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결혼이주여성의 이야기
" 힘들이요. 그러나 이겨내고 새로운 꿈을 꾸어야지요."
한국염/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1. 국제결혼, 새로운 도전 앞에서
국제결혼 중개업의 소개를 통해서 한국 사람과 결혼하다.
내 이름은 난이다. 나는 베트남 여성이다. 20살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해서 한국에 온지 어연 10년이 되어간다. 본디 한국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내 꿈은 아니었다. 나는 유치원 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한국남자와 결혼해서 한국에 시집가라고 했다. 듣고 보니 이웃에 엄마보고 언니라고 부르는, 그래서 나도 그 이웃집 아주머니를 이모라고 부르는데, 그 이모가 엄마에게 와서 나를 한국에 시집보내라고 권했다고 한다. “한국이 잘 사니까 난을 한국에 시집보내면 편하게 지낼 수 있고, 또 난의 남편이 다달이 얼마의 돈을 친정에 보내준다고 하니 얼마냐 좋으냐, 그러니 난을 한국에 시집보내라!”. 엄마는 그 이모의 말을 듣고 보니 딸이 고생안하고 편히 살 수 있다니까 우선 마음이 동하고, 더욱이 집에 돈도 보내줄 수 있다 하니 딸 덕을 볼 수 있겠다 싶어 허락을 했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우리 마을에서는 부모들이 혼처를 정하는 경우가 많은 터라 엄마는 그러마고 약속을 하고 계약금 조로 300달라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싫다고 했다. 그때 나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남자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싫다고 하자 엄마는 “그럼 계약이 파기되면 받은 돈의 3배를 물어야 하는데, 우리 형편에 900달라가 어디 있느냐?” 고 난감해 했다. 왜 내 허락 없이 그런 액속을 했느냐고 울면서 항의를 했지만, 그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옆집 이모가 마담 뚜 역할을 하는 베트남 측 중개인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옆집 이모를 따라 호치민으로 왔다. 호치민에 와서 어느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어느 날 홀에 모이라고 해서 갔더니 나와 같은 여성이 여러 명 있었다. 한국 남자들이 들어와 우리를 훑어보고는 각자가 마음에 드는 여성을 선택하였다. 지금의 남편이 나를 선택해서 그날로 결혼식과 잔치를 하고 영사관에 혼인신고를 하는 것으로 내 혼인절차는 끝났다. 신혼여행이라는 이름하에 합방을 한 다음 날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한 달 후 남편의 초청장이 도착해 그것을 갖고 영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아 한국 행 비행기에 올랐다.
국제결혼 중개업 소개에 의한 결혼과정
한국의 국제결혼은 일반적으로 세 경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하나는 나처럼 국제결혼중개업을 통해서 하는 것인데, 이 경우가 대부분이다. 두 번 째는 개인 부로커를 통하는 것인데, 놀랍게도 국제결혼 중개업을 통해서 결혼한 가정이 아내를 통해서 아내 마을의 여성들과 한국 남성들을 소개해주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을 통해서 결혼하는 여성들은 자기가 중개업을 통한 것이 아니라 아는 사람을 통해서 결혼했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허긴 나도 처음에는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는가를 묻는 물음에 ‘아는 사람을 통해서’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우리 옆집 사는 동네 이모가 “마담‘이었는지를 몰랐으니까. 그리고 종교단체를 통한 결혼인데, 이름이 길어서 자세히는 모르겠고 흔히 통일교라고 한다. 그런데 나처럼 국제결혼중개업을 통해서 결혼하는 이들의 경우 남편들이 국제결혼중개업에 결혼신청을 하면 어느날 그 업체에 신청한 몇 사람들이 중개업의 인솔하에 원하는 나라를 간다. 가서 미리 그 나라에서 알선된 여성들이 있는 장소에서 여성들을 보고 마음에 드는 여성들을 선택해서 통역을 통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결혼할 대상을 결정을 하면 그날로 결혼식을 한다. 그리고 거의 합방을 하는 것이 절차로 되어있다. 이런 과정을 마치고 남성이 한국에 와서 초청장을 내면 부인은 방문비자로 입국해서 석 달 안에 외국인등록신고를 해서 외국인등록증을 받게 된다. 이때 비자는 가족동거비자 F2-1이라는 것을 받는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국제결혼중개업이 내건 현수막이나 결혼중개업 광고에서 여성들을 ”노인 가능, 숫처녀, 도망가지 않음, 남편에게 절대 순종적, 몸매가 환상적임, 보모모시기 좋아함’ 등의 광고를 내걸고 상품취급해서 여성단체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광고를 내걸고 중개업을 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일어나는 국제결혼을 인신매매라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이런 현수막이나 광고를 하면 “국제결혼중개업 관리법”에 의하여 중개업이 처벌받도록 되어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돈을 목적으로 하는 중개업이라고 해도 사람을 존중하지 않고 물건 취급하는 중개업은 뿌리룰 뽑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시아 여러 나라의 결혼풍습
베트남에서는 결혼해서 가족을 두는 것을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일로 생각한다. 최근에는 도시에서 연애결혼이 증가하고 있지만 농촌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중매와 선을 보아서 결혼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개업이란 그냥 중매하는 사람들로 받아들일 뿐이다. 또 하나의 결혼풍습은 결혼할 때 결혼비용을 주로 남자가 대는 문화가 있고, 남자 측에서 경제적인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는 문화가 남아 있다. 문화가 이렇다보니 “너하고 결혼하느라 돈 많이 들었다.”며 문제 삼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국어 교실에서 여성결혼이민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대부분의 나라가 이런 문화를 갖고 있었다. 막상 한국에 와보니 국제결혼중개업의 문제가 너무 심각해서 놀랐고, 결혼하느라 들은 돈 때문에 갈등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2. 어려운 한국시집살이
내 코리안 드림은 환상이었다.
