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증인
부활의 증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이 사건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목격하거나 경험한 사람들이 증언을 했기 때문에 알려졌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해도 그 사실을 증언하는 증인들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그냥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한 의인으로서 기억되고 전해졌을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있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라고 불리우는 여인과 다른 여인들이다.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으로 부각되고 있는 바, 그를 통해서 부활의 증인이 되는 자젹과 부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예수님을 만나 병 고침을 받았다. 예수 당시의 사회는 여성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사회였는데 거기다 정신병가지 들려 사람들은 귀신들렸다고 죄인 취급하였다. 귀신 하나도 문제인데 일곱 귀신들렸다고 표현된 것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의 상태가 얼마나 심한 상태였고, 어떤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일곱 귀신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딸로 변화한 마리아, 그 감격으로 마리아는 예수님을 돕고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는 인생의 고통을 경험하고 고통을 아는 사람이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복음서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따르는 다른 여인과 함께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에까지 올라왔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골고다 언덕에까지 따라와서 예수의 수난을 울면서 지켜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범으로 처형당했는데, 당시 정치범을 처형하는 근처에 있는 것만도 정치범에 동조한다고 하여 체포되는 그런 시대였다. 바로 그 자리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처형장면을 지켜본 것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의 고난의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이 바로 부활의 목격자가 될 수 있고 증인이 될 수 있음을 성서는 증언한다.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자격은 무덤을 찾는 일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십자가 주변에 있던 여인들과 더불어 안식일 다음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는다. 제자들은 다 로마병정이 무서워 도망을 가버렸고 오직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만이 예수의 무덤을 찾았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섬기고 따르던 예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예수의 시체가 쉽게 부패하지 않도록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였다. 죽음조차 거부하지 않는 그 사랑은 기적을 낳았고 그 결과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수 있었고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위탁을 받았다. 무덤이 비어있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의 무덤을 찾은 두 제자는 빈 무덤은 보았으나 천사를 보지 못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다. 무슨 차이가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자가 막달라 마리아라고 소개하고 있는 이 기사는 바로 십자가의 고난의 현장에 동참한 사람이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고통당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보일 때, 바로 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되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중인이 되는 은총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 중요성은 나를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돌아서는 바로 그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복음이다. 마리아가 무덤 속을 들여다 보고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 음성에 뒤돌아봄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오늘도 우리의 매 순간의 삶에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신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통해서, 나를 감동케 하는 말이나 사건에 내가 돌아서고 방향전환을 한다면 바로 그때 거기서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거기에 우리 개인의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며,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가? 우리가 세상에서 의를 위한 고난,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이들이 있는 그곳에 함께 하는 것이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고, 정의를 위한 일, 나를 부르시는 음성에 귀 기울이고 돌아서는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활신앙의 증언자로 삼으실 것이다. 그래서 남미의 레오나르드 보프 신부는 부활을 이렇게 노래했다.
죽은 지 사흘 만에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시어
모자람 없는 인간의 신성한 생명을 누리셨다.
이제 모든 것이, 우리들 희망의 의미와
참된 정의의 본질과 하느님이 누구 편이신가가 분명해졌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억압받는 자의 권리와
약한 자의 정의에 승리를 안겨 주셨다.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을 갈망한다면 왜 우리는 죽는가?
정의를 위하여 싸우다가 쓰러지는 자들의 죽음에 무슨 유익이 있는가?
이들 이름 없는 자들이 흘린 피에 누가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이 회피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을 주는 것이 예수의 부활이다.
삶은 죽음을 경험한다. 그러나 죽음에 삼키우지는 않는다.
하느님은 역사의 중추적인 의미가 자기 자신을 세상의 가난한 자들,
불의한 대우를 받는 자들 일치시킴으로써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 의하여 보다 우애 있고
덜 악한 사회를 만들려다가 거절당하여
저주받은 사람에 의하여 실현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같은 목적으로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장래가 약속된다.
그들은 부활한 생명의 충만함을 즐길 것이다.
살인자는 희생자 위에 군림하지 못한다.
죽음아, 너의 이김이 어디 있느냐?/억압아, 너의 권세가 어디 있느냐?
새 생명의 눈부신 빛줄기가 이제 세상의 구석구석을 파헤친다.
우리는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의 동이 트는
첫 징조를 볼 수 있다. 아멘, 할렐루야!
200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