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받기 위한 봉사에서 겸손한 섬김으로!
사람들 중에는 남에게 주기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잘 돌보며 봉사하기를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에니어그램 2번 유형이라고 하는데, 협조자로서 봉사자 기질이 강하다고 한다. 이들의 특색은 자신의 필요는 기피하면서도 남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고 돌보는데 열심이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할 경우 문제를 일으킨다. 협조자, 봉사자로서의 에니어그램 2번의 격정은 자기 봉사에 대한 교만, 자부심, 자랑이며, 기피는 자신의 필요나 욕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봉사자로서 2번의 함정은 봉사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봉사라는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따라서 2번이 회개하는 것은 봉사한다는 자기 자존심과 우월감에서 벗어나 은총을 함께 나눈다는 자세로 봉사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봉사를 하는 사람은 겸손히, 사심 없는 봉사자가 될 수 있다.
성서의 인물들 중 2번 유형은 룻, 막달라 마리아, 사도 요한이라고 한다. 나는 여기에 마르다를 덧붙이고 싶다.
1. 자기의 종교까지 포기하면서 나오미를 따르고 돌본 룻.
1)룻의 행적
룻은 이방인으로 다윗의 조상이 되는 반열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이름을 붙은 책이 있는, 특이한 이력을 지닌 여성이다. 룻의 행적은 4장밖에 안 되는 룻기에 잘 드러나 있다. 룻기는 이주민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이주민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이주민 인권의 실상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영성이 어디까지 고양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룻기의 배경은 기근이 들어 고향 유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해 온 나오미라는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모압 땅에서 나오미의 남편이 죽더니 얼마 후 두 아들마저 죽었다. 나오미는 두 아들이 죽은 후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한다. 나오미가 길을 떠나자 두 며느리도 함께 따라나섰다. 그러나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만류하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그러나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른다. 비록 타국에 가서 힘들 것은 알지만 도저히 홀로 된 늙은 시어머니를 혼자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룻이 나오미를 따르며 한 말이 압권이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마님이 머무르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니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룻1:16)
흔히들 룻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라는 룻의 고백을 “기독교의 하나님이 최고라는 뜻이다, 시집가면 시집의 종교를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설교되고 있다. 그러나 룻의 이 고백은 힘없는 사람과 연대하는 룻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종교와 민족, 가족까지고 포기하면서 힘없고 어려운 사람의 처지에 함께 서겠다는 마음인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필요보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룻! 룻은 이웃의 필요에 연대하는 귀감이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역 땅에 온 룻의 자세는 베들레헴에 와서도 변함이 없다. 생존을 위해 이삭줍기에 나섰는데, 룻이 이삭줍기를 하러 나간 밭은 공교롭게도 먼 친척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이었다. 이 인연으로 보아스와 결혼을 해 아들을 낳고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었다. 룻이 아들을 낳자 마을 사람들이 노래한다.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주었으니,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줄 것입니다.”(룻4:15)
마을 여인들의 노래처럼 룻은 한결같은 자세로 나오미를 보살폈고 일곱 아들보다 더 나은 며느리였다.
2)역지사지 입장에서 겸손히 섬긴 룻
에니어그램 2번의 특색은 자신의 필요보다 남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고 돌보는 유형이라고 한다. 이 특성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사람이 룻이다. 룻은 젊은 자신의 필요보다도 늙고 홀로 된 나오미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고 돌보았다. 그래서 그 먼 길을 따라나섰다. 그것도 자기 종교를 포기하면서까지. 자기 종교를 포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필요를 알고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는 봉사를 넘어선다.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생명 다음에 최대한의 내어줌이다. 보통 2번은 남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무엇이나 잘 주고 잘 돕고, 봉사를 잘 한다고 한다. 건강한 2번은 감정이입이 잘 되어 공감을 잘 하고, 역지사지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도 남들 때문에 애끓지 않고 부드럽고 넉넉한 마음을 지닌다고 한다. 룻은 역지사지 입장에서 늙고 홀로 된 시어머니 나오미를 배려하고 섬겼다.
