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주님 가르치신 기도 4- 거룩하신 그분을 따라

한국소금 2019. 3. 26. 16:49

거룩하신 그 분을 따라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의 원래 말은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이라는 우리말이 원래는 높은 존칭인데 잘못 씌어져 낮춤말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르기가 꺼려져 당신을 빼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냥 하나님 당신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도록 하지 않고 굳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도록 하셨을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는 두가지 중요한 개념이 있다. 하나는 이름에 관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름이란 그 이름을 지니고 있는 자의 전 인격을 대표한다. 이름은 그의 자아와 관계가 있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자의 인격이 집약되어 있다. 성서는 사람의 이름을 예사롭게 취급하지 않는다. 성서에 의하면 이름은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의 인격은 물론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중요한 것이다.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흙에서 나왔다는 뜻에서 아담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하와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어머니라는 뜻과 생명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가하면 사람이 변화될 필요가 있을 때 하나님은 직접 나서서 그 사람의 이름을 바꿔주심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아브람은 모든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주었고 사래는 모든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을 가진 사라라는 이름으로 바꿔주었다. 발뒤꿈치를 잡고나왔다는 뜻을 가진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꿔주셨다. 이처럼 이름은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우리 일상에서도 보면 이름은 곧 그 사람의 됨됨이와 연결지어진다. 어떤 사람이 못된 행동을 할 경우 이름을 더럽힌다고 하거나 이름값도 못한다고 비웃음 당한다. 자식이 패륜행위를 하면 그로 인해 가문 이름에 먹칠했다고 축출당하는 사례도 있었다. 일제 시대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혼과 정신을 빼앗을 목적으로 창씨개명을 하도록 했다. 이런 일들은 이름을 그 사람의 존재자체와 연결지어 생각한 때문이다. 실제로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은 인격을 빼앗긴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름이란 그 존재를 규정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그 이면에는 십계명 중 3계명의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라는 계명과 관련이 있다.

 

너희는 주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20:7).”

 

는 선언과 관계가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유배 이후(BC 538) 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인 여호와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불경죄를 범하는 것으로 여겨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부를 때는 주님이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 아도나이를 대신 사용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성서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고 한 시도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하셨다. 야곱이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도 왜 내 이름을 묻느냐(32:29),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도 왜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다(사사기 13:18) 즉 알려줄 수 없는 신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묻든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자신을 밝혔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존재를 나타내는 말인데 이 야훼, 여호와 라는 칭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와 신앙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내 이름, 내 가족의 이름, 내 자식, 내 교회의 이름이 빛나고 존경받길 원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또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어느 교회에 나이 많은 집사님이 한 분 계신다. 그분은 젊어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젊은 시절 삶이 고달프다 보니 베풀기 보다는 받으려고만 했고, 이웃에 대한 베려가 없이 열등감으로 고집만 세었다. 주변에서 괴팍하기로 소문남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교회를 다니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되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우습게보던 사람이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교회에서나 주변에서 힘든 사람을 만나면 위로하고 자기 경험을 들려주며 격려하고 지지하는 사람이 되었다. 얼굴표정도 처음에 교회 올 때는 굳어서 보는 사람이 피곤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편안한 얼굴로 바뀌면서 주변 사람들이 이 사람을 보면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교회 다니고 나서 사람이 이렇게 바뀌자 그 집사님이 장사하는 시장 통 일대에서 예수가 좋긴 좋은가보다 하고 그 집사님을 칭송하는데서 나아가 예수까지 칭송하게 되었다. 또 인천의 어떤 장로님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자식처럼 잘해주어서 원래 모슬렘이던 노동자가 우리 사장님이 믿는 하나님이 저런 분이라면 나도 믿겠다고 개종을 했다. 이분들은 자기의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빛나게 했고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김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하는 모범을 잘 드러내신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제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요한 13:31).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 일차적이다. ”하나님 믿는 사람은 무언가 다르다!“하는 말을 들을 때 그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된다. 우리의 삶이 올바르고 이웃과 자연과 바른 관계를 맺느냐 여하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할 수도 있고 욕을 먹일 수도 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욕을 하는 무리들이 늘어가고 있다. 기독교인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회복시켜드려야 할 과제가 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 5:16)고 말씀하셨다. 이런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현상을 닮은 우리는 그분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라고 하셨다(마태 5:48).

얼마 전 친구 아들이 천주교에서 종신서원을 하게 되어 참석한 일이 있다. 천주교에서는 영세를 받을 때 성서나 성인들 중에 존경하는 분의 이름을 따서 세례명으로 짓는 전통이 있다. 그 이유는 그분처럼 살아 하나님의 이름을 빛내는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다. 이런 전통은 개신교에도 필요한 것 같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고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의 행동을 들여다보자.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해지는지, 아니면 먹칠하고 있는지...

 

200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