결혼한 다음날부터 원인이야 어쨌던 이미 결혼했으니 열심히 잘 살아보겠다고 결심을 했다. 나름대로 남편 인상도 괜찮았고 또 생활도 넉넉하다 했으니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다부진 꿈을 꾸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남편이 꽃을 들고 마중을 나왔다. 남편을 만나니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함께 시댁에 들어가니 시댁 어른들이 나를 맞아주셨다. 나를 보고 웃기에 따라 웃었다. 한편에서는 두려운 마음이 있었지만, 잘 지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하룻밤을 지내고나서부터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내 코리안 드림은 그야말로 꿈이었을 뿐이다. 물론 내가 한국 드라마에서 소개된 그런 호화로운 생활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드라마를 통해 어느 정도 환상을 품었던 것은 사실이다. 아침에 본 우리 집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고, 방 두 칸에 화장실과 밥을 해먹는 거실 딸린 부엌이 있었다. 나중에 보니 우리 집은 다른 결혼이주여성들의 집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문제는 남편의 직업이었다. 베트남에서 들을 때는 자영업으로 동네에서 슈퍼마켓을 한다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 슈퍼마켓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고 그나마도 남편 것이 아니라 시 아주버님 것이었다. 남편은 그 슈퍼마켓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왜 속였느냐고 했더니 “솔직하게 말하면 네가 결혼하겠느냐? 중개업체에서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다. 그래도 형님네 슈퍼마켓이니 전혀 거짓말도 아니지 않느냐?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서 너 고생한 시키겠으니 염려마라!“ 라고 말했다. 그 말이 고맙고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할 수 도 없고, 또 그렇게 말해준 게 고마워서 속인 것을 용서해주었다. 그러나 내가 품은 꿈이 환상이었음을 깨달았기에 그 환상을 깨야 하는 아픔도 있었다. 후에 안 사실인데 여성가족부가 한 ‘결혼이민자 실태조사’에 의하면 약 40%의 결혼이주여성들이 막상 한국에 와보니 자기가 들은 정보와 달랐다고, 그중에서도 경제적인 것과 직업이 다른 것이 많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건 사기인데 그래도 그렇게 해서라도 나하고 결혼하고 싶었나보다 하고 참고 넘어가는 여성들이 많은 것 같다. 어떤 결혼이민자들은 사실과 다르지 않느냐, 나를 속였다 하고 더 이상 혼인생활 못하겠다고 이혼을 요구하거나 막무가내로 집을 나가는 여성들도 있다. 이들을 보면 운명으로 알고 참고 살았던 나와 달리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렇게 속여서 결혼했으니 함께 살 수 없다고 집을 나올 경우나 이혼을 할 경우 한국에서 체류할 수 없다. 이혼은 할 수 있는데 그런 이유로 이혼할 경우 체류허가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귀국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참 난처한 일이다. 다행히도 국제결혼중개업 관리법이 만들어지고 거짓정보를 제공하면 안된다고 했다는데, 결혼이민자의 일생이 걸린 문제이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돈의 가치가 너무 달랐다.
그런데 나같은 여성결혼이민자가 미처 생각 못한 일이 하나있다. 그것은 한국의 물가와 돈의 가치를 너무 몰랐다는 것이다. 남편이 처음 1백오십만원을 번다고 했을 때, 나는 우리 베트남 돈으로 계산해보고 매우 많이 버는 줄 알았다. 한국의 물가와 비교해서 그 돈이 적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바탕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였다. 왜 약속대로 친정에 돈을 안보내주느냐고 했더니 남편이 보낼 돈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백오십만원 씩이나 벌면서 왜 약속을 안지키느냐고 싸웠다. 말은 안통하지 설명할 길 없는 남편은 답답한 나머지 결혼이주여성의 문제를 상담하는 센터에 도움을 청했다. 상담선생님의 말을 베트남 통역을 통해서야 남편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친정에 부칠 돈 때문에 남편과 갈등을 일으키다.
상담원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로는 많은 이주여성들이 친정에 돈을 부치는 문제로 남편 또는 시집 식구와 갈등을 한다고 한다. 실제로 직업이 안정적이지 못하고 돈을 적게 버는 경우인데 돈의 가치와 경제상황을 몰라 싸움을 하고,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남편이 거짓말을 한 셈이 되니 남편이 미워 싸운다고 한다. 나는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베트남도 그렇지만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한국과 달리 딸도 부모를 돌볼 책임이 있다. 결혼했다고 해서 이 책임이 면해지는 것이 아니다.
딸의 입장에서 친정에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것을 기대하고 결혼한 경우도 많은데 막상 한국 남편의 실정은 친정을 도울 형편이 못되니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화가 나는 경우는 남편이 마음만 먹으면 친정을 도와줄 수 있는데 나 몰라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 돈 때문에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어느 정도 기대하는 경우도 있다. 경제력이 되면서도 안하는 친정을 배려해주지 않는 남편을 보면 얼마나 속상할까? 아무튼 상담선생님의 설명을 통해서 집안의 경제 사정을 알고 나니 남편의 입장이 이해되기는 하는데 속은 더 답답해졌다. 사정을 모르고 딸이 돈 보내기만 기다릴 엄마에게 어떻게 해야 하지 입장만 더 어렵게 되었다. 결국 내가 돈을 버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다.
3. 한국생활 적응, 쉬운 것이 아니었다.
어려운 한국어와 한국생활 익히기
한국에 와서 결혼해 살면서 어려운 것은 비단 돈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보다 어려운 것은 한국생활을 익히는 것이었다. 한국에 처음 와서 한국어를 모르니까 미칠 것만 같았다. 식구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까 답답했고, 누군가의 말처럼 창살없는 감옥에서 24시간 남편과 남편 식구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살려니까 감옥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말을 할 수가 없고, 음식은 안맞고, 처음에는 라면만 먹었다. 어느날 남편을 따라가 바바나를 보고는 두 덩어리를 사다가 순식간에 먹고 체한 적도 있다. 남편이 그때 놀랐는지 그후부터 가끔 시장에 데려가곤 했지만 말을 못하니 벙어리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한국어 공부를 하기로 했다. 지금은 여기저기서 다문화 가정 결혼이민자 지원한다고 하지만 내가 초창기 결혼했을 때는 한국어를 배울만한 곳도 변변히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남편에게 부탁해서 한국어 교재를 사다가 혼자 공부를 하였다. 베트남어 사전으로 뜻을 익혔다. 문법을 모르는 것은 남편에게 물어가며 공부했다. 내 경우 이웃에 사는 시어머니가 도움이 되었다. 시어머니께서 내가 부엌일을 너무 모르니까 매일 오셔서 부엌일을 가르쳐주셨다. 한편으로는 내가 한국어 공부를 스스로 하려고 하는 것이 대견했는지 매일 부엌일을 가르치면서 그걸 내가 익힐 수 있을 때까지 가르쳐주셨다.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게 답답하신지 야단도 많이 치셨다. 그럴 때마다 한쪽에서는 감사한 마음이 들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참다못한 어느 날 시어머니에게 말대꾸를 하였다. “어머니, 오빠는 6년 동안이나 영어를 배웠는데도 영어 잘 못해요.“ 물론 제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띄엄띄엄 종합해서 하면 그런 뜻으로 했다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내 말대답에 기가 막히신지 눈을 크게 뜨시더니, ”허긴 남의 나라 말 배우는게 어디 쉽겠냐? 그저 내 욕심이지“. 하고 혀를 차셨다. 이렇게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어가며 배우다보니 내 한국어는 다른 여성들 보다 빨리 는 편이다.