봉사와 협조자로서 에니어그램 2번의 덕목은 겸손이라고 한다. 룻의 행적을 보면 겸손이 배어있는 사람이다. 룻은 보아스가 친절히 대하자 룻은 이 친절에 대해 룻은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면서 “여종을 이렇게까지 대해주니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큰 힘을 얻습니다.” 시어머니를 돌보는 자신을 칭찬하며 베푸는 보아스에게 자신의 봉사는 내세우지 않고 보아스의 친절에 감사하며 겸손의 자세를 보여준다. 상대의 친절에 감사한 마음으로 응답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아첨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겸손이었기에 보아스를 감동시킨다. 만일 룻이 에니어그램 2번의 격정처럼 나오미를 섬기는데 자기희생을 내비치고 자신의 봉사와 섬김에 대해 자랑하는 마음으로 했다면 봉사를 받는 나오미는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 룻의 겸손한 자세는 나오미를 기죽지 않게 했고, 보아스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우리는 룻에게서 진정한 섬김과 봉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임을 배울 수 있다. 룻은 나오미를 떠날 때부터 마지막까지 한결같은 자세로 나오미를 섬긴다. 조건 없는 사랑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면서도 보상을 기대하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사랑받기 위해 섬기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서 행복을 느낀다. 2번의 덕목인 겸손한 봉사자가 어떤 것인지를 잘 드러내 보여준다.
룻기에는 룻 말고도 중요한 인물 두 사람이 있다. 룻기의 배경이 된 나오미와 룻의 남편이 된 보아스다. 이들 모두 협조자, 봉사자로서의 2번 유형인 사람들로 보인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면서 따라오려는 며느리들을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내려 마음먹었다. 남편도 없는 낯선 땅에서 힘들 며느리들의 입장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 룻이 한사코 따라오려 하자 그 마음을 받아 같이 베들레헴으로 간다. 일반적으로 2번은 남의 필요를 빨리 알고 돕는 대신 자기 자신의 필요는 잘 보지 못하는 탓에 자기가 한 일을 남에게 자랑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오미는 며느리들의 필요성도 헤아리지만 자기의 필요도 볼 줄 알기 때문에 룻의 간청을 받아들인다. 며느리 룻의 사랑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룻의 조력자로서의 성품을 보여준다. 룻의 행복을 위해 보아스와 결혼하도록 이끌었고 룻을 죽은 아들보다 더 아꼈다. 동네 사람들이 부른 “일곱 아들보다 났다.”는 노래는 실상은 나오미가 입버릇처럼 한 말이었을 것이다. 룻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임을 알고 이를 주선하는 나오미는 다른 사람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양육하는 조력자로서의 전형이다.
보아스 역시 마찬가지다. 2번 유형이 정보에 밝아 이에 잘 대처한다고 한다. 보아스는 자기 밭에 이삭을 주우러 온 룻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룻의 필요에 응답해 이삭 줍는 것을 허용함은 물론, 음식도 나누어 주고 남자일꾼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한다. 룻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그에 적절하게 대처를 하였다. 이방인 룻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보아스의 태도는 남들의 장점을 발견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며, 혹시라도 상대방이 빚진 감정을 느낄까봐 조심하는 성숙한 2번의 자세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오미의 뜻을 헤아려 당시의 형제가 죽으면 형수를 취해서 결혼해 생존과 대 이음을 보존케 하는 시형수제도의 틀을 확대해서 룻과 결혼을 한 보아스의 태도는 역시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남의 필요를 헤아릴 줄 아는 성숙한 2번의 귀감이 된다.
3)룻을 통해 나를 늘여다보다.
