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번 격정으로서의 분노에서 성숙을 행한 여정으로!

한국소금 2018. 1. 31. 19:17

격정으로서의 분노에서 성숙을 행한 여정으로!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인물 이야기를 쓴 김영운에 의하면 에니어그램이란 자기 발견을 통해 자신과 타인, 세계를 깨어있는 의식으로 바라보게 하고, 자기와 세계 사이에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게 하며, 본래 가지고 태어난 온전함의 영성을 회복하게 하는 길로 자기 발견, 수행의 언어로 참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에니어그램은 인간을 9개의 품성으로 나누고 내 품성은 어디며, 그 품성 중 어느 단계이 있는지를 파악해서 내 안의 격정은 줄이고 바람직한 상대를 찾어 그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하나님이 본래 지으신 내 모습을 회복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도록 돕는 영성 프로그램이다.

 

에니어그램은 인간의 성격을 9가지 유형으로 나누는데 이 9가지 성격에는 각각 격정, 즉 고쳐야할 단점들이 있다. 이 단점을 고쳐나가는 것이 중요한데 이런 격정들을 다스려 덕목으로 이끌지 못하면 자기 파멸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개혁형인 1번은 격정인 분노를 다스려 평정이라는 덕목을, 2번은 자랑을 다스려 겸손을, 3번은 기만을 다스려 신실로, 4번은 시기심을 다스려 침착함을, 5번은 인색함에서 초연함으로, 6번은 공포에서 용기로, 7번은 팀닉에서 맑은 정신으로, 8번은 정욕에서 소박함으로, 9번은 나태에서 벗어나 근면함이라는 덕목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격정을 덕목으로 바꾸는 삶이 통합과 성숙의 길이라고 한다.

 

나의 경우 에니어그램은 각 유형 별 특징이 전체적 윤곽은 알겠는데 심층적으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성서 인물을 통해 그 인물의 격정과 기피사항, 함정, 덕목 등을 찾아보니 내가 회개할 것이 무엇이고 내가 지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성서의 인물을 총해서 참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이 작업은 김영운 목사가 쓴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 인물 이야기를 기본토대로 해서 살펴 본 것이다.

 

1번 유형은 책임감이 강하고 합리적이며 원칙적이고 규율적이며 독선적인 면이 있다. 1번 유형의 격정은 분노인데 완전을 추구하는 1번이 분노를 한다는 것 자체가 완전하지 못한 것이라 분노를 기피하다가 화를 토해내다 보니 폭팔성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김영운 목사에 의하면 1번 유형의 대표적 인물은 모세, 세례요한, 사도 바울이다.

 

출애급의 지도자 모세

 

1) 모세의 생애

모세는 알려진 바와 같이 히브리백성을 압제한 바로왕의 명령, 즉 사내로 태어난 아이는 다 죽이라는 명령에 의해 강에 버려져 죽을 운명이었으나 바로의 공주의 양아들이 되어 목숨을 건지고 왕궁에서 자랐다. 어른이 되어 동족이 이집트 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고 자화가 나서 그 감독관을 쳐 죽이고 땅에 묻은 사건 때문에 바로를 피해 미디안으로 도망갔다. 미디언 광야에서 양을 치며 살든 어느날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동족 히브리사람들을 출애급시키라는 명령을 듣고 바로에게 대항해 10가지 재앙을 일으킨 후 출애급을 한다. 백성의 지도자로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된다. 숱한 곡절을 겪으면서 가나안 땅 앞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히브리백성이 들어 갈 새 땅을 보여주지만 정작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난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 비스가봉우리에서 죽고 만다.

 

2) 모세가 일으킨 분노라는 격정

모세는 바로의 압제에서 종살이 하는 히브리백성을 출애급시켜 가나안땅으로 인도한 민족의 지도자로 성서에서 계속 위대한 지도자로 부각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모세는 자신의 격정 인 분노 때문에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죽는다.

