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에서 살림에로
죽임에서 살림에로
우리가 읽은 이 이야기는 흔히들 ‘솔로몬의 재판’이라는 제목 하에 솔로몬의 지혜를 증명하는 이야기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본문을 솔로몬을 중심에 놓을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아이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 어떤 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냐로 읽어야 한다. 재판관인 솔로몬은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여인들에 대하여 칼로 자르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친어머니는 아이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아이이기를 포기한다. ‘아이에 대한 ‘모성애가 불타올라(표준새번역본)’, ‘아들을 위한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개역)’, ‘제 자식을 생각하여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아서(공동번역)’라고 소개된 이 말의 히브리 원문은 ‘아들에 대한 그의 rahamin(자비)이 뜨거워지고, 간절해졌기(kmr)때문이다.’ 로 표현되고 있다. 구약신학자 필리스 트리블에 의하면 여기서 자비로 번역되는 rahamin은 모태 혹은 자궁이라는 뜻을 가진 rehem의 복수형태다. 즉 자궁이라는 명사가 복수형 rahamin으로 쓰이면 동정, 자비, 사랑이라는 추상개념으로 확대된다고 한다. 필리스 트리블에 의하면 모태 혹은 자궁은 그릇이요, 동정, 연민, 사랑 등의 내용이다. 여성의 자궁은 자비를 담는 그릇이다. 신체학적으로 본다면 자궁은 가장 감각이 둔한 곳이라고 한다. 그 자궁이 불타오름을 느낄 정도라면, 아이의 생명을 살리려는 여성의 사랑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잡혀간 새끼에 대한 근심 때문에 애간장이 녹아서 죽었다”는 중국 고사에서 나온 어미 사슴 이야기의 ‘애가 탄다’ 라는 표현과 같은 맥락이다. 아이를 살린 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아니라, ‘자궁이 떨릴 정도로 아이에 대한 연민’을 가진 어머니의 사랑이다.
이 솔로몬의 재판이야기를 생명과 평화, 통일 문제와 관련지어 생각해보자. 한반도 평화와 통일문제를 보는 세 가지 시각이 있다. 첫째 부류는 가짜 엄마 같은 부류이다. 이 여자는 아이를 깔아 죽였다. 그런데 그는 자기 죽은 아이에 대한 아픔이나 자기의 잘못을 자책할 겨를도 없이 그 아이를 다른 아이와 바꿔치기 한다. 자기 노후를 의지할 아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여성처럼 자기의 이권과 관심에 따라서 평화문제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세계의 평화문제를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만 결부시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의 잘못으로 죽은 아이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 없이 아이를 바꿔치기 한 가짜 엄마처럼, 한반도의 평화를 가로막는 분단에 자기 책임은 없는지, 평화가 깨어진 것이나 분단된 사실에 가슴 아파 하기보다는 무엇이 자기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또 자기 것이 못될 바에는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났다고 생각하고 솔로몬의 재판에 따라 가르라고 한 가짜 엄마처럼. 이들은 민족 생존의 시각에서 한반도의 문제를 보지 않고, 자기의 이익에만 관심하기 때문에, 자기가 가진 이데올로기에 의해, 외세에 의해 한반도가 나뉘어지더라도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자기에게 이익이 직접 안 돌아오고, 자기 식으로 통일이 안될 바에는 차라리 분단이 계속되는 게 났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분단이 고착된다.
둘째 부류는 솔로몬 같은 부류이다. 솔로몬은 두 여인이 서로 자기가 아이의 어머니라고 주장하자, 안일하게 칼로 잘라서 나누어주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그게 공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생명을 칼로 나누면 그 생명은 죽고 만다. 솔로몬으로 대변되는 사람들은 생명을 소유의 점에서 보고, 힘의 논리로, 무력에 의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가 분단된 것도 바로 솔로몬으로 자처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일제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한반도 민족이라는 아이를 맡겼더니 미국과 소련은 이 땅에 들어와 자기들 임의대로 38분계선을 그어 남북을 갈라 군정통치를 하면서 남과 북에 군사분계선을 그어놓았고, 그 분단 때문에 6.25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6.25전쟁 이후 휴전선으로 남과 북이 갈라지게 되었다. 한반도의 분단은 이렇게 한반도 문제를 한민족의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고 무력에 의한 통치적 관점에서 본 강대국들의 시각과, 이 강대국들의 편에서 어차피 통으로 내 것이 안될 바에는 갈라서라도 갖겠다는 분단주의자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져 일어난 것이다. 솔로몬 같은 부류는 모든 문제를 칼 즉 무력에 의해 해결하려든다. 9.11 테러리즘이나 보복전쟁 등,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과 갈등을 보면 다 무력에 의지해서 문제를 풀려고 한다. 그러나 분쟁이나 갈등은 무력에 의해서 해소되지 않는다. ‘정의’를 명분으로 깔고 있을지라도,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경우 그곳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세 번째 부류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 기득권을 포기한 친 엄마의 입장이다. 이 친 엄마는 공평하게 칼로 아이를 나누어주겠다는 솔로몬의 이상을 거부하고, 아이의 생명 쪽을 택한다. 누가 갖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아이를 살리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친 엄마는 솔로몬처럼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의 ‘자르라’는 명령에 대항해서 자기 기득권을 포기함으로 아이를 살려낸다. 생명을 사랑하는 엄마의 열정은 솔로몬 왕이 지혜로운 재판을 하도록 이끌어내고, 결국 아이를 살려내었다.
통일과 평화문제와 관련시켜 본다면, 누구의 아이냐가 중심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게 친 엄마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이데올로기, 체제, 제도 이전에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통일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솔로몬의 ‘칼로 자르라’는 재판 선고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지 강대국의 힘에 맡길 것이 아니라는 지혜를 배우게 된다. 우리 문제는 일차적으로 우리 힘으로 해결하도록 노력하는데, 그 중심에는 친 엄마의 입장처럼 아이의 생명 즉 민족의 생존을 제일 우선으로 하는 입장이 있어야 한다. 설령, 우리 힘만으로 안될 경우, 솔로몬 왕에게 나아간 두 엄마의 경우처럼 외세의 힘을 의지하게 될 경우에도, 그 외세가 지혜롭게 처신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기의 생명을 사랑한 엄마의 열정이었음을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 민족이 모두 한 마음으로 민족의 생명에만 관심하면서 분단극복에 나선다면, 외세도 지혜로운 해결책을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 두 여자는 한 아이를 놓고 서로 갈등과 분열을 일으켰다. 이 이야기의 후기를 이렇게 끝맺는 게 어떨까? 재판이 끝난 후. 아기의 생명을 사랑해서 자기의 소유권을 포기한 친 엄마의 열정에 감동한 가짜 엄마가 회심을 하고, 친 엄마와 가짜 엄마가 한 엄마가 되어 그 아기를 잘 길러내었고, 그 아이는 그 둘을 다 한 엄마처럼 잘 모셨다는 것으로. 우리 기독인들이 생명 사랑을 통해 그 마음이 전해져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분단극복과 평화를 위해 나서고, 그 마음이 통치자들을, 외세를 움직여서 한반도 통일과 평화에 관한 좋은 지혜를 내어 한반도가 생명력이 넘치는 나라가 되었다고.
200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