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 4․3항쟁 ․ 평택기지
십자가 ․ 4․3항쟁 ․ 평택기지
1947년 미국은 그들의 지배영역이었던 남한에서 공산주의자 숙청을 시작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5만 여명이 삼일정 집회를 열었다. 거리로 나온 민중들은 “삼일 혁명 정신으로 조선의 통일을, 독립‘을 이룩하자, 미국은 이남에서 물러가라, 퍄쇼세력 타도!”를 외쳤다. 그런데 이날 미군정 경찰의 발포에 의해 7명이 죽었다.
이 삼일 발포사건에 대해 제주도민은 총파업으로 항의를 했다. 이 총파업은 공장은 물론 학교와 관공서까지 참여하는 대중적인 파업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제주도민의 미점령군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유엔 감시하의 남한 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유엔 위원단이 한국에 들어왔다. 제주 도민은 이에 항의해서 일어섰고 이것이 4.3항쟁으로 이어졌다.“여러분은 누구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 있습니까? 매국적 단독 선거를 반대하여, 주국의 통일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어섰습니다!”하는 뜨거운 절규로 4.․3항쟁은 시작되었다. 경찰과 대치상태에 서게 된 해방대는 평화회담을 맺고 평화군이 무장해제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 회담을 파기할 음모를 꾸몄다. 우익 테러단이 제주 오라리에 투입되어 지역 주민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고 도주하였다. 미군정에서는 이것을 무장대가 저지른 것이라 하여 평화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해변에서 8킬로미터 이상을 적성지역으로 선포하고 즉시 토벌에 들어가 제주에 피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주민은 미점령군들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남한만 치루는 단독선거에 항의해 겨우 30%만이 선거에 참여해서 남한에서 유일하게 제주도만 선거가 무효화되었다.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미점령군은 제주에 대한 탄압을 실시하였다. 한 목격자 노인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미군정의 총부리를 피해 살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어. 내가 봤는데 동광리 무밭에서 임산부와 아이 둘을 모퉁이에 세워 놓고 아이 둘은 총으로 쏘아 죽이고 임산부는 죽창으로 배를 갈라서 태아까지 몰살시켰어. 그놈들이 서북청년단인데 그놈들을 제주에 보낸게 이승만이고 조병옥이야. 누굴 위하여 동퐁의 가슴에 총을 쏘고 죽창을 꽂아. 미국놈들을 위한 거지. 일제 때 일본의 하수인 노릇을 한 매국놈들을 미국놈들이 채용하여 쓰기 시작할 때부터 알아봤어!”
제주도는 절해고도의 섬이라 일단 봉쇄하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없는 것을 이용하여 언론을 통제시킨 미점령군은 자기들의 의도대로 제주민을 학살하였다. 1957년 제주의 마지막 민족해방전사로 알려진 오원권 부대가 생포되었다. 미군정은 “이제야 제주에 봄이 왔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제주에 과연 봄이 왔는가? 오늘도 제주에서 4․3항쟁은 계속되고 있다. 제주민은 4․3항쟁의 전통을 이어 받아 1988년 제주 송악산 지대에 대규모의 다목적 핵 군사기지를 설치하려고 한 계획에 반대하여 죽을 각오로 막아서서 백지화시켰다. 이 송악산 일대는 역사적으로 19세기 말 이재수가 서양세력에 항거하여 난을 일으킨 곳이며 4․3의 거두인 김달삼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투쟁의 맥이 이어진 것이다. 오늘날 4․3항쟁의 재평가가 일어나 43이 빨갱이들의 반란이 아니라 미군정과 결탁한 극우세력들이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제주민을 무고하게 학살한, 8만 제주민의 고난의 역사로 재평가 받고 있다. 4․ 3항쟁은 자주와 민주, 통일을 위한 제주민의 항쟁이었다. 그러나 그 제주는 아직도 반목과 질시와 한의 고통으로 잠들지 못하고 있다.
2006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43항쟁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또 그 현장은 어디인가? 아마도 평택 미군기지확장에 저항하는 평화운동일 것이다.