모세가 맨 처음 일으킨 격정은 백성의 지도자가 되기 전 왕궁시절에 일으킨 분노의 사건이다. 모세는 자기 백성을 학대하는 이집트 노무관을 때려죽였다. 여기서 분노를 일으킨 이유는 자기 백성이 학대를 당하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모세는 왕궁에서 살면서도 이집트인들이 히브리인들을 대하는 태도에 평소부터 불만이 많았으나 바로의 궁에 살았던 탓에 분노를 잠재우며 살았던 것 같다. 쌓여있던 불만이 차별의 현장을 목격하자 분노가 표출되어 사람을 죽였다. 1번 유형의 약점 중 하나가 지적질인데 모세도 지적질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사람을 죽이고 땅에 묻은 그 다음말 백성들끼리 하는 싸움에 나서서 그는 잘못한 사람이 왜 동족을 때리느냐?”고 지적을 하였다. 적반하장으로 잘못한 사람이 힘을 무기로 폭력을 행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니 시비를 가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지적질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데 모세는 이를 가지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지적질을 해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단 말이요?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도 죽일 작정이요?” 하고 대드는 말을 듣게 되고 바로를 피해 도망가야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자기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해대는 지적질이 자기를 곤경에 빠뜨리게 된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일반인으로서의 모세에게 나타난 1번 유형이다. 지도자로서의 1번 유형을 보려면 출애급 후 백성의 지도자로서 모세가 일으킨 격정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광야생활에서 모세가 일으킨 분노는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 물과 관련된 가데스사건, 그리고 십계명 돌판을 깨뜨려버린 사건이다.

첫 번 째 사건은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은 모세가 화를 내서 백성의 자세를 바로잡은 이야기다. 모세의 인도로 출애급한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모세를 원망하자 하나님의 은총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게 되었다. 단 각자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였는데 일부 사람들이 더 거두어 썩어 냄새가 나게 되자 모세는 이들에게 화를 내었다. 모세의 화를 보고 백성들 중에 그날 먹을 것만 거두는 사람들도 생겼으나 일부는 끝까지 그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아마도 이때는 모세의 화 정도가 지적질 수준으로 백성들이 받아들을 만 했던 것 같기는 한데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화를 수반한 지적질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교훈일까?

 

두 번 째 가데스 사건이다. 가데스에서 히브리백성이 마실 물이 없자 왜 이 고약한 곳에 우릴 떼려왔느냐?‘며 모세와 아론을 비방하자 하나님은 지팡이를 잡고 바위에게 명하면 물이 나올 것이라고 하며 지시하셨다. 그러자 모세는 회중들에게 반역자라고 화를 내며 홧김에 지팡이를 들어 바위에게 명령하지 않고 바위를 두 번 씩이나 쳤다. 물이 나오긴 했지만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책망하셨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만큼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회중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이 가데스 사건에서 일으킨 모세의 분노는 하나님이 히브리백성에게 가나안 땅 입성을 포기시킬 정도로 심각한 분노였다. 하나님이 바위에게 명령하라고 한 것을 자기 분노가 시킨 대로 바위를 친 결과가 비록 은혜를 모르는 백성이기는 하나 그 백성의 구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사건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십계명 증거판을 던져 깨뜨려버린 일이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하는 히브리백성에게 하나님이 화가 나서 없애버리겠다고 하자 진노를 거두어달라고 애원해서 재앙을 거두시도록 하나님의 뜻까지 돌리게 하였다. 그러고도 우상타락의 현장에 와서는 너무 화가 나서 그 증거판이 하나님이 손 수 만들어주신 것, 히브리백성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이 적힌 증거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산산조각이 나게 했다. 이것도 모자라 하나님의 명령이 없음에도 사람들을 자기편에 서는 사람은 하나님의 편으로 삼고 이들에게 자기편에 서지 않는 사람들을 학살하도록 시켰다. 모세는 격정에 사로잡혀 자기의 친족과 친구와 이웃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이라고 외치고 이를 시행토록 했다(출애급기 32:27). 끔찍한 분노가 불러 온 학살이다.

