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 대한 명상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 누가복음 23장 33-34
복음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유일하고 특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린 곳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던지, 해골들이 쌓여 산을 이루었기에 해골산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예수는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십자가의 죽음만으로 본다면 예수의 죽음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당시 십자가는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 지는 형법이었다. 로마 시대에는 주로 로마에 대한 반역자를 처형하는 수단이었다. 예수 옆에도 두 명의 혁명분자가 십자가에 달렸다. 이는 예수의 십자가가 특별한 죽음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었으니까 예수는 로마에 저항한 혁명가로 여겨져 처형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뿐, 십자가 자체가 특별한 것은 없다.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죽음이 특별한 것은 그가 무고한 피해자였기 때문도 아니며 그의 고통이 유달리 더 심했기 때문도, 그의 죽음만 억울하다거나 불의한 역사의 희생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 이전에도, 예수 동시대에도, 예수 이후에도 불의한 역사에 항거하다 죽은 숭고한 의인들의 죽음이나 불의한 역사 속에서 억울하게 죽은 죽음들이 많이 있었고, 있어왔고, 또 있을 것이다. 예수, 그의 죽음이 특별한 것은 그가 십자가에서 돌아가면서 한 일곱 개의 말 중 첫 번째 말 때문이다.
“아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를 그 누구보다도 다른 특별한 우리의 구주로 만드는 것은 그가 참혹한 십자가 위에서도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는 것이다.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자기를 죽이려 한 그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에 가능하다. 잘못한 일도 없으면서 무지한 인간들 때문에 죽으면서도 그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이다. 용서는 예수의 마음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고사하고, 자신에게 조그만 해를 끼친 사람에게 용서는커녕, 적개심을 갖게 되기가 쉽다. 어쩌다 용서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용서해도 좋을 가벼운 사항만 용서가 가능하다. 우리가 판단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용서하고 싶지 않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그건 예수님의 마음과 다르다고 하신다.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말은 2천 년 전 과거의 일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를 보시면서 “내가 너를 용서 하마”하고 우리를 품으시고 우리를 그의 삶속으로 초대하신다.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향해 “하나님, 저들을 용서해주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그분의 사랑과 능력 때문이다. 사순절에 우리가 할 일은 우리에게 주시는 그분의 용서의 선물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 그분이 우리 삶속으로 들어오시도록 우리도 용서의 문을 여는 것이다.
20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