한국어교실에서 고향 사람들을 만나 스트레스를 폴다
그러다가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곳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다니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곳에서 한국어를 배운다는 유익함도 있지만, 우리 베트남 여성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이 더 컸다. 나는 다른 여성들보다 비교적 한국어를 많이 익혔기 때문에 새내기들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가르치면서 복습이 되어서 좋았다. 그곳에서 한국어를 몰라 어려움을 당했던 경험들을 나누며 한참을 웃었다. 대표님이 독일에서 공부할 때 독일어를 몰라 얼굴이 그려있기에 로숀인줄 알고 사서 썼는데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 얼굴 닦는 비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우리 사정 아시겠네요?“하고 함께 웃었다. 또 가슴 아픈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이주노동자 아기의 엄마가 한국어를 몰라 병원에서 우유를 하루 60cc씩 세 시간마다 먹이라는 것을 하루에 세 번 먹이라는 것으로 알고 먹여서 아이가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남의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 언어를 모를 때 생기는 어려움에 대해서 같이 실감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중요한 한국어를 남편이 허락하지 않아 센터에 못나오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까 매우 가슴 아프고 속상하다. 센터에 가면 자국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게 되어 가출할 위험이 있다고 못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남편이 아내 나라 말을 배워서 대화를 나눌 턱도 없고, 그러면 그 여성은 누구랑 어떻게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가? 정신병 안 걸리는 게 이상하지....그 여성들은 한국어를 어떻게 배우는가? 스스로 혼자서? 내가 혼자 한국어를 해보았는데 그게 보통 힘든게 아니다. 독한 마음을 먹지 않으면 힘들다. 그렇게 자기 아내 한국어도 못 배우게 외출도 시키지 않을 량이면 왜 결혼은 했을까? 감옥이 따로 있나? 그게 감옥이지, 하는 생각이 든다. 대구 옆에 있는 경산이라는 곳에서 한 베트남 여성이 결혼해서 한국에 온지 한 달 만에 12층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참 안타까왔다.
생존의 문제인 한국어, 배우고 싶다고 다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
우리처럼 외국인으로 한국에 살면서 한국어를 모른다는 것은 답답함을 넘어서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이민자는 누구나 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민자의 이 열망은 여러 가지 장애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남편이 반대하는 경우는 비정상적이라 치더라도 임신 또는 출산을 하면 한국어를 배우는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임신을 하는 경우는 거리가 멀 경우 힘들다. 더욱이 출산을 하면 아기를 기르느라 한국어를 배우기가 엄청 어렵게 된다. 그래서 흔히 결혼 초기에 아기를 일찍 낳는 결혼이민자의 경우 한국어 실력이 저조할 수밖에 없다. 한편 농어촌으로 시집 간 친구들의 경우를 보면 한국어 배우기가 힘들다고 한다. 농어촌에 집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데, 한국어 배우는 곳은 군단위나 읍단위로 집중되어 있다. 다행이 정부에서 방문도우미를 통해 가정방문을 해서 한국어 교육을 시켜준다고 하는데, 그 경우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보니, 또 농번기가 되면 일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어 배우기가 힘들다고 한다.
최근에 정부가 사회통합이수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한국국적을 취득하려는 외국인은 정부가 정해놓은 200시간의 한국어 수업과 한국사회 이해를 수준에 맞추어 이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 결혼이민자들도 이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정부가 볼 때 우리 여성결혼이민자들의 한국어 실력 수준이 낮다고 평가했기 때문인 것 같다. 듣기 평가 점수가 40%도 채 안되었다든가? 그런데 결혼이민자치고 한국어를 배우기 싫어서 안 배우는가? 여건이 안되니까 못배울 뿐이다. 다행히 우리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는 이주단체와 여성단체들이 항의를 해서 결혼이민자들의 경우 의무제가 아니라 참여하는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제도로 변경되었다. 그나저나 이 제도에 참여하면 국적을 심사하는 기간을 단축해 준다고 하니 빨리 국적을 얻고 싶은 결혼이민자들의 경우 참여하는 사람들이 생기겠다. 나야 이미 국적을 취득했으니까 상관없지만.
4. 한국에 시집왔다고 무조건 한국문화 따라야 하나?
문화 차이로 인한 갈등
그런데 한국어가 늘면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말이 느니까 가족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좋은데, 가족들과의 의견에 다른 것이 있으면 자연히 내 의견을 말하게 된다. 거기다 우리 베트남 사람들은 누구와 말을 할 때 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을 하는 게 예의로 되어있다. 그래서 자연히 시어른들과 이야기를 할 때도 눈을 똑바로 뜨고 내 의견을 말하게 된다. 그러면 시집 식구들은 나를 ‘버릇이 없다’고 나무란다. 이건 한 예인데, 문화차이로 야단을 맞을 때마다 여간 답답한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 베트남 문화를 이야기하면 “넌 한국에 시집왔으니까 한국문화를 따라야 한다.”고 모두들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고쳐야지 하면서 한편에서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말은 그렇다손 치고 왜 문화는 나만 고쳐야 할까? 고치라고만 하지 말고 문화가 달라서 그런가보다 하고 인정해주면 안되나?” 하고 반발심이 생긴다.
남편들의 아내나라 말과 문화 배우기
내가 다니고 있는 이주여성단체에서는 ‘배우자 나라 말 배우기’ 수업이 있어 남편들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친다. 베트남 출신 여성들이 많기 때문에 베트남 어를 택했다는데, 이 정보를 들었을 때 매우 기뻤다. 자기 아내와 좀더 대화를 잘 하기 위해 아내 나라 말을 배우는 남편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감동을 받았다. 남편이 그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한 친구의 경우 자기를 위해서 남편이 그 수업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고마워서 남편의 웬만한 불만을 참고 견딘다고 했다. 실제로 베트남어 교육에 참여하면서 남편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남의 나라 말을 배우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된 남편이 아내가 한국어를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이 생각보다 빨리 늘지 않는 것의 사정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언어를 배우면서 베트남 문화도 배우게 되어 자연스럽게 아내 나라의 이해도가 높아지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내에게 묻는 과정을 통해 둘 사이에 대화가 많아졌다고 한다. 남편보고 이런 사실을 이야기 하며 베트남어 교실에 참여하라고 여러번 권했는데 시간이 없다는 이유를 대며 참여하지 않고 있다. 또 시간이 없기도 하다.
상대의 문화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 존중하는 것이다.