정부가 지난 6일 대추초등학교에 대한 강제 접수를 시도한 데 이어 15일에는 농민들의 농지 접근 차단을 위해 굴삭기를 동원하여 논을 파헤치고 농로를 파괴하는 등 농지 진입로 차단을 강행하였다. 이는 한 해 영농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논갈이를 원천봉쇄하기 위한 계획에 따른 것이다. 그들은 토지의 소유권이 국방부로 이전되었다는 이유로 토지수용에 반대한 농민들의 점유권을 해제하는 최소한의 조치도 하지 않은 채 불법적이고 일방적으로 농지를 파헤쳤다. 정부는 경찰과 용역업체를 동원하여 이에 저항하는 주민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을 격리하고 연행하하였고, 농사투쟁 저지를 위해 논에 물을 대주는 물꼬를 시멘트로 막는 공사를 강행하다가 이에 몸으로 저항하는 농민들과 평화운동가들을 연행하였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미국이 평택미군기지를 확장하려는 이유는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물리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한미양국의 합의에 따라 ‘전략적 유연성’의 근거를 마련했다고 생각할 미국이 평택기지를 거점으로 삼아 대북 공격과 대중국 봉쇄를 핵심 목표로 하는 자신들의 전략을 감행할 경우 한반도 평화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민족이 공멸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국방부는 주민들의 의견수렴 없이 기지확장 사업을 결정하고 나서, 주민들이 반대하자 이미 결정된 사안이니 집행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경찰과 용역을 앞세워 이를 강행하고 있다. 평택미군기지확장과 이를 위한 강제토지수용은 이처럼 폭력적이고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이 실행될 경우 주민 생존권 파괴는 물론 한반도 평화를 심각하게 위협하게 된다.
최근 윌리엄 팰런 미태평양사령관이 주한미군 추가감축을 사실상 기정사실화함으로써 주한미군 재배치에 중대한 상황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또 정부의 당초 공언과는 달리 미군기지 이전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최종금액이 얼마가 될 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기지확장이 강행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문제는 오늘날 제주 43항쟁의 연속선상에 서 있다. 미군기지 확장 반대는 이 땅의 자주와 평화, 생명과 통일을 위한 운동이다. 교회는 당연히 평화와 생명을 지키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대추리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교회가 제일 먼저 보상을 받고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대추리 현장을 찾았을 때 맨 처음의 반응은 “왜 우리한테 설교하고 기도하려고?” 하고 비아냥 대고 냉소적이었다고 한다. 주님들을 버리고 간 교회 때문에 교회의 권위가 당에 떨어진 것이다. 이에 참회하는 마음으로 지난 3월 18일 폐교된 대추리 초등학교 마당 한 모퉁이에 천막교회를 세웠다. 이 천막교회는 비록 작고 볼품없지만, 대추리 주민들과 민중의 삶에 교회가 함께 하겠다는 결단이요, 상징이다. 지금 우리 교단에서는 평택미군가지확장 저지를 위한 순례기도를 대추리에서 행하고 있다. 뜻있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대추리에 행해지고 있는 촛불 기도회에 참석하고 밤새워 기도하는 기도의 행진을 하고 있다. 다음 부활주일에는 기독인들이 모여 부활절 연합연배를 함께 드릴 것이다. 우리 교회도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한다. 또 참여해야 한다. 그것이 2006년에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를 함께 지는 행진이다.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는다. 종려주일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입성하면서 사람들이 종려나무 잎을 흔들며 호산나 하고 왕처럼 칭송을 받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백성들의 환호소리에 묻힌 예수의 입장은 ‘어린 나귀“라는 모습이 보여주듯이 겸손하고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은 영광이 목적이 아니라 고난을 당하기 위해 들어서는 입성인 것이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를 모르고 자기들의 기대대로 예수를 생각하고 환호를 한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십자가의 길은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현상과 자기 기대를 따라 예수를 믿는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지셨다고 고백한다. 그 예수님처럼 우리도 자기 앞에 놓인 십자가를 져야 한다. 오늘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59년전 제주 주민들이 미군정하의 지배를 거부하고 자주와 민주적인 나라를 위해 항쟁했던 것처럼, 오늘날 평택에서 미군기지를 확장을 통하여 한반도를 아시아 군사 교두보로 삼으려는 미국과 군사주의 문화에 대하여 아니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져야 하는 것이다. 동북아의 화약고, 전쟁의 전초기지를 만드는 일에 나서는 것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기독인들이 나서야 할 것이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처럼, 평화를 위한 길에 오르자.
20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