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행진곡
결혼행진곡
“ 나 한국염은 하나님이 짝지어 준 그대 최의팔을 나의 남편으로 맞아 언제 어디서나 믿고 사랑하며 마음과 듯과 힘을 다해 그대와 함께 삶을 같이 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 말은 지금부터 18년 전 성경책 위에 남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고 한 결혼 서약문이다. 물론 남편도 나와 똑같은 서약을 하였다. 결혼할 당시 우리 가정은 민주가정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다분히 남녀평등을 의미했다. 나는 남녀평등의 의미를 결혼식에서부터 찾으려 했다.
평소부터 나는 결혼식에서 두 가지 불만을 갖고 있었는데 하나는 남자는 혼자 입장하는데 여자는 아버지나 오빠, 그도 없으면 친척 남자의 손이라도 잡고 입장을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기독교의 결혼식에서 하나같이 주례 목사님이 에베소서 5장 23절의 “아내는 납ㅁ편 섬기기를 교회가 그리스도 섬기듯이 하나라.”는 성구를 읽고 주례사를 하는 것이다. 남편보고 아내 섬기라는 말은 없으면서 꼭 여자보고만 섬기란다. 남자는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건 함정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통례적인 결혼식 입장 장면을 깨버렸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온다는 것은 아버지의 보호 밑에서 남편의 보호 밑으로 인계되는 뜻으로 해석되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결혼하던 해는 마침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의 해’였다. 남자를 옆에 세우지 ㅇ낳고 들러리를 앞세워 보무도 당당히, 남편의 보호 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으로서 생의 동반자로서 서는 상징으로 혼자 입장을 하였다. 우리의 뜻을 잘 알고 계시는 문동환박사님은 마태복음 19장 4절과 유한복음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 기사를 읽어주시면서 결혼의 신성함과 축하할 당위성을 주례사로 해주시면서 실제로 가정에서 남녀평등적인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해주셨다.
우리의 결혼은 누군가의 말대로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그건 결혼이었다. 결혼예물도 18금 반지 한 돈씩과 싸고 잘 맞는 시례 하나씩이 전부였다. 예단은 시부모님 한복 한 벌씩에 친척들은 버선 한 켤레가 다였다. 그나마 부모는 다 똑같은데 여자만 시부모 쪽에 예단을 해야 하느냐 주장하여 남편이 우리 어머니에게 예단을 하도록 하였다. 돈이 없는 나는 교수님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마련해 준 부조금을 미리 받아 신혼살림을 마련했다. 가구라고는 캐비넷과 책상 하나, 찬장 하나가 다였다. 결혼드레스는 흰 원피스 아래 프릴을 달아서 마련했고 결혼식이 끝난 후 프릴을 떼어 원피스도 입도록 하였다.
신혼살림은 문박사님이 살고계시는 새벽의 집이 있는 방학동의 30만 원 짜리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결혼하자 큰 댁에서 쌀을 한 가마 주셨는데 이 쌀 한 가마니가 결혼 한 달 만에 손님 치레로 다 떨어졌다. 그릇이라고는 대학원 친구들이 마련해 준 세트 한 벌과 자취할 때 쓰던 그릇이 다였다. 손님이 많이 와 그릇이 부족하면 옆에 있는 시장에 가서 사다 쓰곤 하였다.
이렇게 결혼해 사는 우릴 보고 내 친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질에 대한 관념은 상대적인 것이 아닌가? 당사자인 우리는 부족하다는 느낌 없이 잘 지냈다. 쉬는 날이면 빨래 감을 싸들고 걸어서 30분 쯤되는 계속에 가서 남편을 빨래를 하고 나는 밥을 지어 먹으며 한나절을 지내곤 하였다. 사람들이 오면 시치미 떼고, 지나가고 나면 빨래를 계속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빨래하기란 그 시절의 남편에게는 아직 무리였나 보다.
어느 날 문동환박사님이 기장 여신도회 젊은 여신도 세미나에서 ‘젊은 여성의 역할과 과제’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느닷없이 “저기 국염이가 앉아 있지만 남녀평등이 가정에서 이룽어지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국염이의 남편이 실토하기를 ”안 사람의 이론은 놇은데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니 괴롭다“ 하더라고 말씀하셨다. 기실인즉 내가 결혼과 동시에 가사노동의 분담을 요구했던 것이다. 나의 합리적인 요구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남편은 연탄을 갈랴, 청소를 하랴, 이제까지 하지 않던 것을 하려니 괴로울 수밖에. 그 후론 내가 ”남편 연탄 갈게 하기 운동“의 기수처럼 되어버렸다. 연탄을 안 가는 지금 청소는 여전히 남편 몫이고 아들과 번갈아 설저기를 해야 한다. 나는 식사를 책임 맡았는데 남편 말이 반찬을 만들 줄 몰라 식사준비 분담은 어렵단다. 나는 가끔 남편에게 말한다. ”음식 만들 줄 모르는 것도 일종의 무능력이다.“라고. 소위 남자들이 하는 일을 여자가 못하면 무능력하다면서 남자는 이른 바 여성의 일이라고 치부되는 것은 왜 못하는지, 그것도 목하는 것이면 역시 무능력한 게 아닌가? 마누라 한테 매이지 않기 위해서도 음식 만드는 것을 배워야 하겠다고 투덜댄 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여전히 반찬 만들 엄두는 못 내고 있다.