모세의 분노가 학살에 이르기까지 증폭된 것은 분노를 참으려고 하다가 폭팔했기 때문이다.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백성들과 얼마나 시달렸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화를 낸 기록은 3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3번의 분노, 특히 2번의 분노는 대형사고로 이어진다. 참다 참다 터뜨린 분노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모세를 온유한 사람으로 표현했는지 모른다.

 

3)‘완전이라는 함정으로 인한 분노의 격정이 완전을 파괴하다.

1번 유형인 모세의 함정은 완전이다. 모세는 백성을 바로의 종살이로부터 출애급시켜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가야한다는 사명감과 더불어 그에 걸맞는 완전한 지도자가 되고자 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처음 하나님의 백성을 출애급시키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을 때 그는 백성들이 자기를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 나는 말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제발 보낸 만한 사람을 보내라 등등 이유를 대며 회피하려 한다. 지도자가 되려면 완전해야 하는데 자기는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론을 붙여주었다.

출애급지도자로서 모세의 함정은 두가지 였다. 자신이 완전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출애급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정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모세를 지도자로 인정하면서도 삶에 어려운 문제만 생기면 원망과 불평을 해대고 하나님을 거역했다. 모세는 이런 백성들에 대해 실망하고 때로는 분노한다. 모세가 분노하는 장면을 잘 살펴보면 분노의 단계가 보인다. 만나와 메추리 사건에서는 히브리백성이 알아들고 태도를 고칠 수 있도록 화를 조절했으나 반석을 친 사건에서는 하나님이 내린 명령을 자기 식대로 해석해서 분노를 일으켰다. 증거판 사건에서는 자기 분노를 조절하기는커녕 아예 하나님의 뜻은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마음 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가며 편을 갈라 학살하는 끔찍한 분노를 자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신(민수기 123) 모세의 격정은 바로 분노였고, 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결국 모세 자신은 물론이고, 분노의 대상인 그의 백성들까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모세의 격정인 분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분노의 폭이 증폭함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는 잘해보려고 하는 자신의 지도력에 대해 원망하고 배은하는 백성들에 대해 직접 화를 내기보다는 하나님께 백성의 무지에 대해 하소연하는 식으로 화를 낸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완전한 지도자, 완전한 백성이라는 자기의 함정으로 인해 참았던 분노는 감정적으로 앞서게 되고 마침내는 폭력성으로 나타나게 되는, 분노의 과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하나님의 원칙이 자기 원칙이 되면서 분노라는 격정이 증폭되고 자기가 추구했던 완전성을 파괴하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

 

모세가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성서의 명확한 기록이 아니라 가데스 사건의 일화를 추측으로 해석된 것인 듯하다. 세상에서 가정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이 분노 때문에 가나안에 못 들어갔다는데 대해 모세가 너무 불쌍하고 안타깝다. 모세는 배은망덕하고 불순종적인 백성에게 하나님이 진노할 때마다 차라리 자기에게 진노를 내리라고, 차라리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고 백성들을 구원해달라고 호소하는 진정성 있는 지도자였다. 그런 모세가 자기를 원망하고 따르지 않는 백성에 대해서는 분노의 격정을 일으키고 그 격정을 증폭시킨다. 성서의 기사에 나타는 모세의 분노는 인간적으로 너무 이해도 잘 되고 타당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모세가 완전이라는 함정에 메몰되지 않고 자기 격정인 분노를 잘 다스렸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생각하니 안타깝다.

 

4) 모세의 성숙성

이렇게 분노의 표상처럼 모세가 소개되고 있지만 사실상 예수님이 오실 때가지 모세처럼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지 않았다고 성서가 증언할 정도로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였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명은 이스라엘민족 공동체의 삶의 지표가 되었다. 비록 자신의 분노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때문에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는 약속의 땅을 보고 안도 속에서 죽을 수 있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한 사람으로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모세는 민족의 불평 때문에 큰 분노를 표출했으면서도 그 민족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민족을 사랑했고, 하나님께 민족을 대신해 용서를 빌었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애썼고 대부분 평정을 유지했던 것 같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순종한 모세! 그래서 모세는 가장 겸손한 자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정도로 성숙한 지도자의 삶을 살았다.

