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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길

한국소금 2019. 3. 25. 21:45

하나님의 길

 

우리는 또다시 수난절을 맞고 있다. 수난절의 의미는 무엇인가? 수난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가 어떤 분이며. 예수가 걸어 온 길을 알 아야 한다.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기록한 복음서와 바울서신의 핵심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성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이분이 제자들의 하나님이었고, 사도 바울의 하나님이었다.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 이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비단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 기독교의 중심메시지이고 우리의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본질이며 핵심이다. 따라서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할 때 기독교의 본질을 제대로 알게 된다.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수난 사건을 수난절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실상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수난주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선교 활동 초기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분의 맨 처음 활동부터 이미 예수의 십자가와 수난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적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 예수가 어떤 분인가를, 그분의 십자가가 무엇인자를 잘 드러내 주는 중요한 한 상징적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는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서 시험을 받으신다. 첫째 시험은 배고플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징표로서 돌로 빵을 만들어 먹는 것이다. 지금 사십일을 굶주린 예수에게, 눈 앞의 허기를 면해주는 빵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아니, 예수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의 압제와 헤롯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탐욕과 착취로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주려 있는 이스라엘 민중들에게 빵이란 얼마나 유혹적인가? 돌로 빵을 만들 수 있다면 백성들은 당연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엄청난 유혹을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한마다 말로 거절하셨다. 빵으로 대변되는 물질의 풍요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는 길을 거부했다.

 

두 번째 유혹은 모든 나라의 권세를 넘겨받는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악마는 예수를 높은 곳으로 데려가 세계 모든 나라를 보여주면서 자기 앞에 절을 하면 세계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사실상 예수가 원하기만 하면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는 능력을 가진 예수를 보면서, 또 병을 고치는 예수의 능력을 보면서 자기들의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기도 하였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모습은 예수에 대한 백성들의 열망이 잘 표출된 상징적인 사건이다. 유대인이 꿈꾸어 온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키고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그런 통치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악마의 유혹에 대해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는 시편 91편의 말씀을 들어 역시 단호하게 거부한다. 악마 앞에 한번만 절하면 모든 세상 권력을 갖게 된다는 것도 이 유혹은 괴테의 파우스트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께서 이 엄청난 제안을 거절하셨다는 것이다. 엄청난 권력을 갖게 되는 위대한 통치가가 된다는 것은 분명 엄청난 매혹이다. 그러나 그러한 통치자가 되는 것에는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나님 대신에 악마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 대신에 악마에게 복종을 해야 세상 권력이 그의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 권력을 얻어 도탄에 빠져있는 백성을 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긴 하지만, 예수는 악마에게 무릎 꿇어 야망의 노예가 되는 것을 거부하셨다. 예수는 자신을 권력의 노예로 만들려는 악마의 실체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자유한 아들로 살 것을 선택하였다. “하나님께 경배하세 번 째 유혹은 하나님의 능력을 빙자해서 자신의 권위와 능력을 과시하도록 유혹한다.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예수를 이끌고 가서 뛰어 내리라고 유혹한다. 예루살렘 성전은 모든 유대인들의 구심점이며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지엄한 곳이고 명예와 종교적 권위의 상징이다. 이런 곳에서 뛰어내려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려도 하나님이 천사들을 시켜 지켜줄 터이니 뛰어내려보라고 유혹한다. 악마는 예수에게 예수의 능력을 과시하도록 유혹한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악마의 유혹을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성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악마의 유혹을 거절한다. 만일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징표로 성정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다치지 않는 모습을 이스라엘 대중에게 보였다면, 사람들은 그분을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 믿었을 것이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란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왕을 태양의 아들로 믿었다. 로마의 황제도 황제의 자리와 권력을 내세워 태양의 아들로 자임했고 백성들은 그렇게 알고 따랐으니 예수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추종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로 인정받는 것을 거부했다. 그 결과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과시하는 능력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오해를 받고 핍박을 받았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는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너라!”하는 빈정거림과 모욕을 당해야 했다.

예수께서는 악마가 시험하는 바의 의미를 안다. 이 세 가지 유혹은 모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임을 내세워 부유한 자리, 힘 있는 자리,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자리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고 악마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따른다. 그 하나님의 길은 배를 채우기 보다는 배고픔의 자리요, 권세나 영광보다는 섬김의 자리요, 존경이 아니라 놀림 받고 오해를 받고 박해를 받는 자리다. 신학자 본회퍼에 의하면 이것이 곧 증오와 죽음과 십자가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맨 처음부터 이런 길을 택하셨는데, 이 길이 바로 복종의 길이요, 자유의 길인 바, 이 길이 곧 하나님의 길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길이 인간에 대한 사랑의 길이다. 제아무리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십자가의 길, 사랑의 길이 아니면 하나님의 길이 아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악마의 제안을 거부하신 것이다. 십자가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길이었기에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다.

우리는 지금 수난절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청암교회로서 혹은 청암교회에 속한 개인으로서 그분의 길을 따르고자 한다. 그분의 길이란 십자가의 길이요, 우리 교회는 십자가 밑에 있는 교회다. 오늘의 본문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이 세상에 속한 길 즉 물질로 배를 채우는 삶, 권세와 영화를 추구하는 삶, 자기 능력을 과시하여 대접받으려는 삶이 아니라 힘든 자리, 낮은 자리, 남을 섬기는 자리에 처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길이요, 하나님의 길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일상에서 예수를 시험했던 악마의 유혹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 보다 빵으로 우리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혹,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려고 하는유혹,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나님을 팔아먹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는데, 이런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에게 무릎 꿇는 것이다. 십자가 보다는 부활의 영광에 열광하기 쉬운데, 이 역시 하나님의 길이 아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바로 이 십자가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랑 안에서 만나게 되는 고난,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있어서 특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예배공동체, 보다 나은 의의 공동체는 이 세상의 질서를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가시적인 공동체다. 사순절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명상하면서 십자가의 길,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자. 


200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