룻은 자기의 필요보다 나오미의 입장에서 나오미를 섬기되 겸손하게, 한결같이 섬겼다. 자기가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베풀고 봉사를 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나오미에게 봉사를 하였다. 에니어그램 2번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잘 느낀다고 하는데, 나는 2번은 아니지만 주변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잘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필요성을 알더라도 룻처럼 마음으로부터 기꺼이 응답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에 대해 순수한 관심도 없으며, 내 필요성 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성을 먼저 챙기지도 않는다. 어렸을 때 나는 남을 돕는 엄마를 따라 없는 가운데도 퍼주곤 했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저울질을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 때도 있지만 안타까움에서보다 당위성에서 그렇게 한다. 베푸는 삶이 내 일상도 아니며, 겸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한결같은 봉사란 어림도 없다. 나오미를 돌보기 위해 종교와 민족, 가족까지 포기한 룻이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룻을 닮는다는 것은 부담스럽다.
남편의 어머니께서 올해 107세 되셨다. 그동안 시누이가 어머니를 모셨는데 아들네 식구와 같이 살게 되어 어머니 모시는 일이 문제가 되었다. 전에 우리 집에서 일 년 반 동안 계셨는데 아들 내외가 일을 하니 집에 혼자 계실 수밖에 없었다. 심심하다고 다시 노인정이 있는 딸네 아파트로 가셨다. 솔직히 시누네 집으로 가신다고 하니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번 경우 시골 사시는 큰 형님네가 안모시면 내가 모시거나 노인요양원으로 모셔야 하는 판이다. 워낙 연세가 있으시니 한 일 년 정도가 고비인 것 같은데, 요양원으로 모시기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내 나이 70에 내가 이렇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내가 이게 웬일이냐? 이론적으로는 요양원으로 모시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남을 위해서 무얼 한다고 하면서 남편 혈육인 어머니를 요양원 보낸다고? 네가 그래도 되는 거냐?” 수많은 갈등이 있었다. 남편의 마음과 어머니의 입장을 헤아려 “정 안되면 우리가 모시자!”고 했다. 그렇게 결정을 했지만 고민도 되고 부담이 되었다. 다행히 시골 큰 형님이 모시기로 해서 어머니를 모셔다 드렸다. 우리 형님 나이도 79세다. 형님께 보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 힘들다고 80 다된 노인보고 107세 노인 모시라고 보내나……. 그런 마음이 들지만 진짜 드는 생각은 “다행이다!”다. 시어머니 모시기 위해 종교와 민족도 포기한 룻!, 닮을 수도 없지만 난 룻 안 닮을래.
2. 겸손히 예수를 섬겨 부활의 첫 증인의 영광을 얻은 막달라 마리아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의 인물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소개하면서 여성신학적으로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예수께 ‘기름 부은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전승이다. 전설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섬기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공로를 인정받아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로마의 제도를 때라 가부장화 되면서 막달라 마리아의 위치를 깎아내리기 위해 “죄 많은 여인”, “창녀”와 막달라 마리아를 결부시켰다고 한다. 요한복은에는 예수의 발에 기름 붓고 머리털로 닦은 여인의 이름을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밝히고 있다. 마가복음 14장의 예수께 기름 부은, 이름 없는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여성신학자 엘리자베스 슈슬러 피오렌자는 예수께 기름 부은 여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녀를 기념하여”라는 책을 펴내기까지 하였다. 복음이 전해질 때마다 이 여인의 한 일이 전해지리라“라는 이 여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 죄 많은 여인,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자라는 전제로 2번으로서의 막달라 마리아를 기술한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막달라 마리아의 행적
성서에 나타난 막달라 마리아의 기사는 누가복음 81-3절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때 제자들과 함께 동행한 여성들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예수님에 의해 일곱 귀신이 떨어져나간 여자였다. 재산도 있어서 다른 여자들과 함께 예수와 일행들을 섬겼다는 기록이다. 복음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따라 와 죽기까지 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교사역이 가능했던 것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서 자신을 희생해가며 예수를 섬긴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밑의 고난의 현장에서 예수의 최후에 함께 있었던 사람으로, 예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애타는 마음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무덤을 찾은 사람이다.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를 감격적으로 만난 첫 목격자요, 갈릴리로 가서 나를 만나라는 예수의 메시지를 환희에 차서 전한 부활의 증인이다. 4복음서에 이 이야기가 다 전해지고 있다.