5)모세를 통해 나를 돌아보다.

에니어그램 1번은 완전을 추구하지만 그 완전이 함정이 되는 순간 격정인 분노로 자신의 공을 다 허물어버린다. 옳은 것에 대한 욕망이 함정이 되어 옳지 못한 것을 보면 분노한다. 나는 1번 유형은 아니나 1번 유형의 성향이 꽤 높게 나타난다. 언 듯 언 듯 모세 속에 들어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개혁적 성향이 강하고 완전을 추구하며 분노도 잘 한다. 1번의 특징인 완전을 추구하느라 분노의 한 표현인 지적질도 잘한다. 모세처럼 사람들을 고쳐보겠다고 어떤 사안에 대해 잘못되었다 생각하면 곧 지적질을 해댄다. 모세의 분노에도 끝까지 태도가 안 고쳐진 백성이 있었던 것처럼 분노가 섞인 지적질이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함에도 말이다. 분노의 크기가 다를 뿐이지 모세가 백성들의 반역 때문에 화를 낸 것처럼 모세처럼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 명분을 세워 화를 낸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내 분노를 합리화할 때도 있다. 마음 같아서는 모세처럼 돌 판을 던지고 싶을 때도 있지만 사실 용기가 없어서 못하는 경우도 있다. 증거판을 산산조각 내버리고도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자기편에 서는 것이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라며 반대편을 숙청한 모세처럼 하나님까지는 끌어대지 않는다 치더라도 내가 내는 분노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옳지 못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때로는 상종해서는 안 될 사람으로 규정해서 편을 가르기도 한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일으킨 분노를 내 작은 일상에 적용하는 것은 모세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세를 반추해서 내 격정을 들여다보고 분노를 다스림으로 하나님이 원래 지으신 그 성숙의 여정에 설 수 있기를 기원한다.

 

2. 완전주의자 세례요한

 

모세가 1번 유형의 격정인 분노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면 두 번 째 인물 세례요한은 에니어그램 1번 유형의 격정인 분노도 있지만 분노를 기피하지 않고 완전이라는 함정에 빠지기도 하지만 성숙한 덕목을 살리고 통합의 방향으로 나아간 사람의 본보기로 보여진다.

 

1) 세계요한의 생애

세례요한은 출생부터가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온 사람으로서 이 일에 삶을 바쳤고, 이 이일을 하다 죽었다. 세례요한의 출생과정은 누가복음에 묘사되어 있듯이 제사장 아버지 스가랴와 완경된 어머니 엘리자벳 사이에서 태어난 기적의 아이다. 이 기적의 아이는 길을 예비하는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듯이 예수 보다 6개월 정도 먼저 태어났고 기쁨이라는 뜻이 있는 요한으로 불리어졌다. 그 아버지 사가랴가 노래했듯이 세계요한은 가장 높으신 분의 예언자로 불리우고 주님보다 먼저 그의 길을 예비하고 청년이 되어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소명을 자각하고 제사장 기문임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살며 사람들에게 회개를 외치며 그 징표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었다. 세례요한에게 있어 요단강에서의 세례는 오실 메시야를 맞는 준비로 회개하고 깨끗한 삶을 살겠다는 결단의 징표다. 이렇게 세례를 주고 회개를 외치는 세례요한에게 민중들은 오실 메시야나 엘리야로 기대하기도 했다. 이런 세례요한에게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도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자신은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라고 증언하면서 새로 오는 메시야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가치관의 변화, 회개하라고 외친다.

2) 세례요한의 격정 분노는 어떻게 표출되는가?