문화차이라는 것이 상대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갈등을 해결한다는 게 여간 힘든게 아니다. 한 캄보디아 여성의 경우는 베게 밑에 조그만 칼을 넣어두고 자는 캄보디아의 습관에 따라 칼을 넣어두었다가 가족들이 자기들을 죽일지 모른다고 오해해서 이혼할 뻔 한경우도 있다. 몽골에서 온 무기의 경우 처음에 문화차이로 이혼할 뻔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몽골은 유목민의 전통에 따라 주로 고기와 유제품을 먹고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하루에 한 번은 고기를 먹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반면에 바다가 없기 때문에 물고기는 안 먹는다. 그런데 처음 시집와서 밥을 먹는데 생선과 김을 구어놓아서 고기반찬을 달라고 했더니, “가나한 나라에서 와가지고 왠 고기타령이냐?”고 시댁 식구들이 말하는 바람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고 한다. 태국에서 온 추안은 처음 한국에 와서 음식 만드는 것 때문에 남편과 많이 싸웠다고 한다. 태국에서는 금방 요리한 음식을 싸게 파는 식당이 많아 집에서 음식 만드는 것은 극히 드물고, 퇴근 후에 힘들게 요리하는 대신에 음식을 사와서 함께 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이 꼬박꼬박 저녁식사를 챙기니까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지난 2009년 봄에 문제가 되었던 초은이의 경우도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배려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사건이라고 본다. 캄보디아나 태국에서는 머리에 손을 대는 것을 금기시하는 문화다. 그런데 초은의 남편은 툭하면 초은의 머리를 쳤다. 싫으니까 하지말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남편은 그 행동을 그치지 않았다. 임심으로 신경이 예민해있던 초은이 남편이 또 머리를 치자 참고 있던 신경이 뚝하고 끊어지면서 칼로 남편을 찌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 가족들은 결혼이민자의 문화를 이해할 생각을 안 하고 무조건 결혼이민자에게 한국문화를 따를 것을 강요한다. 이것은 아무리 우리가 결혼해서 한국에 와서 살기 때문이라고 해도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가 서로 상대의 문화를 이래하고 배려해야 서로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며느리 문화를 인정해주는 사람도 있다. 역시 무기에게 들은 이야기다. 한번은 시아버지가 검지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는 바람에 시아버지가 자기를 죽이겠다고 하는 줄 알고 기겁을 했다고 한다. 몽골에서는 검지손가락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은 상대를 죽이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며느리가 울고불고 하는 바람에 놀란 시아버지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며느리에게 배워 손바닥으로 물건을 가리켰다고 한다. 그후부터 원래 몽골 전통이 어른을 존경하는 것이지만 시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단다.
아시아 여성의 가족문화는 한국보다 평등하다.
내가 한국 결혼생활에서 느끼는 것은 한국의 가족문화는 너무 불평등한 것 같다. 한국은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다. 직장이 있든 없든 살림은 여자가 하고, 아이 기르는 책임도 여자에게 있다. 또 남편과 아내는 평등하지 않은 것 같다. 베트남의 경우 기본적으로 남자나 여자나 다 일을 하는 구조다. 한국처럼 가정에서 남자의 역할, 여자의 역할이 따로 있지 않고 집안 식구 모두 가사 일을 나누어서 한다. 아들이든 딸이든 모두 집안일을 돕도록 되어 있고, 그래서 여자가 집안일이나 아이 기르는 문제로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는 적다. 무기의 이야기를 들으면 몽골도 비슷하다고 한다. 남녀평등의식이 있어서 맞벌이 부부들 경우 가사 일을 똑같이 나누어서 하는 편이라고 한다. 시집과 친정을 구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한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한국처럼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문제가 아니라 사위와 장인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중국에 관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중국에서도 남성이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아이를 돌보는 것을 모았다. 태국에서는 남편과 아내는 가정의 두 기둥을 의미한다고 한다. 태국남성은 가사 분담도 자연스럽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해보니 남편은 집안의 왕 같아 남편이 집안일을 도와 주면 시집 식구들이 창피해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필리핀 출신 자스민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성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필리핀에서는 이게 가능헤 어머니 성을 따르거나 이름 중간에 어머니 이름을 넣는다고 한다. 자기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집안 살림은 아버지가 했다고 한다. 필리핀에서는 딸의 위치가 매우 중요해서 부모가 늙으면 아들보다 딸이 보호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특히 맏딸은 결혼을 해도 친정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한다. 맏딸인 자스민은 딸로서 필리핀에 있는 부모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해 항상 미안하다고 말한다. 딸의 위치가 아들보다 중요한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저 딸이든 아들이든, 남자든 여자든 평등한 것이 좋은 것 같다.
5. 일하고 싶은데,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
생소한 한국의 전업주부
앞에서도 친정집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하지 못하는 내 고민을 이야기 한 적이 있지만, 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우리 베트남에서는 여자나 남자나 다 직업을 갖고 일을 한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사람은 없다. 한국에 처음 와서 집에서 살림이나 하라는 시댁 식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처음에는 내가 한국어를 모르니까 한국어를 배운 다음에 일을 하라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한 다음에도 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전히 살림이나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베트남에서는 여자들도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한다고 했더니 여기 한국에는 여자들이 집에서 살림만 하는 사람이 많고 그것을 전업주부라고 한단다. “나는 전업주부가 되기 싫다. 일해서 돈을 벌어 친정에 도움도 주고 저축도 하고 싶다. 내가 돈을 벌면 당신과 나 둘이 같이 버니까 빨리 돈을 모아 집을 살 수 있지 않느냐? 나도 보람을 느끼고 싶다.” 라고 말했더니 그럼 아이를 나서 기른 후 직장을 가지라고 했다.
여성결혼이민자들에게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부분 아시아 나라의 여성들에게 직업은 하나의 일상이다. 물론 일을 한다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은 생활이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일을 하지 말고 전업주부로 지내라고 하면 매우 당황스러웠다.
결혼으로 왔으니까 취업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처음 한국에 결혼해서 왔을 때는 여성결혼이민자들은 직업을 가질 수가 없었다. 결혼으로 왔으니까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법률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몇 년 후에 2006년인가에 결혼이민자도 직업을 갖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렇게 취업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게 된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2005년에 보건복지부 실태조사에서 여성이민자들과 결혼한 한국 가정의 52.9%가 최저빈곤층이라는 것, 또 친정에 대한 경제지원 문제로 갈등을 빚는 여성결혼이민자들이 많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여기에 이주여성단체에서 정부에게 ‘가정형편이 어려운데 남편에게 의지하기 보다는 여성들이 자기가 번 돈으로 떳떳하게 친정에 보낼 수 있도록 취업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여성들의 자존심을 살리는데도, 또 어려운 한국가족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며 갈등을 줄이는 길이니 결혼이주여성에게 취업권을 주라’고 제언한 것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성결혼이민자들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땅한 일자리 구하기가 어렵다.
