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주 기도문 9-그 날의 양식과 어린이 권리

한국소금 2019. 3. 26. 17:51

그날의 양식과 어린이의 권리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부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고, 후반부는 우리 인간들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문제를 시작하면서 그 첫 간구는 바로 일용할 양식에 관한 것으로 시작한다. 그만큼 양식의 문제, 먹거리의 문제가 인간의 삶에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이를 인식하셔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간구로 기도를 이끄신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사실상 인간에게 양식 즉 밥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몇 가지 용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일용할 양식이라는 용어다. ‘일용할(이피우시온)이라는 말은 그날에 필요한, 그날을 위한이라는 말이다. 양식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아르톤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매일 주식으로 먹는 빵을 뜻한다. 이 빵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빵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먹는 식사로 우리 식으로는 밥으로 표현되는 단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즉 그날에 필요할 끼니를 위해 간구하도록 가르쳐주신 때는 유대민족이 로마의 압제 하에 신음하던 때라 많은 사람들이 굶주렸다. 그래서 그날그날의 끼니 해결은 매우 긴급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그날 의 끼니 해결문제는 예수님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 ‘사흘 굶으면 담 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아무리 높은 가치를 외친다고 하더라도 빵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추구하는 가치를 이룰 수 없다. 민주주의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혁명도 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굶주림에 분개한 민중들이 왕국을 습격하며 외친 구호가 우리에게 빵을 달라!”였고, 빵의 분배요구가 오늘 시민혁명의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빵을 위한 기도를 하도록 가르치신 것은 그만큼 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빵은 인간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양식의 범주에는 빵만이 아니라 의식주를 비롯해서 그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모든 생필품을 망라, 우리의 삶 전반에 필요한 것으로 확장되고 있지만 주님 가르치신 기도의 정신은 그날의 생존을 위한 양식을 위한 간구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오늘이라는 단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을 기록한 누가복음에는 날마다(kath hemera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나날이 필요한 양식을 위해 간구하라고 좀 융통성 있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오늘(semeron)이라는 단어를 씀으로 시간을 한정하고 있다. 철저하게 오늘의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 전통은 누가복음의 전승을 따르지 않고 마태복음의 전승에 따라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것을 선택하였다. 마태는 그날의 양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일의 양식을 위해 쌓아놓는 것은 악한 행동으로 간주했다. 한 부자가 창고를 지어 내일의 양식을 비축하고 자기 배를 두드리며 만족해 하는데 대해 그날 하나님이 목숨을 거두어가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어리석은 부자라고 지탄하신 것은 오늘의 양식이 중요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가 마태복음의 전승에 따라 오늘의 양식을 구하도록 한 것은 출애급 전통과의 맥락과 연결이 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식이 떨어지게 되자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 보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반드시 그날에 먹을 것만 모으도록 허락했다. 욕심으로 더 모은 것은 썩어버렸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을 통해 그날의 양식, 즉 일용할 양식을 생활화 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이 전통을 소중하게 여겨서 교회는 오늘의 양식을 위한 기도를 채택한 것이다. 기독교 전통은 우리에게 오늘, 그날을 위한 삶을 살 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으로 권하고 있다.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라는 간구다. 예수님은 그냥 나에게 오늘 필요한 양식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말고 우리에게 오늘 필요한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탄생한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이다. ‘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인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따라서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굶고 있는데 나 혼자만의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반기독교적인 기도다.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노력한 대로 자기 먹을 것을 거둘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누군가가 남의 오늘 먹을 것을 자기의 내일을 위해 쌓아놓는 바람에 오늘 굶주리는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는 기도를 드릴 때는 내 것을 쌓아놓지 않고 이웃과 나누어먹겠습니다.‘하는 결단의 기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라는 뜻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노래가 있다. 우리가 공동체 식사를 할 때 부르는 밥은 하늘입니다.“ 하는 노래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가지듯이 밥은 서로서로 나누어 먹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이 주일을 맞아 어린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다. 어린이 주일은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다. 소파 방정환선생님이 너무 천시받고 억눌려 지내는 어린이들을 보면서 어린이날 제정운동을 하셨고, 이 정신을 이어받아 교회에서 매해 5월 첫째 주를 어린이주일로 지낸다. 예수님 역시 어린이들을 사랑하시고 사람들이 아기들을 예수께 데려와서 쓰다듬어 주기를 원하자 제자들이 꾸짖으니까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의 것이다. 누구든지 어린이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거기에 들어갈 수 없다(18:15-17)”고 하시며 어린이를 하나님 나라의 주역으로 인정하셨다.

 

우리교회에 나오는 어린이들은 대개 공부방에 다니는 아이들이다. 어린이 헌장에 보면 어린이는 어떤 경우에도 가장 먼저 보호를 받도록 되어 있다. 어린이 보호에서 가장 일차적인 것이 먹는 문제 해결이다. 그런데 우리 청암의 어린이들은 부모님이 생계를 위해 일을 나가시거나 챙기기 어려운 여건으로 끼니를 제때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청암 공부방에서 공부방의 어린이들을 위해 식사를 제공하는 것은 작지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는 기도의 실천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한국사회에 끼니를 거를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늘어가고 전 세계적으로 많은 어린이들이 기아로 굶어 죽어 가고 있다. 어린이주일을 맞아 이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간구의 의미를 함께 헤아려보자.

 

20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