우리 집은 80 퍼센트는 민주적인 가정이다. 남편 말로는 경처가 집안이요, 때로는 부인을 착취하는 남자라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신이 가난한 민중교회 목사이다 보니 생계를 내가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한솜이라는 아들과 꽃솜이라는 딸이 있다. 한솜이 말에 의하면 우리 집은 여성해방 때문에 남자가 눌려 지내는 집이란다. 설겆이나 중요한 심부름을 한솜이가 도맡아 하는데 한솜이 생각에는 엄마가 여권운동가라서 아들인 저만 시키고 딸인 꽃솜이는 안 시킨다는 것이다. 나는 한솜이가 나이가 많아서 시켰을 뿐인데 이렇게 불만을 털어놓는다. 한솜이와 꽃솜이는 5살 차이가 난다.
물론 나는 남녀가 평등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자녀 교육부터 철저히 평등하게 시켜야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남자가’, ‘여자가’ 라는 말을 안 쓴다. “남자가 울면 못 써” 라는 식의 말을 쓰지 않는다. 남자라도 울고 싶으면 우는거지, 남자라는 이유로 울음을 참아야 한다는 것 역시 비인간적이다.
한솜이가 중학교 1학년 때 남녀공학에 다녔는데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왈, “에이 기분 나쁘게 여자가 일들을 했어!” 투덜거렸다. 그래서 “네 엄마도 남녀공학에서 일등만 했다. 왜 여자가 일등을 하는데 네가 기분 나쁘냐? 여자가 남자보다 공부 못하라는 법이 있냐?” 하고 내친 김에 한솜이 머리에 쐐기를 박아 놓았다. 그 결과 한솜이 머릿속에는 남자가 우원하고 여자가 열등하다는 생각은 없어져 버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정치가들의 문제가 텔레비전에 비치니까 “엄마, 여자들이 정치를 하면 훨씬 나을 텐데, 전쟁도 줄어들 거야.”라고 말할 정도로 여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집에서는 이렇게 열심히 평등교육을 하는데 학교에서 문제가 생긴다. 어느 날 한솜이 학교 남자 선생님이 “여자는 소극적이고 남자는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한솜이가 “그건 남녀의 성 차이가 아니라 개인 차가 아니냐?” 라고 물었다. 그랬더나 느닺없이 따귀를 때리면서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너희 엄마 뭐하는 사람이야?” 라고 물었다. 한솜이가 “여성운동가”라고 대답하자 “나는 그런 여자 경멸해!”라고 호통을 쳤다. 옆에 있던 한솜이 친구가 “한솜이 말이 맞는데요.”라고 맞장구를 치자 그 아이도 역시 따귀를 맞았다. 다음 날 당장 학교로 달려가 항의하려는데 한솜이가 그러면 자기만 더 얻어맞는다고 사정하는 바람에 꾹 참고 말았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학교에서 일어나다니....
지금도 우리 집 벽에는 딸 꽃솜이가 맞춤법도 틀리게 적어놓은 가족회의 결의사항이 붙어 있다. 내용인즉 “각 방 청소는 각자가 하고 저녁 설거지는 오빠, 식시준비, 화장실 청소는 엄마, 마루와 부엌 청소, 빨래는 아빠. 빨래 걷기는 꽃솜이. 만일 이를 안 지켰을 경우 외식비로 500원을 벌금조로 내놓는다.”
나는 아이들이 설거지를 안하면 벌금을 꼬박꼬박 받는다. 남편이 청소 안하면 안 한대로 산다. 지저분하다고 내가 나서지 않는다. 남편 본인이 못 견디면 그때 청소를 한다. 그러나보니 주변에서 우리 집이 안 치운다고 소문이 나 있다. 원래 천성이 게으른 탓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남편이 부지런히 청소를 하면 “아빠, 오늘 손님 와?”하고 꽃솜이가 묻는다.
남편의 가사노동에 대한 이해는 꽤 높은 편이다. 어느 날 남편이 빨래를 건조대에 널고 있는데 탁아방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 어 목사님, 남자가 빨래를 해요?”
“왜 남자가 빨래를 하면 안 되니?”“우리 아빠는 안 하는데요?”“네 아빠는 손이나 팔이 아픈가보지. 남자도 빨래하는 거야!”
남편이 빨래하는 것을 자주 본 탁아방 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남자가 왜 빨래를 하느냐고 묵지 않는다. 탁아방 아이들의 교육이 저절로 된 셈이다.
말은 이렇게 평등 가족처럼 이야기하지만 여성이 일하면서 살림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 1993년. 이 글은 아시아여성신학교육원의 52주 여성학 과정에서 논문대신 발표한 ‘나의 이야기’ 시리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