이 무렵에 내 한국생활은 벌써 5년에 접어들었고 내 한국어도 제법 늘었기 때문에 취업을 하기가 쉬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하려니 일자리 구하는 게 만만하지 않았다. 마침 나와 같은 여성결혼이민자들을 상담해주는 곳에 취직이 되었다. 대학교 졸업장이 없지만 내 한국어 능력을 인정해서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두 달 동안 학교에 다니듯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상담에 필요한 공부와 한국어 보충공부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상담원이 되었다. 나의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다. 그러나 우리 같은 여성결혼이민자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직업은 식당에서 허드레 일을 하거나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다. 한 몽골 친구는 몽골에서 법률공부를 했는데 그것을 써먹을 수 없다고 안타까와 했다. 자격이 인정되지 않는데다가 한국어로 법률을 모르니 사실상 한국에서 써먹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영어를 하는 필리핀 친구나 러시아 친구들은 원어민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양인데 그 또한 쉽지는 않다고 한다.
봐주어서 만든 일자리가 아니라 당당하게 일할 수 있는 자리였으면
한국정부에서도 여성결혼이민자들의 취업을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마련하는 모양이다. 국제결혼을 한 사람이라는 특성을 이용해서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에 그 나라 문화를 소개하고 교육하는 다문화강사 훈련이라든지, 원어민 교사 교육, 통번역사, 바리스타, 제빵사육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결혼이민자가 갖고 있는 언어나 문화적 특성을 이용해서 취업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온전한 일자리가 되기 힘들다. 실제로 정부가 지원하는 프로그램은 파트타임형식이나 시간제 일자리가 될 뿐이다.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가졌던 경력을 인정받고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여성결혼이민자가 경찰공무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다. 본국에서 그런 일에 종사를 했다고 한다. 또 상담원으로 같이 일하던 몽골 여성은 경기도청의 다문화담당 특채 공무원이 되었다. 이런 여성들처럼 여러 곳에 자기 능력을 펼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봐주어서 만들어지는 일자리가 아니라 당당하게 일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결혼이민자들이 온전히 취업준비를 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특히 아이 문제가 큰 문제다. 아이를 기르면서 취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남편이나 시집식구들은 여전히 우리가 살림하고 아이 보기만 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직장에 다니기 힘들다. 이것은 한국 일반여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하는데, 아이 양육문제는 국가에서 해결해주었으면 좋겠다.
6.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결혼하고 얼마 후부터 시어머니가 아이를 가지라고 했다. 남편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니까 빨리 아이를 낳아야 하고 그래야 한국생활이 안정된단다. 내가 20살, 남편이 35살에 결혼했으니까 시어머니의 걱정도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아이를 일찍 낳은 친구들을 보니 아이 때문에 꼼짝 못하는 것을 보고 2년 동안 아이를 갖지 앉았다.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한국어가 어느 정도 되면 그때 아이를 갖겠다고 남편과 부모님을 설득하였다.
3년째에 아이를 낳았다. 산후조리를 하는데 시어머니와 자주 싸웠다. 나는 더워죽겠는데 뜨뜻한 방에 있어야 한다,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 등. 그래도 족발 고아먹는 것은 비슷해서 다행이었다. 몽골에서 온 내 친구는 해산물을 먹지 않는데 미역국을 먹고 다 토해서 시어머니한테 야단맞았다고 하소연을 한 적이 있다.
육아 때문에 생긴 갈등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를 낳고서 산후조리 때문에 시어머니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견딜만하다고 한다. 그러나 육아 때문에 생기는 갈등은 해결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상담 내용 중의 하나는 결혼한 지 일 년 반밖에 안 된 필리핀 여성이 필리핀 말로 옹알이를 받아주는 것을 보고 시어머니가 그러면 아이가 한국말이 늦다고 한국어로 하라고 했단다. 한국어가 서툰 그 여성은 그때부터 아기에게 말을 못하게 되니 우울중이 걸렸다고 한다. 아기가 어릴 때 엄마와 눈으로 말로 서로 감정을 주고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지 못한 시어머니 때문에 며느리의 상처가 깊어진 것이다. 그 아기도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기가 있어야 인정받고 대접받는다.
아무튼 우리 여성결혼이민자가 아이를 낳으면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긴다. 가족들도 정말로 한 식구로 인정해주는 것 같고 주변에서도 한국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것 같다. 내 자신도 심리적으로 한국에 뿌리를 내린 느낌이다. 이런 정서적인 것 말고 정부의 태도도 아기가 있는 여성들 중심으로 정책을 펴는 것 같다. 비록 외국인 신분이라고 아기가 있으면 국민기초생활보장 대상에 포함시켜주고, 국적심사도 빨라진다. 남편과 이혼을 했어도 아기를 기르고 있으면 체류권이나 영주권 얻기도 쉽다. 여성결혼이민자의 상담을 받으면서 느끼는 것은 아기가 있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좋은데, 아기가 없는 여성들도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왜 아이 교육은 엄마 책임일까?
큰 아이가 학교에 들어갔다. 입학을 하고나니 더욱 힘들어졌다. 웬 준비물은 그리 많은지, 또 어떻게 그걸 챙겨야 하는지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다. 옆집 언니에게 걱정을 했더니 문방구에 가면 다 해결된다고, 걱정하지 말란다. 그래서 저녁에 매일 알림장을 보고 문방구에 드나들었다. 나중에는 아이에게 돈을 주고 필요한 것을 사오게 하였다. 그래도 숙제지도는 너무 힘들었다. 남편에게 아이 학교 공부 좀 돌보라고 했더니 “피곤하다. 한국에서는 아이 교육책임은 엄마에게 있다”며 나보고 알아서 하라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허지만 어쩌랴. 옆집 언니의 도움을 얻을 수밖에.
“엄마, 바보야”라니!
그런데 하루는 이 아이가 느닺없이 “엄마, 영태 엄마는 바보야?” 하고 물었다. 영태엄마는 태국여성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하고 놀라서 물었더니 영태라는 아이가 자기 엄마에게 한국어를 잘 못한다고 “엄마 바보야!”라고 했단다. 그래서 영태엄마가 울었다는 것이다. 가만 있을 수 없어서 영태네 집에 갔다. 영태 엄마의 눈이 부어있었다. 영태엄마, 영태와 우리 아이가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영태야, 너 엄마 보고 한국어 못한다고 바보라고 했다며? 엄마는 한국어는 잘 못하지만 엄마 나라의 말인 태국말은 아주 잘해. 거기다 한국어를 더 할줄 아는거야. 그러니까 엄마 바보 아니야. 다른 엄마들은 한국말밖에 못하잖아. 그런데 영태엄마는 태국말도 잘하는데 한국말도 더할 줄 아니까 다른 엄마 보다 더 낫지” 하고 말해주었다. 내 말에 영태는 “어 그렇네. 엄마 다시는 그런 말 안할게!‘하고 사과했다.
