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예수의 울음”
칼의 노래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익히 알고 있었던 ‘성웅 이순신’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려고 시도한 책은 아닙니다. 이 책은 ‘무인 이순신’의 개인의 내면적 모습을 작가의 치밀한 상상에 따라 그럴듯한 이야기로 재구성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사실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개연성을 가진 그럴듯한 이야기로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하여간 이 책이 보여주는 이순신의 모습은 무인으로서 그 한없는 단순성이고 칼의 순결함과 같이 무인의 논리로써, 즉 정치와 모리배의 논리가 아니라 무인의 논리로써 자신의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적이 오면 베어야 하는 것이 무인의 논리입니다. 거기에 정치의 논리가 끼어들 자리가 없으며, 마치 자기가 뭐 백성들의 구세주나 되는 것처럼 백성들의 삶의 안타까움을 생각하고 이 전쟁을 꼭 이겨서 저들의 아픔을 없애주리라 다짐하는 그런 모습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후대의 해석이지요. 그저 전장에 임해있는 장수는 적의 칼을 보고 나의 칼을 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은 조정의 출격명령에 따르지 않습니다. 가토의 머리를 갖고 싶은 욕구에 군사를 출격하는 조정의 정치적 논리를 이순신은 그 제보가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또 풍랑이 심한 겨울바다에서 확실하지 않는 정보를 가지고 배를 띄울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합니다. 그것이 이순신을 체포하게 되는 이유가 되고 모든 관직을 잃고 문초를 당하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그는 이것을 “나는 가토의 머리를 베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 없었다.”라고 표현합니다. 바다에서는 바다의 논리가 있고, 조정에서는 정치의 논리가 있겠지만 자신은 전장이 펼쳐저 있는 바다의 논리를 따를 뿐이라는 것, 이것이 무인 이순신의 논리입니다.
이 책의 저자 김훈은 이런 이순신의 논리를 무인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칼의 노래”로써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서 칼이 징징징 울었다는 표현으로 김훈은 이순신의 자세와 마음가짐, 그의 전략, 그의 가치관, 그의 전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칼은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서 울고, 전투에서 도망가는 부하를 향해서도 울고, 순간적인 분노에 울고, 심지어는 조선에 원군으로 파병된 명나라 군사의 지휘관 진린을 향해서도 웁니다. “이 자를 베어야 하나?” 자신이 처한 전투에서 자신의 삶이 죽음의 무의미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 이순신은 자신의 뱃속에서 울려나오는 칼의 노래를 따라 움직입니다. 그것이 비록 조정의 길과 다를지라도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칼의 노래를 따라 움직이는 것, 그것이 김훈이 보여주는 이순신의 모습이고, 무인의 노래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잠을 청하던 어느 날 갑자기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이순신이 그랬다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예수로 하여금 죽음의 땅 예루살렘으로 몰아대던 예수의 노래는 무엇인가?” “이순신이 자기의 칼의 노래를 따라 조정의 명을 거역하고, 또 결국은 무인으로서 자기의 죽음의 자리를 찾아 명랑으로 노량으로 배를 저어 나갔다면 예수의 노래는 무엇이길래 그 또한 죽음의 자리로 그를 나아가게 하는가?”
하여간, “예수의 삶을 이끌어간 예수의 노래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 저의 마음속에 떠오른 질문이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예수는 많은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불렸을 뿐만 아니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눅 7,34)”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가 있는 곳에는 잔치가 있었고, 예수는 하늘 잔치를 통해 민중들을 자신의 주변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잔치에서 불러졌던 노래들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흥에 겨워 불러졌던 노래는 판이 깨지면 기억에 남지 않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민중들에게 기억에 남았던 노래는 기쁨의 노래가 아니라 슬픔의 노래입니다. 기쁠 때 함께한 친구보다 슬플 때 같이 있었던 친구가 진정한 친구이듯이 기쁨의 노래보다는 슬픔의 울음이 더 마음속에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노래보다는 예수의 울음을 기록에 남겼습니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울음입니다.
저는 이 울음이 예수의 노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 울음이 예수의 살 전체를 조명해주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의해서 압제당하는 식민지의 유대 땅, 거기에 종교권력의 논리에 의해서 성스러움의 공간으로부터 배제당한 이스라엘 민중들의 노래는 필연적으로 울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권력으로부터도 삶의 기본을 보장받지 못하고, 종교와 도덕으로부터도 자신의 삶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민중들의 삶의 가치, 의미, 생명력을 회복하려 나선 것이 예수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늘나라의 잔치를 벌이고, 그들의 잊어버린 하느님을 “어버이”로 회복시키고 그들을 자녀로 회복시켰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의 삶을, 삶의 의미를 회복시키려 했던 것이 예수의 운동이었습니다. 예수는 그 당시의 민중들과 함께 울음을 울음으로써 자신의 삶의 자리를 위치지었고, 그 울음을 자신의 노래로 삼아 살았던 것입니다.
제가 예수의 이 울음을 예수의 노래로 생각하는 까닭은 예수의 삶의 마지막 점에서 이 노래가 자신의 절규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허망하게 없어져 버릴 자신의 삶의 허무 앞에서 예수는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집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지금까지 버려져왔던 민중들의 삶, 그리고 그 삶을 다시 되살려내려던 자신의 노력이 십자가 위에서 없어져 버릴 그 허무의 순간에 예수는 자신이 그렇게 믿었고 신뢰했던 하느님 앞에서 다시 한 번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이렇게 끝나는 것입니까?” “정말 민중들의 삶은 또 다시 버려지는 것입니까?” 즉, 예수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의 노래로 불러왔던 자신의 울음, 민중의 울음을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민중신학자 김용복 박사는 [예수, 민중의 사회전기]라는 책에서 “예수의 이야기는 민중의 이야기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예수의 이야기 안에는 그 당시 민중의 바램, 욕구, 소망, 그리고 절망과 울음이 표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면서 그 말이 결코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민중이었나 아니었나를 떠나서 예수이 이야기에는 민중 자신의 이야기, 민중의 개인적인 자서전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자서전이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서 대표되었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그 당시의 민중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또한 동시에 보는 것은 그 예수의 모습이 민중의 모습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예수의 울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왜 기록되었겠습니다. 그 울음이 단지 예수의 개인적인 울음이었을까요? 저는 오히려 예수의 이 울음을 당시 민중의 울음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택된 백성, 그러나 버려진 자신들의 모습을 한탄하며 그들이 울었던 외침이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결국 이렇게 본다면 예수의 울음은 민중의 울음입니다. 예수는 민중들의 바램, 욕구, 소망, 한을 자신의 바램, 욕구, 소망, 한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의 울음으로 울었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울음은 민중의 울음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사후에 예수의 고난이 자신들을 위한 고난이며, 예수의 질병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며,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자신들이 나음을 입었고, 그가 자신들을 대신하여 슬픔을 겪고 징벌을 받는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 대속론의 시작이며, 그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20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