2)막달라 마리아의 성숙성
룻이 개인적 차원에서 돌봄과 섬김, 봉사의 귀감이었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공적 영역에서 섬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후에는 막달라 마리아는 조건 없이 사랑과 봉사를 하는 성숙한 2번의 모습을 보여준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 고침을 받은 후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라 왔고, 섬겼으며, 십자가와 고난에 함께 했다. 예수의 고난 사건이나 부활사건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성들을 묘사할 때 언제나 등장하는 것이 “예수를 섬기려고 갈릴리에서 따라온 사람들이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성들 이름 맨 앞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다. 모든 성서가 빠짐없이 이 이야기를 기록했듯 막달라 마리아는 조건 없는 사랑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면서도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사심 없는 봉사자였다.
성숙한 2번 유형은 사심 없는 도움과 사랑을 실천하고 대의를 위해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순교자적 자세를 취한다고 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은 이야기는 이를 잘 드러내준다. 당시에 정치범으로 사형당한 이의 무덤을 찾는 자들 동족으로 잡혀서 처형당하는 위험이 있었다. 제자들은 잡힐까 무서워 다 도망가 숨어버렸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사랑하는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의 시체가 썩지 않도록 기름을 바르려고 무덤을 찾는다.
에니어그램 2번의 회개는 모든 나눔과 사랑이 스스로 선함을 일으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함께 나눈다는 자세로 봉사하는 것이다. 그래야 한결같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막달라 마리아가 당시 여자는 사람 축에도 끼지 않았던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한결같이 예수를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자기 병을 고쳐주신 은혜에 감격해서 그 은혜를 함께 나눈다는 마음에서 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은총을 나눈다는 마음 때문에 다른 여인들과 더불어 예수를 섬길 수 있었다.
에니어그램 2번의 함정이 어느 것에도 묶이지 않으려는 자유에의 욕망이 강한 것이라고 하는데,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는 이 자유에 대한 열망이 강점이 되어 예수 사역에 동참할 수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당시 일반적인 여성들의 삶과는 달리 병 고침을 받은 후 또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를 따랐다. 일곱 귀신 들렸을 때 가족에게 버림을 받기도 했겠지만 고침을 받은 후 가정에도 돌아가지 않고 예수를 따랐다. 자유에 대한 열망이 잘못되면 허영이나 야심에 들뜨기 쉬운데 막달라 마리아는 이 자유에의 열망을 섬김에다 쏟았다. 그 결과 예수를 따른 모든 여인들 이름 앞에 언제나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여성신학자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는 제자의 자격으로 ‘따르고, 섬기며, 함께 함’을 들었다. 끝까지 예수를 따르고 섬긴 훌륭한 제자,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우리는 남의 필요성을 알고 그 필요를 따라 봉사하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더불어 섬기는 성숙한 2번의 모습을 배우게 된다.
막달라 마리아의 한결같고 겸손한 섬김을 보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 생각났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3)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나를 들여다 보다.
