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영성
한국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부회장)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종려주일이란 교회력에 맞춘 절기이고,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수난사가 시작되는 날이다. 이 날을 맞아 우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을 하실 때 군중들이 환영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기억하는데, 우리가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무엇을 하셨나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하신 첫번 빼 일은 성전을 숙청, 깨끗이 하신 일이다.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 즉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다고, 상인들을 내쫓고 의자를 엎으신 일이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오신다면, 무엇을 하실까? 한국교회가 너무 장사 속이 되었다고 엎으시고, 내어쫒지 않으실까?
작년에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마틴 루터가 했듯이 우리 교회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제2의 교회개혁을 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높였다. 교회 개혁의 요청과 더불어 다른 한쪽에서는 어렇게 썩었는데, 교회를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닌가? 하는 비관의 목소리도 높다. 오늘 한국교회를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이런 점을 고민하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의 뜻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영성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는 한국교회를 개혁해보자고 여러분을 초청한다.
우리가 오늘 읽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는 예수의 첫 번 째 이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이야기다. 그런데 이 본문을 예수가 행한 이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가 교회개혁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드러난다.
1. 마리아가 포도주 떨어진 것을 발견하다-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자.
이 본문의 장면은 잔치 집이다.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잔치 집에는 손님들의 허기를 채워주는 잔치 음식 말고도 손님들을 기쁘게 할 포도주가 필수적이었다. 잔치를 잔치답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포도주였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다. 손님으로 온 마리아는 그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손님으로, 대접받는 위치에 머문 것이 아니라 마리아는 손님으로 와서도 그 집에 관심을 받고 구석구석을 살핀 것이다. 그 결과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처한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느라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모르는 것처럼 오늘의 교회가 타성에 젖어 정신없이 성장주의, 개교회주의, 물량주의에 빠져 흥청거리다 보면 교를 교회답게 하는 무엇인가를 상실할 날이 오게 된다. 여기에 우리의 역할이 있다. 우리가 교회에 온 손님처럼 그냥 방관자로만 있으면 우리 공동체에 꼭 필요한 그 무엇이 떨어져도 우리는 모르게 된다. 그러나 마리아가 한 것처럼 공동체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노라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발견하게 되고 그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따라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공동체에 관심을 갖고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2. 마리아가 예수의 때를 촉진시키다-불가능을 가능케 할 기회를 주자.
문제가 발견되면 대안 찾기에 나서야 한다.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게 된 마리아는 그 대안을 예수에게 구한다. 예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린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의 이야기에 예수는 싸늘하게 대답한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이 말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지만, 나는 여기 예수의 태도에서 문제를 대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보게 된다. ‘나하고는 상관업다. 내 때가 되지 않았다. 당장 포도주가 떨어지면 잔치에 흥이 깨지는데, 공동체의 윤활유가 떨어져 공동체가 삭막해지는데 상관없다고 한다. 내 이익에 직접 관계가 없으면 나서지 않겠다는 것이 일반 사람들의 태도다. 교회에 문제가 생겼는데, 교인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는데, 나와 상관없다, 시기상조다, 하는 말로 문제를 회피하려고 한다. 이러한 교인들의 태도는 교회공동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 수 없게 만든다. 공동체에 대핸 이러한 무관심이 공동체 문화를 죽음의 문화로 흐르게 두는 것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의 이런 태도에 개의치 않고, 하인들에게 “예수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이른다. 결국 마리아의 요청에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일으키게 된다. 대안이 찾아진 것이다. 예수가 마리아의 부탁을 듣고 이적을 행한 이야기가 “예수가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한 것처럼 부모님에게 순종하자“ 라는 어버이 주일의 단골 설교문이 되고 있지만, 이 본문은 그런 해석을 훨씬 넘어선다. 비록 예수는 자기 때가 아직 안되었다고 했지만, 마리아는 “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필요로 할 때가 바로 때”라고 인식했다.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는데 언제 준비된 사람만 나설 수 있겠는가? 비록 준비가 안되었어도 공동체의 위기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것이 마리아의 입장이었고, 그 결과 공동체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마리아는 때가 안되어 불가능하다는 예수를 떠밀어 때를 촉진하도록 하였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을 행하게 만들었다.