1번 유형으로서 세례요한의 격정 역시 분노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모세와는 다르게 나타나는데 일종의 지적질로 표출된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 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어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하거나 바리새파에게는 너희는 아브라함이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다. 회개하지 않는 나무는 찍혀서 불에 던지울 것이다.“라고 독설을 퍼부으며 회개를 촉구한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졌던 세례요한은 자신의 역할에 철저하고자 제사장의 아들이었으면서도 광야에서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준다. 준비하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이다. 1번 유형은 지나치게 책임감이 강하다고 한다. 세례요한은 세례를 받으려 오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좋은냐?고 물을 때 그 사람이 처한 위치에 따라 회개를 촉구한다. “속옷 두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하라.”거나 세리에게는 정해진 것 말고는 더 받지 말라.”, 군인들에게는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고소를 하여 뺏거나 속여서 뺏지말고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라고고 윤리적인 촉구를 하였다. 헤롯왕이 자기의 동생의 아내를 부인으로 취하려 하지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비판하였고 그 결과 옥에 갇혔다가 목이 잘린다. 세례요한은 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잘못, 죄를 지적하였으며, 이 지적질은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세례요한의 지적은 옳았다. 그러나 독사의 자식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으로 미루어 세례요한의 지적은 매우 거칠었던 것 같다. 그리고 권력에 항거하는, 의를 위한 지적질로 죽임에 이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을 추종하는 무리가 많았고, 세례요한을 기다리던 메시야나 엘리야같은 예언자가 아닐까 기대하고 추종했던 무리가 많았음에도 자기의 정체성, 자신의 역할을 끝까지 준수했다. 이를 미루어 세례요한은 격정인 분노를 잘 다스려 1번의 덕목인 평정을 살린 지도자로 평가하고 싶다.

 

3) 함정으로서의 완전주의

세례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메시야 시대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 시대를 준비하고자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자신에게 메시야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2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이고 내 뒤에 오시는 이가 그분이다.”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고, 예수에게 세례를 주면서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다.

1번 성향은 이상주의 성향이 강하고 정의감, 책임감이 강하고 분에 넘치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그 일에 충실히 나선 것이다.

이러한 세례요한도 예수의 행적이 자기가 기대하던 메시야의 행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고 묻는다. 자신이 메시야라고 선포해놓고도 혹시나? 해서 확인이 필요했다. 완전주의 성향이 강한 1번은 확신이 안 들면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납득할 수 있을 때가지 확인을 해야 한다. 돌다리도 두드려야 한다. 불안으로 확인하는데 확인될 때까지 불안감이 증폭되어 더 불안을 가증시키고 그 과정에서 분노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경우처럼 의혹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확인을 통해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4) 세례요한의 성숙성

예수는 세례요한을 여자가 낳은 여자 중에 세례 요한만큼 위대한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셨다.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닦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자기의 사명을 다한 사람이다. 일단 길을 예비하는 자로 자신의 소명을 설정한 다음 추종자가 많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소명에 충실했다. 또한 자신의 역할이 회개를 외치는 위치에 있으면 죄사함을 받기 위해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엄청 회를 낼 법도 한데 적절한 지적으로 회개를 하게 이끌어 빛의 증언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였다.

 

5) 세례요한을 통해 나를 돌아보.

나도 세례요한만큼 지적질을 잘한다. 그런데 세례요한과 달리 내 지적질이 맞기는 하는데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지적 받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다.

또한 내 역할과 사명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누가 추켜 주면 종종 내 분수를 모르고 착각해서 내 위치를 망각해 딴 짓을 하기도 한다.

한편 1번으로서의 세례요한의 함정이 완전주의라 확신이 들 때까지 확인해보는 것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나는 확인해보기 보다는 직관에 따라 하기 때문에 실수할 때가 있다. 오히려 세례요한의 확인을 통해 완전하고자 하는 성향을 배우고 싶다.

 

3. 속사람과 겉사람 사이에서 투쟁한 바울

 

1) 사도바울의 행적

사도바울은 유대식 이름은 사울이고 그리스식으로는 바울로 불린다. 그는 전통적인 유대인으로 유대교에 어긋나는 예수가 메시야이며 부활하셨다는 신앙을 가진 예수쟁이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노상에서 예수를 만나 회심하고 반대로 지독한 예수쟁이가 되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파하다가 로마에 붙잡혀 처형당한 사람으로서 그의 행적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고, 그가 쓴 편지는 기독교의 기본신학이 되어 사실상 교회를 만든, 그리스도의 제자다.