사실상 엄마가 한국인이 아닌 아이들 중에서 가끔 이런 말을 한다고 한다. 문제는 그 말을 들으면 상처받는 엄마도 문제지만 아이에게도 엄청 큰 문제가 된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려면 아이가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아이가 자존심 있게 자라려면 자기 부모를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 엄마가 한국말을 못한다고 바보라고 생각하는 아이가 어떻게 엄마를 존경하겠는가? 나는 사회가, 가족이 우리와 같은 여성결혼이민자를 존중해주는 것이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도 도움이 되고 그것이 곧 한국사회에도 이익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엄마, 나는 오씨인데, 왜 다문화야?”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얻게 된다. 어느날 아이가 학교에서 오더니 “엄마, 나는 오씨인데, 왜 다문화야?” 하고 묻는 것이다. 아마도 학교에서 다문화가정 자녀를 위한 방과후 교실을 운영하면서 거기에 참여할 학생들을 모으느라 선생님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다문화가족 자녀 손들어라!‘ 이랬던 것같다. 다문화가족이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 아이가 손을 들지 않자 ” 너 다문화가족인데 왜 손 안드느냐?“ 라고 아이를 나무랐다고 한다. 이런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문화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아이들을 구분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 한동안 우리 아이들을 ’국제결혼가정 자녀‘라고 불렀다. 그러더니 어느날부터 ’코시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이번에는 ’다문화가족 자녀‘란다. 이렇게 구분해놓고 우리 아이들을 지원하는 정책을 편다고 하는데, 그 배경을 보면 우리 아이들이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서인 듯하다.
엄마가 외국인이라서?
흔히들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언어도 더디고 학습발달 장애를 겪는다고 한다. 사실 다문화가족 자녀들은 학교문제가 심각하다. 뉴스에 보니까 다문화가정 자녀의 25%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상급학교로 갈수록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진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학교 다니다가 그만 두는 이유를 한국어 능력이 부족하고 외모가 다르고 말씨가 달라서 따돌림을 당한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은 그 이유를 ”엄마가 외국인이라서“라고 우리 때문인 것처럼 말한다. 엄마가 외국인이라 말을 잘 못하고, 엄마가 외국인이라 학습발달 장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어제 인터넷을 보니 어느 초등학교의 선생님이 부모가 국제 결혼한 집의 한 아이 보고 “네네 엄마 한국어 잘 못하지?”하고 물은 다음부터 그 아이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보았다. 선생님의 이런 생각 없는 말 한마디가 아이들의 가슴에 멍이 들게 하고 상처를 입힌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면 당연히 아이는 학교에 가기 싫어질 것이다.
우리 엄마들도 한국에 적응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아이들 교육 책임까지 우리가 져야 한다면 짐이 너무 무겁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괜히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는 후회가 든다. 엄마가 설령 한국어가 서툴더라도 아이를 일찍부터 어린이집에 보내 일반 아이들하고 같이 지내게 하면 엄마가 말 문제는 해결될 것 같다. 우리 아이의 경우 두 살 때부터 어린이집에 보냈더니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러니 국가가 “엄마가 외국인이라서”라는 소리 안 듣게 다문화가정 자녀들은 무상으로 어린이집에 다닐 수 있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아이의 미래를 위한 이중언어 살리기
나는 집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베트남 동화를 읽어주고 베트남 말로 이야기를 한다. 우리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면 아이가 한국말을 잘 못하게 되지 않느냐고 걱정을 하는데, 우리 아이들은 한국말도 잘하고 엄마와 베트남 말도 제법 잘한다. 지금의 우리 경제형편을 보면 한국 일반 엄마들처럼 아이들 뒷바라지 할 자신이 없어 차라리 베트남어를 아이의 무기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베트남어를 잘 하면 대학가는 데나 취업하는데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다행히 정부에서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에게 이중 언어를 장려하고 있는데 말로만이 아니라 실생활로 이어질 수 있게 정책을 펴주었으면 좋겠다.
7. 한국사람 되기
나는 한국 사람일까? 아니면 베트남 사람일까? 한국국적을 받았지만 나는 한국 사람들에게 여전히 베트남사람이다. 주변에서는 나를 준 한국인으로 인정하는 것 같다. 나는 가끔 “한국사람 다 됐네”라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이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시장에 가서 한국말로 물건을 깍을 때였다. “좀 깎아주세요” 하는 내 말을 들은 가게 집 아주머니가 “한국말 잘하네. 한국사람 다 됐어”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아이를 낳고 나서다. 시어머니가 아이까지 낳았으니까 이제 한국사람 다 됐다고 말했다. 그 다음에는 남편으로부터 이 말을 들었다. 국적이 나온 날, 남편이 나에게 말했다. 난, 당신 이제 진짜 한국사람 됐어!“. 그런데 한국국적도 있고, 아이가 둘씩 자라서 어린이집에 다니고 학교에 다니게 된 지금도 이웃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베트남 며느리“나 ”베트남 댁“으로 부른다. 그 말을 들으면 나도 혼란이 생긴다. ”나는 한국사람인가? 아니면 베트남 사람인가? 영원히 나는 이곳에서 베트남 사람인가?” 나 스스로도 때로는 한국사람이고 싶고 때로는 베트남 사람이고 싶다. 한국국적이 나온 다음부터 내 스스로 나는 이제 한국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트남 국적을 포기해야만 했을 ‘때는 무척 섭섭하고 안타까웠다. 이런 경험은 나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주여성 인권글쓰기에 참여한 한 러시아 출신 친구는 아이를 업고 시장에 갔는데 물건 파는 할머니가 “러시아 며느리, 뭐 사러 왔어?” 하고 물었다고 한다. 분명히 한국국적이 있는 걸 아는데도 여전히 ’러시아 며느리‘라고 한다며, 자기는 한국에서 영원히 외국인이라고 서운해 하였다.
결혼이민자를 위한 교육에서 들으니 외국인이 한국사람 되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한국어와 한국문화 잘 알기, 다음은 한국 아이 낳기, 그리고 한국국적 취득하기다.