이 마리아에게서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첫째는 우리도 공동체에 무관심한 사람들 등을 떠밀어서, 아직 준비가 안되었다고 발뺌을 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서 힘을 발휘하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 특히 여성들, 겸손한? 교인들은 직분을 맡기려고 하면, 제가 어떻게, 아직 준비가 안되었는데요.“하고 뒤로 빠진다. 이런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서 그들의 잠재력을 발휘하게 해야한다. 둘째는 준비가 안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라는 것이다. 작년도 교단총회에서 여성 중 단 한명도 임원이 되지 못했다. 이유인즉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라는 것이었다. 기회도 주지 않고 능력을 논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예수조차 자기 때가 안 되었다고 했는데, 마리아는 때를 촉진해서 불가능을 가능케 한 기적이야기는 교회와 사회 지도력을 위해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3. 빈 항아리-죽임의 문화를 걷어 내라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을 받은 예수는 돌로 만든 비어 있는 큰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한다. 교회개혁과 연관하여 이 물 항아리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첫째 비어있는 항아리였다는 것이다. 비어있는 항아리에 물을 채웠다. 항아리란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에 있는 묵은 것들, 썩은 것들을 먼저 버려야 한다.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처럼 죽은 것들, 썩은 것들을 쏟아낸 빈 항아리가 아니면, 새것으로 채울 수 없다. 과거의 묵은 것들을 다 들어내야 한다. 구시대적인 것을 들어내고 새것으로 채워야 한다. 어떤 것을 들어내야 할까?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가부장 문화와 물질만능주의에 의한 성장주의다. 가부장 문화란 반드시 남녀 문제만이 아니라 힘의 논리로 지배하고 다스리는 질서를 의미한다. 이 세상을 “남성/여성, 인간/자연, 백인/유색인종/가진 자/가난한 자, 한국임/외국인”라는 구조로 양분해 놓고 이것을 다시 자연-여성-남성이라는 피라밋 구조 지배 질서를 만들고 이 질서로 차별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계질서는 강한 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폭력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전쟁, 테러리즘, 성폭력, 가정폭력이 다 여기서 파생된다. 이러한 가부장문화는 본질적으로 폭력문화요, 죽임의 문화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자본과 상품이 인간보다 더 우위에 있는 문화다. 물질이 가치의 척도가 되고 얼마나 더 많이 가졌느냐에 사람의 가치가 매겨진다. 인간이 상품을 만들어 내지만, 결국은 상품의 노예가 되어 주체성을 상실하고 만다. 이런 소비문화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으로서의 가치만 지니게 된다. 한 사람의 인격이 상품가치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평가된다. 그 사람의 인격보다 그 사람의 외모가 어떻게 생겼느냐? 그 사람의 능력이 상품성이 있느냐를 평가받는다. 그러니 여기에는 소유하는 삶의 양식만 있고 존재를 위한 삶의 양식은 없다. 더 많이 갖고 더 쓰고 더 편리하게 살려는 것이 인간의 삶의 양식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 생태계의 교란과 파괴요, 이는 결국 인류를 죽음으로 이끌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 역시 비판을 면할 길 없다. 현재 한국교회의 문화 역시 가부장문화와 소비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교회구조는 가부장문화에, 물질이 가치의 척도가 되어 성장위주의 개 교회주의, 교회의 방향이 수 불리기와 교회의 대형화로 이어지고 교회를 상품화하고 있는 게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이러한 교회의 문화 역시 개혁의 대상이다,
엄밀히 본다면 가부장 문화와 물질만능주의에 의한 소비문화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쌍둥이로서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죽임의 문화다. 이 죽임의 문화를 걷어내고 그 곳에 새로운 문화로 채워야 한다. 그 새 문화는 무엇인가?