 

2) 바울의 격정 분노

1번 유형은 원칙주의자로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목숨을 걸 정도로 열정을 쏟는다. 이 과정에서 1번의 격정인 분노가 표출된다. 바울의 격정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유대교에 반한다고 생각해서 자원해서 이들을 잡겠다고 대제사장의 허락을 얻어 다마스커스로 간다. 바리새파 집안으로 가말리엘문하에서 공부한 정통 유대교신자인 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을 없애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분노가 얼마나 강했던지 살기를 띠고 있었다.”라고 사도행전이 증언하고 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서는 살기를 띤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1번의 모습이다. 불건강할 경우 1번은 남을 관용하지 못하고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 분노하게 되고 그 분노는 복수로 이어지게 되고 살기를 띠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바울이 회심한 후에는 반대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 열심인데 이 과정에서도 자신의 격정인 분노를 여실히 보여준다. 바울의 격정은 바울 서신 중 대부분에 드러나 있지만 가장 도전적이고 격정적인 갈리디아서에 잘 나타난다. 자신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에게 대한 자신의 사도성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율법이, 할례가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얻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의 참된 지도자성을 설파하며 공격적으로 지적질을 한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베드로에 대해 위선자라고 직설적으로 비난한다. 선교여행 중에는 바나바의 조카 마가가 대열에서 이탈했다 돌아오자 용서하지 못하고 칼 같이 관계를 정리해서 바나바와 헤어졌다. 후에 죽음을 앞두고 이 일이 후회되어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디모데에게 부탁했듯이 당장의 화를 참지 못했고, 이 일이 후회로 남게 된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만나면 분노하게 된다. 그런데 1번의 분노는 끓어오르는 분노기 때문에 일단 분노가 끓기 시작하면 억제하지를 못한다. 모세와 바울에게 보듯이 1번 성형의 사람은 분노가 살기를 띠고 살인으로까지 이를 수 있는 격정임을 생각하고 분노를 줄이고 평정심을 갖는 훈련을 해야 할 듯하다. 분노룰 줄인다고 해서 억제해 마음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해소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3) 바울의 함정 완전주의

1번 유형의 함정이 완전주의인것처럼 바울에게서도 완전주의자로서의 함정이 잘 드러난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이 원칙을 고수한다. 완전한 유대인이 되고자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데 살기를 띌 정도였다. 완전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건 온갖 박해와 위험을 무릅썼다. 이렇게 자기가 옳다고 믿은 일에 대해서 그 일을 완전하게 이루고자 하는 강한 욕망으로 원칙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자기가 전한 복음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완전에서 이탈한 것이기 때문에 용납이 될 수 없다. 짜증이 나고 그 짜증이 분노로 이어진다. 완전에 대한 욕망이 함정이 되어 분노라는 격정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을 보면 자기가 전한 복음의 완전성과 그런 복음을 완전하게 따르지 못하는 교인들에 대한 칠타가 곳곳에 있는데 그 질타는 다분히 분노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에게서 보는 것처럼 1번의 유형이 완전이나 원칙을 추구한다고 해서 완전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바울 편지 곳곳에 보면 복음에 대한 열정에서는 일관성이 있지만 복음의 내용을 설명할 때는 자신이 오랫동안 물들은 유대교의 전통이나 그리스와 로마 사회의 관습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곳곳에서 이율적인 모습을 보인다. 바울이 보는 그리스도인의 복음은 갈라디아서 328절에서처럼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다 하나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 13장에서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써라, 여자는 남자에게서 지음을 받았으니 여자의 머리는 남자다, 이렇게 유대교전통에 의한 것을 주장했다가 다시 돌이켜 그리스도의 자유의 핵심인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 없이 남자도 있을 수 없다고, 여자가 남자에게 난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도 여자에게 났다, 고 이런 말로 자기 말을 뒤집어놓고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편지 곳곳에서 율법을 따르는 교인들을 비판하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하던 바울이 13장에서는 율법에 서 말한 것처럼 여자는 복종하라,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라고 일관성 없는, 원칙 없는 주장을 한다. 자신이 일관성 없는 원칙을 말해놓고 그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분노하는 바울! 바울의 경우를 미루어 볼 때 1번은 완전과 원칙을 추구하지만 그 완전과 원칙은 자기 식대로의 원칙과 완전일 경우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속사람과 겉 사람이 다른 자기 모습에 대해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것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고 있다(7:21-25)”라고 고백했는지도 모른다.