같은 에니어그램 2번 유형이라 할지라도 룻 보다는 막달라 마리아를 더 좋아한다. 그건 막달라 마리아가 갖고 있는 사회성 때문이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는 1번 날개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라는 목적의식에 협조자로서의 자기 정체성과 결합시켜 사심 없이, 진지하게 봉사를 한 게 아닌가 생각 든다. 그래서 1번 날개를 쓰는 2번 들 중에 공직생활이나 종교지도자,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내가 2번 유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민중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이주여성운동을 할 때 그 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 것이긴 한데 봉사를 잘 하거나 좋아하는 성품이라서 한 것은 아니다. 목적의식을 갖고 작은 교회 또는 비영리민간단체에서 보수도 받지 않고 오랫동안 일해 왔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나는 막달라 마리아와 비슷한 점도 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처럼 사심 없이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내 이기적인 태도와 사심을 없애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주운동을 시작한 후 이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책임이 있다고 느껴 일에 나서지만 막달라 마리아처럼 한결같지도, 목숨을 걸고 섬기지도 못한다. 그건 하나님의 은총을 나눈다는 생각 보다는 의무감에서 하기 때문일 거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을 나눈다는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깊어야 하는데 그게 부족하다.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예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감격해서 사랑의 섬김을 한 막달라 마리아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언제쯤 나는 사랑에 의한 섬김을 할 수 있을까?
3. 사랑받는 제자에서 사랑하는 제자로 통전된 사도 요한
1)사도 요한의 행적
사도 요한은 그의 아버지 세배대가 선주로 있는 배에서 형 야고보와 함께 어부생활을 하다가 예수의 부름을 받고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예수님은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를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 부르셨다(막 3:17). 성격이 때로 불같았기 때문이다. 요한의 불같은 성격은 스승 예수를 배척하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번갯불로 쳐죽이기를 원했을 정도로 과격했다. 베드로와 형제 야고보와 함께 항상 예수의 옆에 있었고, 예수의 3대 제자라고 불릴 만큼 예수의 인정을 받은 제자였다. 또한 예수의 위대함을 알고 배를 버리고 예수를 쫓았으나 권력도 탐해서 예수께서 영광을 받을 때 오른 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해 동료들의 질시를 받기도 했다. 이건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제자 요한의 자취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요한의 흔적은 베드로와 함께 성전으로 가다가 앉은뱅이를 고친 행적이나 의회 앞에 끌려가 담대하게 맞선 이야기,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이야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타난 요한의 행적은 말은 주로 베드로가 하고 요한은 함께 하는 협조자로 나타난다.
요한에 대한 다른 자취는 요한복음에 근거한 것이다. 요한복음을 예수의 제자 요한이 썼다고 보고 거기에 나타난 ‘사랑받는 제자’라고 불리는 그 제자가 바로 요한이라는 학설 하에서 사도 요한에 대한 해석이 나온다. 그 ‘사랑받는 제자’는 예수가 재판받는 현장, 십자가의 관의 자리에 함께 했으며, 스승 예수로부터 새로운 모자관계를 위임받기도 한다. 또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의 빈 무덤을 찾았고,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본 것도 ‘사랑받는 제자’ 요한이었다. 이렇게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는 초대교회에서 예수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섬에 귀양을 가게 되는데 이곳에서 교회들에 보낸 편지 요한 1,2,3서에서 그는 ‘사랑받는 제자’에서 ‘사랑하라! “고 권유하는 사도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계시록도 요한이 썼다고 하는 학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 제자 요한의 격정
복음서에서 요한은 형제 야고보, 베드로와 더불어 언제나 예수의 주변에 있었고, 중요한 기적 사건현장에 있었다. 그래서 스승 예수의 3대 제자로 인정받고 있다. 요한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인 된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라는 부탁을 예수께 직접 받을 정도로 예수께 헌신했고, 인정을 받은, 예수의 협조자였고, 봉사자였다. 이렇게 제자들이 인정할 정도로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인 요한에게도 격정이 있는데 그건 자랑이다. 협조자, 봉사자로서 2번의 격정은 남의 필요를 돕는데서 생기는 자만심과 우월감이며 그것은 자랑으로 표현된다. 요한 역시 자기가 예수님을 위해 헌신했고 그 결과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사랑받는 결과로서 대가를 기대해 형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을 찾아가 이렇게 요구한다.
