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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주는 말, 행동, 삶

한국소금 2019. 3. 25. 17:15

감동을 주는 말, 행동,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에는 이필렬 교수의 진정 감동을 주는 말의 정치란 제목의 시평이 게재되었습니다. 그 중요내용은 김선일 씨가 납치되고 살해되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이 테러를 반드시 근절시키겠다.”는 말에 대해서 좀더 감동을 줄 수 있는 진정한 마음이 없음을 지적한 글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테러를 근절시킬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실천할 수 없는 정치적인 말보다는 이제 우리는 모두 김선일 씨의 형제자매입니다라고 함께 마음을 나누는 말을 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표했습니다. 2004년도 상반기를 회고하면서 과연 나의 삶이 이렇게 감동을 주는 말과 행동, 삶이었을까 되물었을 때 두려움만 생겼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면 감동을 주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함께 읽은 본문은 그동안 여러 각도에서 해석하고 설교하였습니다. 오늘은 감동을 주는 말과 행동을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하는 주제와 연관시켜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건이 진행되는 장소는 베다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인데, 아마 이곳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체류하는 동안 머물렀던 숙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자들의 식사에 향유가 든 옥합을 지닌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의 동기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 그녀는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대단히 값진 향유라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손님에게 바를 기름을 제공하거나 종이 손님의 발에 기름을 발라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일은 왕을 임명할 때 행하는 것이지만, 기름 바르는 일의 좋은 영향은 매우 일반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름모르는 여인이 왜 비싼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발라주었을까? 의당 함께 있던 사람들은 여기에 관심을 두어야 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몇 사람들이 여인의 행위에 대해 불평하며 향유를 낭비한다고 말합니다. 이 비난은 직접적으로는 여인을 향한 것이지만, 간접적으로는 그러한 행위를 자신에게 하도록 허용한 예수를 향한 것입니다. 이름모르는 여인이 자신의 소유인 옥합을 깨트려 비싼 향유를 자신의 선생인 예수께 발라드렸다면, 당연히 칭찬을 하는 것이 세상이치인데도 말입니다. 요한복음 124절에는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가롯 사람 유다라고 명시되어 있고 그 금액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한 사람에게는 거의 1년 동안의 수입에 해당하는 막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상상하기 어려운 돈을 일순간에 날려 보내는(?) 여인의 행동에 대해 훌륭하게 구제사업을 하였던 유대인은 공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행동은 사치에 불과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특히 마가복음 1021절에 예수께서 부자 젊은이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셔서 하신 말씀,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고 하신 것과 조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에 따르면 여인은 당연히 자신이 소유했던 값비싼 나드향 옥합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사람들이 여자를 나무라는 것에 대해 오히려 여인을 옹호하였습니다. 예수는 여인의 행동에 대해 비난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을 하였습니다. 왜 여인의 일이 아름다운 일“(좋은 일)이 되었을까요? 랍비 유대교에서는 자선활동을 자선과 좋은 일로 구별합니다. 자선은 돈을 주는 것으로서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좋은 일은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헌신을 요구하며 구체적인 상황에서 요청됩니다. 좋은 일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분석이 중요합니다.

 

예수는 이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마가에 의하면 이 상황은 예수의 죽음을 앞둔 상황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고 인정합니다. 기름 부음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예고이며 그의 시신에 기름 바르는 일을 앞당긴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여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하였다는 설명입니다. 여인이 왜 값 비싼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발랐는지 그 의도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었지만, 예수는 그것을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여 바르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과 예수에 대한 사랑으로 이분법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과 예수에 대한 사랑을 양자택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는 이 상황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자가 아닐까요? 자산에 대한 동의와 이해가 가장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이 여인의 행동은 예수의 감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아무리 비싼 나드 향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예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으로서는 결코 비싼 것으로 간주되어 낭비라고 표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예수의 말은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이야기하듯 가난한 자에 대한 자선보다는 예수사랑에 우선을 두어야 한다.”든지, 또는 자선보다는 교회에 헌금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합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진다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자신의 삶을 최대한 공유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복음이야말로 바로 그렇게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하는 예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만이 감동을 주는 말이고 행동이고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