한국어 잘 하고 한국문화 이해하기
결혼이민자가 한국사람 되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어와 한국문화 이해다. 한국어를 잘하고 한국문화, 한국풍습을 잘 이해하는 결혼이주여성을 보면 흔히 하는 말이 “한국사람 다 됐네!” 하는 것이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이제 당신은 한국 사람으로 인정해도 되겠다. 우리 안에 당신을 끼어주겠다”는 뜻이다. 아무리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을 갖고 있어도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면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나와 같은 결혼이주여성에게 있어 한국어와 한국문화는 모르면 불편한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못받고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2009년부터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사회통합이수제라는 제도도 따지고 보면 결혼이주여성이 한국사람 되게 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서, 한국어와 한국문화이해 정도를 기준화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좋은 며느리로서, 좋은 아내로서의 한국사람 되기
결혼이민자에게 한국사람 되기 또 하나의 과정은 가부장적 가족주의에 순응해서 시부모 공경을 잘 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며 자식을 낳아주고 길러주는, 현모양처 상을 구현하는 것이다. 결혼이민자가 언어가 서툴고 문화가 서툴더라도 남편과 시부모 봉양을 잘 하고, 한국 혈통을 가진 자녀를 낳으면 일단 한국사람 다 된 것으로 인정을 받는다. 가족 형편이 어려워 경제 일선에 뛰어들 때 가족 내에서 지워가 확보될 수 있는 계기는 되지만, 그 여성의 위치는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가족생계 보조자로, 부양자로서의 자리매김일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한국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 이주여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양성평등문화를 갖고 있던 여성이 한국의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에 길들어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사람 되기와 사회적 성원권
결혼이주여성이 한국사회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잘 습득하고, 좋은 며느리로서 인정받는다고 해서 법률적으로 한국사회 국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으로서 현재 한국에서 한국사회의 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법적인 지위, 즉 안정적인 체류권과 국적을 갖고 있어야 한다. 2008년 말 현재 총 결혼이주여성 164,325명 중 국적취득자는 50,409명(약 30%)이고, 미취득자는 113,916명이다. 결혼이주여성의 지위는 가족동거자, 영주권자, 시민권자로서 분류되는데 결혼이주자라고 하더라도 국적을 받아야 한국인으로 인정을 받는다. 한국 국적을 갖고 있으면 법적으로 한국인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한국인이 갖고 있는 온갖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결혼이주여성들에게 국적취득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내 솔직한 바람은 한국국적을 취득해야만 한국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 결혼이민자가 비록 국적취득을 하지 않았더라도 한국에 살면 모두 한국국민 같은 권리를 누리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8. 날개 꺾인 여성결혼이민자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나는 결혼이민자 인권 상담을 하는 상담소에서 일을 한다. 여기서 각가지 사연을 갖고 있는 많은 어려운 여성들을 만난다. 여성결혼이민자들이 겪는 어려움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가정폭력이다. 2007년에 발생한, 남편의 폭력에 의해 갈비뼈가 18대 부러져서 죽은 베트남 여성 “후안 마이” 사건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그처럼 심각하진 않아도 가정폭력으로 고통당하는 여성들이 꽤 많다.
나는 참 운이 좋았다.
2007년 여성가족부의 실태조사에 의하면 17.5%의 여성결혼이민자들이 가정폭력을 당한 경험들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가정폭력이란 주로 구타를 말하는데, 실제로 여성들을 만나 보면 상습적인 구타에서 집에서 내쫒기 등 가정폭력의 종류도 다양하다. 남편이 쇠파이프를 휘둘러 두 손과 두 발이 부러져 기브스를 한 중국에서 온 주희, 얼굴을 맞아 눈에 멍이 든 베트남 여성 푸엉, 시동서가 팔뚝을 물어뜯어 팔뚝에 이빨 자국이 나있는 몽, 시어머니가 머리를 때려 상처가 난 린... 이렇게 눈에 띄는 폭력 이외에도 임신을 했는데 전실 자식이 있으니 아기가 필요 없다며 아기를 지우라고 강제로 병원에 끌고 가 도망쳐 온 몽골 여성 첸, 조카가 신장병에 걸렸는데 아내의 신장을 떼어 조카 신장이식을 시키겠다고 해 도망쳐 온 태국여성 파이란, 알코올 중독 남편이 술 먹고 괴롭힌다고 우는 캄보디아 여성 카이, 결혼해 와 보니 남편이 정신병 환자라 못살겠다는 인도네시아 여성 푸아난, 결혼한 지 석 달 밖에 안 되었는데 아내가 한국어가 안는다며 말이 안 통해 못살겠다며 이혼을 요구한다는 히야, 남편이 내민 서류에 사인을 하라고 해서 했더니 그게 이혼 서류였다는 마이, 생활이 어려워 취업을 해서 식당에서 일했는데 남편이 그 월급을 다 가로채 갔다며 우는 모이 칸 등 다양한 폭력경험이 있다. 이런 여성들을 볼 때마다 “나는 참 운이 좋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창 꿈 많은 시절에 폭력으로 상처를 입고 날기를 포기한 이들을 볼 때 가슴이 저리다.
가정폭력 보다 더 무서운 폭력, 그러나 대책이 없다.
그런데 남편에게 맞은 흔적이 있는 경우는 가정폭력으로 인정받아 이주여성쉼터에 들어갈 수 있고 한국에 체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구타가 아닌 경우에는 가정폭력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이혼을 할 경우 한국에서 살지 못한다. 어쨌든 한국에 결혼해서 왔는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쉽지가 않다. 결국 불법체류자가 되고 마는데, 이런 여성들을 만날 때마다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매 맞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이런 피해를 입은 사람은 가정폭력으로 인정해서 한국에서 살 수 있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어떤 남편들은 여성결혼이민자가 시집생활을 견디다 못해 도망을 가면 “위장 결혼”이라고 펄펄 뛴다. 물론 위장결혼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 입국해서 한 달 만에 또는 외국인등록증이 나오면 도망가는 여성들도 있다. 이런 여성들 때문에 피해를 입은 남편들에게는 내가 집을 나온 것도 아닌데 참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성이 집을 나왔다고 모두 다 위장결혼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성들이 집을 나왔을 때 시집 식구들이 화를 내기 전에 왜 나왔을까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늘어가는 이혼, 우리에게도 자존심이 있다.
해마다 발표하는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국제결혼비율이 11% 정도, 즉 한국인 아홉 쌍 중의 한 쌍이 국제결혼을 한다고 하는데, 이와 비례해서 이혼율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이혼율이 증가하는 이유는 국제결혼중개업을 통해서 결혼을 하면서 배우자를 상품처럼 취급하는 남편과 시댁 식구들의 인식, 서로 말이 안통해서, 그리고 문화차이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문화 차이나 언어 차이의 문제보다 가장 큰 문제는 여성결혼이민자를 보는 한국 가족의 시선과 가치관이라고 생각한다. 오죽했으면 <이주여성 인권 글쓰기> 대회에서 뽑힌 글 가운데 하나는 이런 제목이 있다. “나는 팔려 온 신부였다.”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인들이 외국인이라고 다 함부로 대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보다 잘 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존중해주는데,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무시하는 것 같다.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고 해서 우리가 인격이 없는 것도 아닌데 무시당하면 자존심이 상한다.