“ 선생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영광을 받을 때 하나는 오른 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노골적으로 지위와 권력을 요구한다. 예수께 봉사의 대가를 요구한 것인데, 힘에 민감한 2번이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이런 요한의 요구에 대해 예수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가르치셨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2번 유형의 격정은 자랑과 그에 응분한 보상이다. 자기가 봉사한 만큼 자랑스러워야 하며, 그 봉사나 사랑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고 느낄 경우 공격적이고 분노한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자랑하거나 과시하는 마음으로 우월감을 느끼며 자만에 빠지기도 한다. 남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는 욕구에서 봉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자기 봉사에 인정을 받지 못할 경우, 즉 자기가 봉사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없으면 공격적으로 변한다. 다른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좋은데, 자기 봉사를 내세워 남을 지배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자 “주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누가 9:51-52) 라는 말을 하다가 예수께 꾸짖음을 당한다. 여기서 보듯이 2번은 자기가 한만큼 대가를 기대하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의 사랑이나 봉사가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된다고 생각할 때 분노의 공격성이 표출된다.
3)사도 요한의 성숙성
이렇게 예수의 필요를 알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께 헌신한 요한이지만 때때로 격정을 일으켜 자기의 헌신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거나 자신들을 환영하지 않는 상대에 대해 불벼락 내리기를 바라는 분노가 끓어오른다. 그러던 요한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성령강림 사건이 있은 후 성숙한 사람이 된다. 에니어그램 2번 유형의 사람은 사심 없이 이타적인 사람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갖고 공감하며 돌보며 양육하는 조력가가 된다. 베드로와 함께 복음을 전하거나 잡혀서 의회 앞에 설 때, 앉은뱅이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는 자리에서도 말을 하는 사람은 베드로였고, 요한은 그 옆에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겸손히 협조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요한의 성숙성은 요한복음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 로서 알려져 있고 또 스스로 그런 정체성을 가진 요한은 스승 예수를 따르면서 행동변화를 일으킨다. 천둥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예수께 받을 정도로 과격하던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 고난의 자리에도 함께 하며, 십자가 밑에서 예수께로부터 어머니를 부탁받고 이후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셨을 정도로 배려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사랑받는 제자‘에 만족하고 연연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령강림 후 그는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는 제자‘에서 ’조건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1서 7-12) “.라고 편지에 쓸 정도로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그래서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한다.
4)사도 요한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다.
에니어그램 2번 유형은 다른 사람의 필요성을 알고 그에 응답해 잘 돕고 잘 베풀며 봉사를 잘한다. 누구를 보살피면서 존재감을 느끼지 않는 나는 2번의 성품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니어그램 2번의 격정은 많이 갖고 있다. 요한처럼 누구를 위해 무엇인가 했으면 그에 대한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나나 내가 속한 그룹이나 단체가 베푼 선한 행동이 인정을 못 받거나 감사하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속이 언짢다. 그렇다고 내 선의가 거부당한다고 해서 요한처럼 벼락이나 맞아라! 하는 분노에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기분 나쁘지만 그냥 무시해버린다. 그건 내가 2번이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에니어그램 2번의 다른 격정은 갖고 있다. 자기가 한 봉사에 대한 자만심과 우월감 때문에 지위나 권력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내가 한 봉사를 통해 칭찬을 듣는다든가 상을 받는 등 명예가 생기면 내색은 안하지만 은근히 기분 좋다. 요한이 갖고 있던 격정인 봉사를 통한 자랑, 교만을 내안에서 발견한다. 사랑하는 사람보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좋아한다. 요한이 성령을 통해서 사랑받는 제자에서 사랑하는 사도로 바뀐 것처럼 내 안에서 진정한 사랑이 생기고 그를 통해서 겸손히 봉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간구한다. 성령이여, 오소서, 나를 도우소서!
4. 봉사의 포로에서 은총을 함께 나누는 봉사자로 변한 마르다
1)마르다의 행적
마르다는 베다니에서 나사로라는 오라버니와 여동생 마리아와 함께 살았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 때마다 들리는 집이었다. 예수님이 이 집에 오시게 된 배경은 마르다 때문이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자기 마을에 들리자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모셔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예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할 뿐 마르다를 돕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항의하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많은 일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었다(누가복음 10:38-42).
