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신앙의 뿌리

한국소금 2019. 3. 25. 19:38

신앙의 뿌리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주일 예배를 함께 지키고 있다. 보통 교회에서 11월 셋째 주일 지키는 추수감사주일 예배는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이방 땅에서 자신들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자신들에게 곡식 씨앗을 나누어진 원주민을 초청하여 함께 지낸 감사 잔치를 기념해서 전래된 것이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의 본원은 구약성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하나님이 지시하신 바를 따라서 추구감사절을 지냈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첫 햇곡식을 수확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예배에 관한 것이다. 신명기는 크게 모세가 행한 세 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의 본문은 두 번째 설교의 끝을 맺는 부분으로서, 모세는 여기에서 결론부분답게 율법의 2대 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강조하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을 새롭게 확신시키고 있다.

본문의 중심내용은 어떻게 감사절을 보낼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업으로 얻은 땅 가나안에서 토지의 첫 소산물을 하나님께 바칠 때, 추수한 곡식을 바치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고백하여야 할 신앙고백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고백의 내용에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과거 비참했던 애굽 생활에 대한 겸손한 회고, 그리고 바로왕의 권세를 꺾고 이스라엘을 그 압제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찬양 등이 담겨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곡식을 바치면서 다음과 같은 고백과 감사를 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 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는데,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과 고역에 시달리는 것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것을 보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주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여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첫 곡식을 거두고 감사의 단을 쌓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시된 감사의 행위는 자기들의 역사와 신앙의 뿌리를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출애굽역사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또 자손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의 뿌리를 확인하고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참다운 감사는 자신들의 오늘이 있음이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 때문이었다는 것,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참다운 감사의 태도다. 특별히 고난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그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고백하고 그 고백에 근거해서 감사예물을 바치는 것이 감사의 진정한 의미다. 고백과 감사한 마음이 없이 물질만 드리는 것은 위선이며 잘못된 신아이다. 진정한 감사는 신앙과 존재의 뿌리를 찾는 것이다.

 

오늘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는 첫 곡식을 거둘 때의 기쁨과 감사를 실감 있게 느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사절을 의미 있게 맞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의 말씀에 입각해서 우리의 존재의 근원과 신앙의 뿌리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2005년 청암공동체는 추수감사절에서 어떤 고백을 하고 어떤 내용을 감사해야 할까? 청암에서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고백되겠지만, 청암공동체를 세우고 어연 25여 년 동안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겠다.


"우리 청암공동체의 선배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 땅에 민주화와 평화를 이루려는 뜻을 가지고 모인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들은 어느 기성 교회에 몸 붙여 살면서 모임을 가졌지만 전통교인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쫒겨 났습니다. 하나님은 이 젊은이들을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고 이들을 중심으로 청암교회를 새로 세우게 하였습니다. 일반교회와는 달리 고통 받는 민중의 현장에 함께 하기 위해 재건대의 막사에서, 종로 5가의 노동청소년 현장에서, 그리고 창신동의 가난한 주민들과 함께 하는 나그네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매년 이사를 해야 하는 어려움 과정 중에도 고통 받는 우리의 민중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다달이 높아가는 월세를 감당할 수 없던 차에 하나님의 인도로 이곳 창신동 130-102번지에 조그마한 우리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땅과 교회를 주신 것은 이 지역의 가난한 어린이들과 외국인노동자와 여성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온갖 좋은 것을 같이 누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아니면 청암공동체처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어떤 고백을 할 수 있겠는가? 2005년 감사절을 보내면서 여러분의 삶의 뿌리와 신앙의 부리를 확인하고 오늘이 있기까지 나를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우리의 신앙을 고백함으로 의미 있는 감사절을 지내자.

오늘 우리가 두 번째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쳤는데 감사하다고 예수를 찾아온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이었다는 이야기다.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죄인 중에도 큰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지금처럼 나병 환자를 치료하는 약도 없던 시대에, 더욱이 나병이 걸리면 고칠 수가 없고 전염이 된다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생긴 병이라고 믿어 성 밖에 버려져 사람취급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런 병을 고쳐주었는데, 감사인사를 안 하다니. 아마도 아홉 명의 사람들은 고침을 받은 것이 너무 기쁜 나머지 율법에 서있는 대로 제사장에게 빨리 보여서 죄인이 아니라는 증명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급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식구들에게 알리느라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9명은 그냥 가고 단 한 명만 감사하러 왔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렇게 감사하러 온 사마리아인에게 예수님은 그냥 칭찬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감사를 하러 온 행위를 믿음으로 보셨고, 그 감사하는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믿음이란 감사할 줄 아는 것이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구원의 길에 서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모저모 신세를 지고 살아간다. 곰곰이 손을 꼽아보면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신세를 지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내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표현했는가? 이 사람들에게,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나를 지켜준 하나님께 나는 감사를 할 줄 아는 한 명의 사람인가? 아니면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 측에 끼어있는가?

오늘 두 본문을 연결해보자. 진정한 감사는 나를 모른 채 하지 않으시고 고통에서 구해내셔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그분,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요, 그 고백을 구체적으로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내게 베풀어 준 하나님의 은혜를 나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200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