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레자식 노이로제
후레자식 노이로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어언 8년, 요즘따라 나를 등에 업고 임진강 찬 물속을 걸러오시는 어머니의 모습니 환영처럼 눈앞에 다가온다. 생각해보면 고난과 한으로 점철된 일생이었을 텥데 그 한과 고난을 자식 사랑이라는 뜨거운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승화시킨 내 어머니! 불록의아니 40이 되어서야 어머니됨의 실체를 몸으로 일게 된 나에게 어머니의 삶은 아픔으로 와 닿는다.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객사했을 때 어머니는 뱃 속에 동생을 임신하고 있었다. 충청북도 회인이라는 곳 피난민 수용소에서 어머니는 몸을 플었다. 누군가가 동생을 양녀로 달라고 했지만 차마 주지 못했는데 그 딸이 수용소에 돌고 있는 마마에 걸려 죽고 말았다. 어머니는 이따금 “그때 남에게 주었더라면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하며 가슴 아파했다.
임진강에서도 이미 명을 보장받은 바 있는 나는 이 마마 소용돌이 속에서도 얼굴에 흉도 안진 채 살아남았다. 영양실조로 비실거리는 딸을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개구리를 잡으로 안간힘을 쓰며 산후 조리도 못한 채 산과 들을 뒤졌다. 자신은 산나물과 아카시아 꽃으로 배를 채우면서. 여자 혼자 딸을 데리고 고생하는 것을 보고 주위에서 재혼을 권했지만 의붓아버지에게 구박받을 딸 생각에 재혼을 초기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어머니는 남의 밭 김을 매누며 겨울에는 뜨개질 품팔이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 피난처에서 어머니는 어느날 밤 꿈에 예수를 만나게 된다. 한 젊은이가 꿈에 나타나 “내가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죽은 그 예수다.”고 말하는 바람에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 때 교회의 새벽종이 울리더란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남의 밭 김매 준 품삯으로 찬송가와 성경을 샀다. 지금까지 나는 그 찬송가를 어머니의 유품으로 고이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는 일제시댕 이북에서 국민학교 선생을 했었다. 어머니가 유식하다는 걸 알게 된 동네 분이 자기 가게의 일을 맡겼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분이 빌려준 돈으로 옷감가게를 열게 되어 어느 정도 생활기반이 잡혔다. 이곳에서 나는 국민학교 3학년까지 다녔다. 가난하다는 것만 빼놓고는 온 동네가 나를 부러워하였다. 키는 조그만 게 공부를 잘했기 때문이다.
“김 과부집 딸은 참 똑똑해!”
우리보고 동네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다. 여기에서 끝나면 좋은데 꼭 뒷말이 하나 붙었다.
“아이구, 그게 고추 하나 달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꼬!”
이게 내가 점점 자라면서는 “아이구, 느네 엄마는 열 아들 안 부럽겠다. 네가 남자보다 잘 났으니!”로 변했다. 내가 남녀공학 중학교에서 남자를 제치고 일등을 한 것이다. 그러나 어김없이 한마디 더 붙는게 ㅁ‘쯔쯧, 그게 딸이 아니고 아들이면 얼마나 좋을꼬, 그러면 제 어미도 살맛 날텐데...“
남들은 내가 아들이 아니고 딸이라는 것에 대해 늘 안쓰러워했는데 막상 나는 어머니로부터 “네가 아들이었으면!” 하는 소리를 듣지 않고 자랐다. 어머니에게는 내가 딸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홀어머니 자식이라는 게 더 문제였다. 후레자식 노이로제에 걸린 어머니는 내가 조금만 잘못해도 매로 다스렸다.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노라면 제일 먼저 임진강 이야기와 아울러 어머니에게서 매를 맞던 모습이 떠오른다.
피난처에서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하던 때도 거지에게 밥을 주던 인정 많은 어머니였다. 그래서 동네 거지들이 나만 보이면 국염아! 하고 이름을 부를 정도였다. 그 어머니가 유독 나에게만은 엄하였다. 왜 키가 그렇게 작으냐고 물으면 “엄마한테 매맞고 자라서 그렇다.”고 대답할 정도로 매를 억수로 맞았다. 어른이 되어 매 맞은 이야기가 나오면 내가 매를 그토록 맞은 덕에 이나마도 되었을 거리는 게 어머니의 지론이었지만 지금도 용남이 된 된다. 한 번 때렸다 하면 종아리가 부어서 걷지 못할 정도였다. 다음날 학교를 가려면 걸을 수가 없는데도 결석이라는 걸 용납 못하는 어머니가 나를 업고 학교에 간다. 이때 모습이 가관이었다. 등에 업힌 나는 아프고 억울해서 울고, 어머니는 때려놓고는 아파하는 내가 가슴 아차 울고,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혀를 쯔쯧 차고...다른 부모들에게는 공부 잘하는 내가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나는 일등을 하고도 칭찬한 번 들은 적이 없다. 후레자식 소리 안 듣게 키운다고 그리 엄하게 대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후레자식 노이로제에 걸린 어머니나 그 피해자인 나나 다 부계중심 가부장제의 희생자였을 따름이다.