4.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생명적인 것으로 채우자
예수는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물이라 무엇인가?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우리 몸의 70%가 물이며, 인간은 물이 없으면 죽는다. 그래서 물은 생명을 상징한다. 또한 물은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며 평화를 상징한다. 이삭이 평화의 사람으로 불리는 것도 생존의 근원인 우물을 양보하며 다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생명적이고 깨끗한 영성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만나 영생에 대한 진리, 무엇이 참된 예배인가에 대한 대화를 나눈 곳은 우물가였으며 요한계시록에는 새로운 세계를 생명수가 흐르는 강으로 비유하고 있다. 물이 갖고 있는 새로움에 대한 상징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생명적인 것이 있어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결국 죽임의 항아리를 비우고 채워 넣어야 할 내용은 생명의 문화인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자기를 애도하는 여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식을 위해 울라(누가복음 23장 28절)!”
우리 교인들이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우리 역시 남을 지배하려는 가부장문화, 소비문화에 편승해서 “나”밖에 모른다. 나-내 가족-내 교회가 전부다. 경쟁논리에 사로잡혀 공동체의 안위에 관심이 없다. 내 복에는 관심하고, 세상의 평화에는 관심하지 않는다. 편리하게 살겠다는 욕심으로 자원을 마구 쓰고, 생태계를 파괴하면 머지 않아 하갈이 사막에서 목말라 죽어가는 자식을 보며 애통해 했듯이. 마실 물이 없는 우리의 자식들을 생각하며 울 날이 머지않았다. 성장중심, 소비위주의 삶에서 거듭나 단순한 삶, 생명중심의 삶을 살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도 물과 성령의 거듭남이 필요하다. 생명력으로 거듭나서 이 세상이라는 항아리에서 죽임의 문화를 걷어내고 살림의 문화로 채워야 한다. 포도주는 생명과 기쁨이다. 생명을 살리고 기쁨을 주는 문화로 거듭나는 것이 무엇일지 독립문교회가 고민을 하야 하다.
5. 떠다 주어라-살림의 문화를 퍼 나르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인들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자 예수는 일꾼들에게 “이제는 떠서 잔치 맡은 이에게 가져다 주어라” 하고 말한다. 일꾼들이 그대로 하여서 질 높아진 포도주로 인해 잔치는 새로운 흥을 더하게 되었다. 아무리 항아리에 새로운 포도주가 가득 찼어도, 떠서 나르는 사람이 없으면 그 포도주는 공동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퍼서 나르는 일꾼들이 필요하다. 항아리는 새것으로 채웠는데, 떠서 나르는 일꾼들이 부족해서 새로운 포도주는 여전히 항아리에 담겨있다. 독립문교회 목사님이 마을공동체도 열심히 하고, 교회도 새롭게 하려고 많은 애를 쓰고 있다. 그런데 이를 퍼나르는 교인들이 없으면 교회는 새로워질 수 없고, 독립문교회를 통해 마을이 새로워 질 수 없다.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든 그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항아리에 담겨있는 생명문화를 열심히 퍼나르는 일을 하자. 21세기는 반생명적인 삶의 양식을 갖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살림의 문화를 추구하는 생활양식, 생명의 문화를 퍼나르는 길만이 우리 공동체를 살릴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이 세상은 처음 포도주보다 더 좋은 기적의 포도주 같은 맛이 날 것이다.
오늘 종려주일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맨 먼저 성전에 가셔서 하신 일을 생각하며, 우리 교회를 새롭게 해보자. 마리아의 여성으로 예수님조차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공동체가 필요할 때 나서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교인들이 되자. 썩은 것들로 가득찬 항아리를 빈항아리로 만들고 생명적인 것들로 채웁시다. 그리고 이 생명적인 것을 퍼다 나르는 일꾼들이 됩시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이고, 다음 주에 부활주일을 맞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고난과 부활은 어떤 의미입니까? 인간의 탐욕, 우리의 탐욕으로 인간은 물론, 생태계가 고통받고 있습니다. 죽임의 문화로 시체가 되어 있는 한국교회와 사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내가, 우리 교인이 생명적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퍼나름으로 죽음의 사회가 생명의 사회로 바뀌는, 부활의 전위대가 됩시다. 잔치 자리를 지켜보고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 때를 촉진하여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해 기적을 일으킨 마리아처럼, 죽임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개혁하는 21세기의 마리아가 됩시다.
이 글은 2017년 3월 종려주일에 독립문교회에서 한 설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