이후 마르다의 행적은 요한복음 11장의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야기에 다시 나타난다. 나사로가 죽어 예수가 베다니를 찾았을 때 마르다가 마중을 나가서 예수와 대화를 하였다. 이 만남에서 예수와 마르다가 한 신앙고백은 기독교전통에서 장례식의 중요한 설교내용이 되고 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하신 예수의 물음에 마르다가 대답했다. “예, 주님!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습니다.”
2)마르다의 격정
에니어그램 2번 유형은 협조형으로서 봉사자 기질이 강하다고 한다. 2번의 함정은 봉사다. 사랑받지 못할까 봐 지나치게 선의적인 사람이 되려하고 가만히 있으면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봉사라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또한 2번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봉사를 필요하게끔 하는 힘이 강하고 격정에 사로잡히면 사람들을 소유하려고 한다. 이들은 봉사 정신이 넘치는 리더십이 있으나 주변 사람들을 사랑과 봉사의 포로가 되게 하는 경향도 강하다. 제안을 잘하고 충고도 잘하고 자존심도 강하다. 그 전형적 모습을 마르다에게서 볼 수 있다.
마르다 역시 마을을 지나는 예수님이 쉬실 곳이 필요한 줄 알고 자기 집에 초대할 정도로 봉 자신의 봉사가 필요한 상황을 만드는데 탁월한 봉사의 리더십이 있다. 문제는 봉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는 것이다. 봉사자로서의 에니어그램 2번이 스트레스가 쌓이면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방관념에 빠지게 되며 주제넘게 간섭하고 충고와 제안을 하는 간섭자가 된다고 한다. 마르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동생 마리아가 자기를 도와 자기가 하는 봉사의 포로가 되어야 하는데 돕지 않으니 화가 난다. 정상적이면 마리아를 조용히 불러 도와달라고 해야 하는데 그 과녁이 된 것은 예수님이다. 예수님께 불평하며 충고한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주라고 동생에게 말씀해주십시오.” 마르다가 이렇게 예수께 불평 섞인 제안을 한 것은 자기 봉사를 과시하려는 마음도 있지만, 그보다는 일이 힘들어서라기보다 자기를 제쳐두고 마리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예수님에게 화가 난 것이다. 자신이 예수님을 모셨는데 자신의 봉사는 인정하지 않고 마리아만 편애한다고 생각해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쳐 공격적이 된다. 마리아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혼자 계시면 심심하니까 손님 접대 측면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자기보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께 뭐라 하니 당황했을 것이다. 마르다는 봉사하는 자신보다 마리아가 더 중요하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 같아서 화가 나서 주제넘게 간섭하며 예수께 충고한다. 자신이 관심 갖는 사람이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까 봐 두려워해 다른 사람에게 간섭하는 2번의 모습이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은 너무 여러 가지 하려고 염려하지 말고 한두 가지로 족하다, 라는 것이다. 사실 봉사는 자기중심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필요에 응할 때 진정한 봉사가 된다. 당시 상황에서는 대화를 나누는 게 더 중요한 봉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3)성숙해진 마르다
이렇게 사랑받기 위한 봉사라는 함정에 빠져 있든 마르다가 요한복음에는 매우 성숙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자 예수께서 이 집을 방문한다. 정보를 듣고 빨리 대처하는 2번의 유형이 그렇듯이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맞으러갔다. 오빠의 죽음에 애통해하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물으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이 물음에 마르다가 대답했다. “예, 주님!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습니다.” 부활신앙까지 고백한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보다 우수한 내용이지만 가부장적 교회역사는 마르다의 고백이 아니라 베드로의 고백을 교회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였다. 아무튼 이렇게 마르다가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첫 만남 이후 대화의 중요성을 깨달은 마르다가 봉사일변도에서 말씀을 경청하는 자세로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이런 신앙고백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런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마르다는 집에 가서 마리아를 예수께 보낸다. 성서에는 예수님이 마리아를 부르신다는 말이 없다. “선생님이 너를 부르신다. “ 이 말은 마르다가 예수님이 마리아를 보고 싶어 할 것을 추측하고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다. 많은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에서 봉사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달은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더 이상 경쟁상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어 갖는 자매일 뿐이다.”마리아가 좋은 것을 택했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봉사란 자존심과 우월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라는 미명아래 다른 사람을 휘어잡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마르다! 이후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남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함께 나눈다는 겸손한 자세로 해야 함을 깨우친 마르다 이었기에 그토록 위대한 신앙고백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4)마르다로부터 나를 들여다보다.