9. 꿈꾸는 사람에게 미래가 있다.
다문화가족이 한국의 20%가 되는 날이 온단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하는 뉴스를 보니까 앞으로 5년 후면 결혼할 남자 5명 중의 1명은 여자가 모자라서 아내를 못 구한다고 한다. 딸 보다 아들을 좋아해서 아들만 낳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2015년에서 2020년이 되면 한국인 다섯 쌍 중 한 쌍이 국제결혼이고, 다문화가정이 20%가 되며, 농촌의 경우 80%가 다문화가정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미 새로 태어나는 아이 셋 중의 한 명은 다문화가정 자녀다. 그래서 다문화가정이 한국사회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다문화가정 자녀가 우리의 미래다 해서 정부와 사회에서 다문화가정 아이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다문화가정이 중요하다면, 우리 여성결혼이민자에 대한 자리, 위치도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우리 결혼이민자들 역시 그냥 복지 지원받는 사람, 한국어나 한국문화 배워야 할 사람이 아니라 시민으로 인정해주었으면 좋겠다. 우리 결혼이민자들은 유권자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이런 인식을 못하는 것 같다.
쥬디스 알레그로가 국회의원 후보로 발표되던 날
2008년 한국에서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이때 쥬디스 알레그로라는 필리핀 출신의 여성결혼이민자가 창조한국당이라는 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가 되었다.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놀랐다. 여성결혼이민자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니... 그런데 그 순서가 국회의원이 되기 힘든 순서로 밀려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실망했다. 결국 쥬디스 알레그로는 국회의원이 되지 못했다. 우리 센터의 대표님이 이주여성의 정치 참여 문제를 토론하는 자리에서 “쥬디스 알레그로라는 필리핀 이주여성이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가 되었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뒷 자리에 배치한 것은 여성결혼이민자를 갖고 “쇼”를 한 것이다.“라고 화를 냈다는 기사를 인터넷에서 읽었는데, 내 생각에 그래도 여성결혼이민자에게는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 후보에 올랐으니 다음 번에 또 후보에 오르고, 그러다 보면 여성결혼이민자가 국회의원이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아시아에 여성정치가들이 많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경제적 지위가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의 지위는 우리 베트남 보다 낮은 것 같다. 사실 내 고향 베트남을 비롯해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여성이 정치 지도자가 된 경우가 많다. 우리 베트남에는 역사적으로 여성지도자가 많다. 장군도 여러 명 있었고 응우엔 딩 티 장군은 베트공의 부사령으로까지 오른 여성이었고 후에 베트남 여성연맹의 주석이 되었다. 지금은 여성국회의원이 25,5%나 되며, 부통령 중에 한명이 여성이다. 의회 위원회 의장 중 42%가 여성이다. 쟈스민은 전 세계로 가장 많은 이주를 보내는 나라이긴 하지만, 필리핀에서 여성 대통령이 두 명이나 나왔고, 필리핀 여성들의 지위가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편이라고 자랑한다. 몽골에서도 여성국회의원이 늘어나고 있으며, 놀라운 것은 대학교 교수의 50% 이상이 여자이고, 의사, 법률가, 교사의 80%가 여성이라고 하니 놀랍다. 중국만 해도 2008년에 전국인민대회 여성비율이 22%였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은 여성국회의원비율이 13%라니....그래서 여성가족부가 결혼이민자 실태조사를 했을 때 한국여성의 지위가 자기네들 보다 낮다고 평가했나보다. 이런 결과를 보면 한국의 잘난 여성들도 국회의원 되기 힘든데, 언제 우리 차례까지 오려나? 하고 맥이 풀리기도 한다.
여성결혼이민자가 한국의 미래를 선택하는 그 날을 내다보며!
현재 한국은 영주권을 갖고 3년 이상 거주한 자에게는 지방자치의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국적을 취득하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 선거권, 피선거권을 다 갖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우리 여성들이 정치무대에 서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지금은 힘이 없지만 다섯 쌍 중의 한 쌍이 국제결혼을 하는 2015년이 되면, 그래서 국민의 20%가 다문화가정이 되는 때가 온다면 우리 여성결혼이민자들이 선거에 참여해 한국의 미래에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내 기대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여성결혼이민자는 내년 지방자치에 구의원으로 나서볼까?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앞으로 이십년은 더 있어야 여성이 후보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멀찌감치 내다보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우리 결혼이민자들도 유권자로서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듯이 언제가 우리 결혼이민자도 정치인이 되는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우리 결혼이민자들이 우리가 사는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그 날을 위해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꿈꾸는 자에게 미래가 있다는데!
외국인으로 한국 남편과 결혼해서 낯선 땅에서 가정을 꾸리고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척 힘들었다. 한국말을 몰라 가족과 이웃과 말이 안통해서 힘들었고, 문화가 달라서 가족과 마찰이 생길 때는 정말로 할 수만 있다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을 하며, 또 그런 대로 나를 믿어주고 위해주는 남편을 보며, 아이를 낳고 나서는 두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그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어려움을 견디어냈다. “힘들지만 견디어 내야 한다, 아니, 이겨내야 한다!” 그렇게 견디어 내니까 이제 한국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렇다고 고향 베트남을 잊거나 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가 익숙해졌다는 뜻이고, 이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제 보다 큰 꿈을 꾸어보아야겠다. 한국에 올 때, 지금은 천사가 되었을 후안 마이가 남편에게 마지막 남긴 편지에 쓴 것처럼, “좋은 남편 만나 무엇을 먹었는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잘 사는” 꿈을 꾸었다면, 이제는 고통을 이겨낸 사람답게 한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람으로서 이상을 키워야겠다. 꿈꾸는 사람에게 미래가 있다는데...
참고한 글
『이주여성 삶 이야기』,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2008
『아시아여성들의 삶에 대한 이해와 말걸기』,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2008
『이주여성 인권백서-적응과 폭력 사이에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2008
『2009 이주여성인권글쓰기 공모전 우수 작품집-이주여성이 말하는 인권, 그리고 한국사회에 말 걸기』,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2009
한국염, 「이주여성, 다문화관련 정부정책의 현황과 과제」, 『실천적 배움과 네트워킹을 위한 2009 이주여성활동가교육』,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2009
* 이 글은 2009년 12월 유네스코아시아.태평양구제이해교육원에서 발행한 다문화이해 시리즈 다문화이해 다섯빛깔에 게재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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