‘편모슬하와 후레자식’이라는 소리로 모성을 힘들에 만들면서 ‘편부슬하의 후레자식’ 소리는 왜 없는가? 후레자식이란 아버지가 있으면 자식이 제대로 된다는 말인데 정말 그런가? 만일 아버지가 나를 길렀다면 내가 제대로 됐을 것인가? 허긴 의례히 남자가 혼자 되면 재론을 해버리니까 편부라는 말이 존재할 필요가 없어져 편모슬하의 후레자식이란 말만 남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후레자식이란 말을 따지고 보면 여자는 홀로 되어도 재혼하지 말고 자식을 길러야 한다는 논리로 지어낸 말이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후레자식 노이로제에 걸린 어머니로 부터 나는 ‘매’에 대한 노이로제에 걸려 자식을 못 때린다. 때리려고 손을 올렸다가도 죄라도 지은 듯이 얼른 내려 뒤에 숨긴다. 매맞을 짓을 해서 맞은 적도 많겠는데 아직도 나는 어머니에게 매 맞은 게 억울하다는 느낌이 삭지 않고 있다. 후레자식 노이로제에 걸려 나한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어머니였지만 내가 딸이라고 한탄하지 않고 오히려 남의 집 아들보다도 잘 키워보겠다는 어머니의 교육열로 인해 우리는 간신히 기반을 잡은 회인 땅을 떠났다. 국민학교 4학년 몸, 전쟁미망인 모자원 광고를 신문에서 읽은 어머니는 자녀를 공부시겨준다는 조건 하나를 보고 서울행 기차를 탄 것이다. 모지원에서의 고생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나는 내가 자라서 무엇이 안 된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하고 지냈다. 남학생들이 선생님으로부터 “불알 떼어 국염이 줘라!” 하고 핀잔 받는 가운데서 살았으니 여자라고 꿀릴 것도 없었다. 형제가 없었기에 차별 대우 받아 본 것도 아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나는 버스 안내양이나 식모 또는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만일 아버지가 살아서 내게 남자동생이 하나 생겼다면 가난하니까 나는 공부 안시키고 아들이랍시고 그 남자 동생만 공부시켰을지 누가 아는가? 나야 장학금으로 공부했지만 남자 동생을 위해 다른 여공들처럼 공장에서 일을 해서 뒷바라지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 그랬다면 내 기질상 집을 뛰쳐나왔을지도 모른다.
가끔 아버지 이야기가 나와 내가 이런 비슷한 이야길 꺼내면 어머니는 남편한테 그렇게 학을 떼고도 “이북 사람은 이남사람들처럼 아들 딸 차별 안 한다. 너의 아버지도 네가 딸이라고 투덜대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누가 알아? 임진강에서 내가 딸이 아니고 아들이라면 아버지가 버리려고 했을까?” 하고 되물을라치면 “그건 네[ 아버지가 대의 때문에 그렇지 네가 딸인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해명하셨다.
고등학교 졸업한 후 생존을 위해 공무원시험을 쳐서 지금의 구급인 5급 공무원이 되었다. 공무원 월급은 박봉이었지만 우리 모녀 두 사람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다. 2년 후 대학교를 가야한다는 일념으로 공무원을 초기하고 신학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기숙사로 들어가고 어머니는 부산에서 전도사 일을 하였다. 내가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야간 신학교를 졸업해 전도사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 두 식구인 모녀가 순전히 내 학업 때문에 이산가족이 되어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결혼하기까지 7년 동안을 떨어져 살았다. 그때 대학원만 졸업해도 대학교 교수도 될 수 있을 때였다. 교육열이 대단한 어머니는 대학원을 졸업한 것도 모자라 내가 박사가 된다면 식모살이라도 해서 뒷바라지할 테니 공부를 계속하라고 했다. 이 주문은 내가 두 아이 엄마가 되어서야 겨우 취소되었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니 내가 여자라고 기죽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어릴 때는 남자들과 어울려 딱지치기, 구슬치기 등을 하며 지냈고 교회 오빠들을 오빠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다 보니 형제 부러운 것도 모르고 지냈다. 형제가 없으면 외롭다고 하는데 난 외로운 시간이 없이 해 떨어져야 집에 돌아왔다. 이렇게 남자들하고 어울리다 보니 나보고 선머슴 같다고들 놀렸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학생하고 잘 돌아다니니까 내가 남학생하고 영화 구경을 하던 등산을 가든 아무도 연애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다른 대학 남자 선배 하나가 “네가 이 다음에 결혼해서 남편에게 애교 떠는 것은 상상만 해도 우습다.”고 타박하기까지 했다. 학교 다니면서 미니스커트, 핫바지에 빵 모자를 비뚜름히 쓰고 다니거나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행각을 벌였다. 이때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국염이 학생시절에는 세련되었었는데 결혼하더니 푹 퍼져버렸다!”고 말하는 바람에 “아니 정말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어? 도저히 상상이 안가!”하는 소리도 가끔 듣는다. 지금은 주로 바지 차림으로 지내니까 옷 좀 여자답게 입고 다니라고 주문을 받기도 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이렇게 자유분방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딸이라고 해서 제쳐놓지 않은 어머니의 교육열과 기독교 덕인 것 같다. 기독교 신자이다 보니 제사를 지내지 ㅇ낳는다. 그 제사가 없기에 어머니가 아들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독교인이 아니면 죽은 아버지 제사 못 지내는 것이 원통할 텐데 제사를 안 지내니 꼭 아들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 제사라는 게 꼭 아들이 드리도록 되어 있으니 유림에서 가족법 개정에 결사반대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딸이나 아들이나 구별 없이 모두 제사를 받들게 한다면 우리 조선 역사에서 여성억압도 훨씬 줄어들었을 텐데. 여자들은 음식 장만하느라 죽도록 일하고 절은 남자만 하고...그 점에서 조상을 기리는 정신이야 자손들이 가져야 할 미덕이지만 여성의 억압을 가중시킨 점에서 나는 제사라는 것에 대해 한 치도 미련이 없다. 죽은 사람을 볼모로 살아있는 여자를 비인간화하기 때문이다.
* 1993년. 이 글은 아시아여성신학교육원의 52주 여성학 과정에서 논문대신 발표한 ‘나의 이야기’ 시리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