4) 마음의 법과 육신의 법 사이에서 영적 투쟁을 하며 성숙을 향하여 나간 바울

바울은 1번의 격정인 분노를 유감없이 발휘한 사람이다. 이는 그가 완전주의자로 자라 완전주의를 추구하며 살았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을 포용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한 자기 자신과 대상에 대해 못마땅해 하고 그에 대한 불만이 분노로 이어지며 나중에는 살기까지 띠는 분노의 상태를 표출하였다.

그러나 이런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후 회심하여 완전하고자 한 자기 함정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는 자가 되고자 애쓴다. 그는 여러 교회에 편지를 보내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낮아지는 삶,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살 것, 삶의 목표를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데 가치관을 두고 살라고. 종국에는 사랑이 최고의 선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성숙을 향해 나간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6절에서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켰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 이런 성숙의 삶은 쉽게 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말했듯이 마음의 법과 육신의 법 사이에서 마음의 법을 따르기 위한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이루어진다. 종국에는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부단히 간구하는 가운데 속사람이 새로워지고(고후 4:16)복음의 사도로서 균형을 이루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5) 바울을 통해 나를 보다.

나는 바울처럼 살기를 느낄 정도의 분노를 일으켜 본 적도 없다. 그러나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불의를 일삼는 계층을 보면 하나님은 저런 사람 안 잡아가나?” 하고 속으로 죽어주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사회정의와 안전을 위한 대의를 위해서라도 사도 바울처럼 목숨을 내걸 용기는 없다. 살기를 띨 정도의 분노는 문제지만 의를 위해 자기를 던질 수 있는 것은 바울은 부럽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바울의 분노를 문제삼으면서 바울에게 분노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인의 자유를 말하면서 다른 한편에서 율법과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관습에 따라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의 머리는 남자다,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등의 말로 교회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질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이 말 때문에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고시를 합격하고도 17년동안이나 목사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 말만 들어도 열이 나고 화가 난다. 이제는 바울을 용서할까 생각할 때도 있지만 바울 때문에 아직도 여성안수를 허락하지 않는 교단이 있으니 바울에 대한 분노를 그칠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그 분노가 오래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 현장소리가 들리면 그때마다 분노하니 내 분노는 1번과는 다르다.

 

모세, 세례요한, 사도 바울을 통해 1번의 격정인 분노를 살펴보면서 의문도 생긴다. 분노가 다 그렇게 나쁜가? 하는 것이다. 특히 성차별, 인종차별, 일본군위안부, 교회성장주의, 세월호, 역사교과서국정화, ‘일본군위안부문제 한일외교장관의 굴욕적인 회담결과, 친일우익의 행태 등에 대해 분노하면서 여성신학자 비버리 헤리슨의 말처럼 거룩한 분노라는 말을 생각한다. 내가 차별에 항거하는 힘도 분노의 영성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분노가 힘이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거룩한 분노와 격정으로서의 분노의 경계선이 중요한 것 같다.

정의를 위한 분노라고 모든 분노가 다 긍정적인 것은 아님을 모세나 바울을 통해 볼 수 있다. 격정으로서의 분노는 분노를 낳고 그 분노는 시간이 가면서 증폭되고 폭력으로 이어진다. 처음에는 완전한 지도자가 되려고 하지만 자신의 완전성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깨뜨려질 때 분노가 시작되고 그 다음 단계에서는 내 분노를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분노를 일으키면서 자기도 통제 못할 정도로 폭력성을 담보하게 되기에 문제가 되는 게 아닐까? 아무리 그 분노의 원인이 정의를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폭력적인 분노, 반생명적인 분노는 정당화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평정으로 갈 수 있는 성숙한 삶을 위해 성령께 간구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