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만남의 사건이 일어나는 곳

한국소금 2019. 3. 26. 15:50

만남의 사건이 일어나는 곳

 

예수께서 이른 아침에 성전에 가셨습니다.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 앞에 몰려들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가서 예수님께 몰려들었을까요? 예수님은 당시 인기스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기스타를 만나고 무엇인가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렇게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인기스타가 출연하면 많은 추종자들이 모여드는 것과 비슷하지요.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는 다양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성전에 간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갑니다. 당시 예수님과 한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현실 삶이 어려우니, 매일 매일 힘들게 살고 고달프니, 무엇인가 삶을 변화시켜 줄 새로운 것을 기대했습니다. 로마의 압제자들에서 벗어나게 해줄 분, 예루살렘의 권세가나 기득권층을 몰아낼 하나님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힘들지 않고 배고프지 않는 새로운 삶을 인도해줄 분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 가는 분들이 모두 그런 이유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이명박 당선자가 다니는 소망교회에 교인들이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출세하려는 욕심, 부자가 되려는 욕심, 그리고 여러 가지 욕심을 충족시키려고 교회를 그 수단으로 다니는 분들입니다. 소망교회 뿐이 아닙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이미 3박자 구원이 정통교리처럼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현재 삶에서 잘 살고 건강하고 죽어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가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교회에 다니니 교회가 세상에서 비난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욕심꾸러기들을 만드는 곳이니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을 만나기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자들이 보입니다. 바로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 때문에 성전에 왔습니다. 6절에 보면 이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원래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율법을 해석하고 그것을 엄격하게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변질되어서 그러한 해석과 실천하는 것을 발판으로 기득권층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자신들이 그러한 율법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러한 율법을 잣대로 남을 심판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앞에 세우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신명기 2222절 이하에 보면 이들의 주장은 사실입니다. 어떤 자가 남의 아내나 약혼한 남자가 있는 처녀와 한 자리에 들었다가 붙잡혔을 경우에는 함께 자리에 든 남자와 여자를 성문 있는 데로 끌어내다가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남자는 없고 힘없는 여자만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박식한 분들인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잣대에 어긋나는 말씀은 외면합니다. 에스겔1823절에 보면, “그가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 그런 사람이라도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 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비록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사람이 죽는 것은 언짢아하시는 분입니다(에스겔 1832).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발길을 돌려 살게 하는 분이 하나님의 기쁨이라면 당연히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여인이 발길을 돌려 살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여인이 왜 그렇게 간음하게 되었는지, 함께 잔 남자는 어디에 갔는지, 그리고 그 여인이 어떻게 하면 발길을 돌릴 수 있을 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비록 본문에는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하고 묻고 있지만, 이미 자신들이 그 답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만약 그 정해진 답에 어긋나게 답하면 그 답을 갖고 고발할 구실을 찾는 것이 질문의 목적입니다. 비록 교회에 왔지만, 이들이 교회에 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고 온 것입니다. 자신들의 기득권, 율법을 해석하고 강요하여 기존 사회를 유지시키고 자신들의 지위를 굳건히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습니다. 힘없어서 다른 남자와 자다가 혼자만 끌려온 여인의 아픔도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일매일 삶에서 율법을 어기며 죄를 지으면서 살 수밖에 없는 수많은 민중들이 자신이 어떻게 답하고 있을까 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쉽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골똘히 생각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분명 예수님은 바리새파와 율법학자, 간음한 여인, 그리고 자신을 보고 있는 힘없는 민중들을 모두 살릴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을죄를 지은 자도 그 발길을 돌려 살게 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자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드디어 말문을 엽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계속해서 조용히 땅바닥에 무엇인지 쓰고 계시자 사람들은 이제 남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려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보자 자신의 죄도 보게 되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 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 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개를 들고 그 여자에게 묻습니다. “그들은 다 어디에 있느냐? 너희 죄를 묻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느냐?” 그 여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여인을 돌려보냅니다. 돌로 맞아 죽을 위기에 놓였던 여자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란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곳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죄 된 상태에서 용서받고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곳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곳이 아닙니다. 남을 비난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사건이 일어나도록 합시다.


20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