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기도
단순한 기도
우리는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기도를 회피한다. 기도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기도를 싫어한다. 기도는 해야만 하는 것이고 또 하고 싶기도 하지만, 뭔지 모르게 우리와 실제로 기도하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이 우리를 기도하지 못하도록 하는가? 물론 우리는 해야 할 일들과 가정에서나 직장에서의 본분 때문에 분주하게 생활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쁘다고 해서 먹지 않거나 잠자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데에는 더 깊고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도를 막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다. 가장 먼저 주목할 한 가지 요인은 현대의 고학력자들에게 거의 보편적인 것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기도에 관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즉 실제로 기도할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의 삶이 멋지게 조율되어야 하고, 기도하는 법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출발점이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마차를 말 앞에 매어놓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우리가 기도를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기꺼이 소박해지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하는 책을 쓴 리챠드 포스터라는 기도하기 전에 먼저 기도의 동기가 바르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곤 했다. 기도를 할 때마다 기도를 되새겨 보았더니 자기 기도가 얼마나 어리석고 자기중심적인지 깨달았고, 더 이상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도의 동기가 순수해 질 때까지 기도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위선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내적인 영혼의 추구가 실제로는 그의 기도의 능력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문제의 진실은, 우리 모두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다양한 동기를 가지고 기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타적이기도 하고 이기적이기도 하며, 긍휼을 베풀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하며, 사랑스럽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한 미묘한 동기로 우리는 기도한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그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이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납하실 만큼 위대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우리가 꼭 현명하거나 순수하거나 믿음이 충만하거나 어떤 것을 갖추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의 개념이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을 분만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며 도한 은혜로 기도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신 것은 기도는 어린아이들이 부모님께 나아오는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때때로 우리의 자녀들은 맹렬한 요구를 갖고 우리에게 나오는 경우가 있다. 종종 우리는 그들의 요구가 이기적이거나 저속하기 때문에 슬퍼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가 어찌되었건 그들이 부모에게 나아온다는 그 자체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기도의 문제도 그렇다. 우리가 올바로 기도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순수한 동기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거나 충분히 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제쳐 두고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실제로 기도하는 바로 그 행위 속에서, 즉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이 문제들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기도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며 또 우리의 기도를 있는 그대로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나쁜 그림을 그릴 수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나쁜 기도를 드릴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초보적인 기도의 형태인 단순한 기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기도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숨김없이 하나님께 내놓는 기도이다. 사랑하는 부모님 앞에 서 있는 아이들처럼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요청하는 것이다. 좋고 나쁜 것을 가려내려 하지 않고 단지 아무런 가식 없이 우리의 관심을 간청할 뿐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직장 동료나 이웃 사람들로 인해서 얼마나 마음이 상했는지 하나님께 이야기 하는 것이다. 또한 좋은 날씨나 먹을 양식과 건강 등을 달라고 비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단순한 기도는 그 초점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의 필요와 욕구와 관심이 우리의 기도를 지배한다. 우리의 기도에는 수많은 교만, 허영, 가식, 거만 그리고 전반적으로 이기주의가 가득 차 있다. 물론 거기에는 아량, 관대함, 이타심 그리고 보편적인 호의도 있다.
우리는 많은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범죄한다. 종종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일어서서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기도한다. 다시 하나님을 따르려고 애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교만함과 방종함에 굴복하고 만다. 하지만 염려하지 말라. 자백하고 다시 시작하라. 단순한 기도는 ‘다시 시작하는 기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단순한 기도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 중에 가장 흔한 기도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 고상하거나 아량이 넓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옛날 목이 곧은 백성들이 대하여 하나님께 불평하던 모세를 생각해보자. “어찌하여 주께서는 주의 종을 이렇게도 괴롭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주님의 눈밖에 벗어나게 하시어, 이 모든 백성을 저에게 짊어지우십니까? 이 모든 백성을 제가 잉태하기라도 했습니까? 어찌하여 저더러 주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마치 유모가 젖먹이를 가라고 하십니까?(민수기 11, 11-12)
또 자기를 대머리라고 놀린 아이들에 대하여 앙갚음을 한 엘리사를 생각해보라. 엘리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그 아이들을 저주하여 아이들을 암곰에게 찢겨죽게 만들었다(왕하 2, 24)
반면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기도의 한 복판에는 그 사람들의 가장 고상하고 숭고한 기도의 내용들도 들어있다. 불순종하고 완고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 그러나 이제 주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출애굽기 32,32)라고 기도했다. 한 자기를 놀리던 아이들을 저주해서 죽게 했던 엘리사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수넴 여인을 만나 그에게 자비를 베풀며 아이를 낳을 것을 예언하였다(왕하 4,16)
단순한 기도에는 좋은 것, 나쁜 것 그리고 흉한 것 모두가 섞여있다. 단순한 기도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일반적인 문제를 가지고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것이다. 그 기도에는 가식이 없다. 실제 우리의 모습보다 더 거룩하고, 더 순결하고, 더 성스러운 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로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는다(요일 3,20).
순한 기도는 초보적인 기도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의 기도지만 계속해서 우리는 그 기도를 드린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단순한 기도이다.
그런데 이런 가장 기본적인 기도를 멸시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보다 성숙한 기도를 드리겠다는 소망으로 단순한 기도를 건너뛰려고 애쓴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이기적인 요구의 기도를 경멸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단순한 기도는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뛰어넘은 길은 그것을 피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통과하는 것뿐이다.
단순한 기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십중팔구 그들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진심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 상태는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역사하시기 시작할 때가 바로 그때이다.
기도는 지금 있는 곳에서 시작하라.
단순한 기도를 실제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바로 우리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면 된다. 가정과 직장에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가볍게 들을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실제로 알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믿는 것이 바로 기도의 재료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소로 들어오신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그런 기도를 멸시하기 쉽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내개 복을 주실 수가 없다”고 우리는 신음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장소는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장소뿐이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불붙는 떨기나무 앞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모세가 자신이 거룩한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현재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곳이 작장이든, 가정이든, 동료, 친구 누구와 함께 있든 그곳이 바로 기도를 배우는 곳이다.
가장 자연스럽게 단순하게 일상의 경험들을 기도하려면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사건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된다. 때로는 밤잠을 못잘 만큼 엄청난 시련을 겪을 수도 있다. 그때마다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우리의 상처와 고통과 실망을 아뢸 수 있다. “왜 접니까? 왜 제가 이 아픔을 당해야 합니까?” 이렇게 좌절과 슬픔과 분노에 대하여 호소하는 것이 단순한 기도의 언어이기도 하다.
길을 잃고 상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동행을 요청할 수 있다. 때로는 이웃사람이 무심코 내뱉는 한마디가 우리 속에 분노, 시기, 두려움을 따위의 감정을 폭팔시키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솔직하게 그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그 감정 뒤에 숨어있는 상처를 치료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일상적인 생활들에 대해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자. 기도의 첫 단계는 올바른 기도를 하려고 애쓰지 말고 단지 하나님께 이야기하라. 자유롭고 숨김없이 상처를 나누고 기쁨을 나누라.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로 우리의 말을 들어주실 것이다. 단지 기도하는 것만으로 기도를 배울 수 있다.
200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