으로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고 알게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집으로 찾아간 저를 맞아주시는 것도 선생님이셨습니다. 제가 고향을 떠난 뒤에도 선생님은 가끔씩 어머니를 찾아가 안부를 물으셨다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눈을 감고 조용히 계시던 선생님께서 입을 열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하지만 정이 넘치는 부부가 있었지. 어느 날 그 부부는 포대기에 쌓여 버려진 갓난아이를 발견했어. 가난한 부부였지만 아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아이를 안고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키웠지. 늘 공사장에 나가야 하는 부부는 할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곤 했단다. 그러다가 일이 터진 거야. 포대기에 쌓여 쌔근쌔근 자고 있는 아기 위로 철근더미가 떨어지는 일이 벌어졌지. 부부는 급한 마음에 아기를 구하겠다고 달려들었어. 결국 남편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아내는 다리를 다쳤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기는 전혀 다치지 않았단다."
이젠 아무리 울어도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십니다. 그걸 알면서도 저는 눈물을 멈출 수 없습니다.
이도환이 어떤 의미에서 이런 어머니를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저는 이 어머니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가난해도 포대기에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가 기르는 어머니, 아기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자신의 몸마저도 불구가 되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기르는 어머니, 이렇게 기른 아들이 출세해서 자신을 외면하지만 그래도 받아들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어머니, 그리고 끝내 그 사실도 아들에게 알리지 않고 죽는 어머니, 바로 그런 어머니가 하나님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실상 마리아의 희생과 고통은 그녀가 예수를 임신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처녀 몸으로 예수를 잉태한 것은 그 당시 돌로 맞여 죽을 지도 모른 두려운 사건입니다. 이 때 마리아는 죽음을 각오하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어머니 마리아의 희생이 없었다면 예수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희생을 보면서 예수는 희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을 것이고, 민중을 위한 희생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분입니다. 윤도환의 어머니처럼, 아들을 위해, 인간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사랑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분입니다. 마리아처럼 온갖 어려움을 예상하면서도 예수의 잉태를 받아들이고 그 후에도 과부로서 아들을 사랑하고 키워주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미쳤다는 아들이 염려되어 만나러 갔을 때 문전박대를 받아도 섭섭한 마음을 가지 않는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문밖에서 인내하며 우리를 기다리는, 그런 어머니 같으신 분입니다.
20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