마르다는 봉사를 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 봉사가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같으면 화나 난다. 내가 마르다라도 화를 낼 것이다. 더욱이 특히 누가 같이 있는데 나만 봉사해야 할 경우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경우 나는 당연히 직접 마리아에게 말할 것이다. “나 혼자 힘드니까 나 좀 도와줄래?” 손님이 있을 경우 조용히 불러서 말할 것이고.
여기서 마르다의 격정을 통해 나를 들여다봐야 하는데 나는 마르다가 너무 이해가 잘 된다. 비록 자기가 모셔왔지만 같이 일을 거들지 않고 예수님 앞에 앉아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마리아가 밉상스럽다. 문제는 화를 내는 대상과 방법이 틀렸다. 내가 관여한 단체에서 종종 음식을 직접 해먹으며 모임을 갖는 때가 있다. 이런 때 꼭 음식을 같이 안 만들고 수다만 떠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나도 마르다처럼 불평을 하는데 그 사람을 불러내어 말한다. “같이 좀 하시지요!” 손님이 혼자 있을 경우는, 거의 그런 일은 없는데 그 손님과 이야기할 사람은 남겨놓는다. 손님 심심할 테니까.
나도 가끔 집에 손님 대접을 해야 할 때가 있는데 혼자 음식준비를 하려면 짜증나고 화가 난다. 그래서 가급적 손님을 집으로 청하지 않는다, 젊을 때는 많은 손님을 청하고 그 일도 재미있었는데 나이 들면서 점점 그런 일이 싫어진다. 2번의 특색이 짝을 짓거나 패거리를 짓는다고 하는데, 봉사란 건 정말 혼자하면 재미없다. 나도 봉사 비슷한 일을 하려면 혼자 하지 않고 꼭 누군가를 동반한다. 이건 전형적인 2번 모습이라고는 하는데, 내가 같이 하자고 권유하는 것이 강압적으로 하는 것은 아닌데, 상대방은 그게 좋은 일이니까 거절을 못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내 경우도 이런 부탁을 받을 때가 있는데 별일 없으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따라나선다. 때로는 내가 거절하면 상대방이 상처받을까 봐 동참하기도 하고.
모든 사람이 에니어그램 2번의 요소는 다소간 지니고 있을 터인데 봉사가 스트레스가 되지 않도록 나를 내려놓는 게 필요하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에서 교회여성들 간에 지속되는 논쟁이 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역할 론이다. 교회에서 여신도의 역할은 주로 봉사하는 일인데, 이 일을 마르다의 일이라고 한다. 말씀을 듣는 일은 마리아의 일이라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언제나 갈등상태에 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여성들의 배우는 일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너무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지 말고 한 가지만 하고 말씀 듣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데 있다. 교회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역할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성과 비상성의 문제, 상황에 따른 조정의 문제다.
봉사자 기질이 강한 에니어그램 2번 유형은 위기상황에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공격적이고 조작적이며,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강해질 수 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봉사를 인정을 받기 위한 도구나 무기로 삼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빌립보 2장에서처럼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하고 오신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야 하는데, 이게 어렵다. 그러니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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