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으로 와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성서 물음에서 가장 중심 되는 사상은 두 가지 이다. 하나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은 흙에서 온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지고한 가치를 대변해준다. 반면에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고 흙으로 돌아가 먼지로 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잘 드러내준다.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그리고 흙으로 돌아가 먼지로 변한다는 창세기 2장의 기록은 창세기 1장보다 5백년이나 앞선 시대에 기록된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번영한 시대로 알려진 솔로몬 시대에 성서 기자는 당시의 사회상을 보면서 세 가지 물음을 하게 되었다. 첫째는 도대체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왜 인간은 죽은가? 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이요, 둘째는 왜 인간에게 고통이 있는가? 하는 것이요, 셋째는 왜 인간 사이에 차별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창세기 2장과 3장이 기록되게 된 배경이다.
창세기 2장에서 성서기자는 당시 전해 내려오던 민담을 통해서 인간의 존재를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창세기 1장에서 인간은 한 창조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다면, 2장에서 인간은 한 원의 중심이다. 2장 2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짓는다. 여기서 흙이란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는 창조적인 생명의 결속은 인간을 뜻하는 히브리어 adam이라는 단어와 adama(흙)을 사용함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은 하나님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음으로 비로소 산 존재가 된다. 하나님의 생명력이 질료적인 신체에 들어감으로 비로소 인격화되고 개별화된다. 그러므로 7절은 구약성서 인간학의 표준적인 구절이다. 이 인간학은 우리가 흔히 말하듯 몸과 영혼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몸과 생명을 구별한다. 질료적인 것과 결합한 신적 생명의 숨은 인간을 신체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영혼적인 면에서도 산 존재로 만드는데 이 생명은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신앙이다. 흙으로 만들어진 것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적인 것이 되었다는 7절의 선언은 또 다른 뒷면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그의 숨을 거두시면 인간은 다시 생명 없는 질료가 된다는 것이다. 시편 104, 29-30: 욥기 34, 14-15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면 그들은 죽어서 다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간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는 영을 거두어 가시면 육체를 가진 것은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 만다.:
인간이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존재라는 것은 두 가지 가르침이 있다. 하나는 인간의 평등성이다. 창세기 2장의 기자는 존재를 한계를 가진 존재임을 명시하면서 당시에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학대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지배층들에 대하여 인간은 모두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존재이니 사람 사이에 특권층이 있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둘째는 인간이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존재이니 자신의 존재의 근원적 한계를 생각하면서 겸손해지라는 것이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인간 존재, 성서는 흙이란 말을 “먼지”라는 말과 같이 쓰고 있다. . 왜 성서는 먼지와 흙이란 이중적인 언어로 인간의 존재를 말하고 있는가? 흙이란 생명과 결부된 것이고 먼지란 하찮은 존재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이다. 생기가 없는 흙은 먼지에 불과하다. 먼지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먼지는 바람 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쓸려 다니고 그 자체가 주체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생기가 덜어진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 먼지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먼지로서의 우리 자신을 자각하면서 우리를 돌아보자.
-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자기 손에 달렸다고 착각하고, 세상의 문제를 자신이 나서서 해결하겠다고 달려들다 보면 곧 지쳐서 그 일에 압도당하고 만다.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하려고 덤벼들지 말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조그만 일을 하고 나머지는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일을 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게 되고 경쟁하다보면 내면의 자아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고 급기야는 심심이 메말라져 글자그대로의 먼지처럼 황폐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이것은 비단 육체적인 것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영적으로 지나친 야망도 문제다. 겸손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에 감사하고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 먼지로 와서 먼지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자. 먼지로 와서 먼지로 돌아간다는 말은 인간됨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뿌리와 한계를 알려주는 말이다. 우리가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기가 쉬워질 것이다. 먼지는 “무”의 다른 이름이며 없어도 곧 사라질 것임을 상징한다. 집착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세상일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일상을 산다. 어려운 일이 부딪칠 때, 그 어려움이 한번의 바람에 날아가 버릴 수 있음 기억하고 계속 근심하거나 죄절하지 말자. 기쁨, 슬픔, 고통, 이런 것들도 바람 한 번에 날려질 수 있다. 먼지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인생이 다람쥐 체바퀴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실망하지 말자. 더더욱 욕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지 말자.
-인간이 흙으로 와서 흙으로 간다는 것은 죽음이면서 동시에 부활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비록 먼지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주시면 생명적인 존재기 된다. 먼지는 바로 그런 이미지다. 하나님은 먼지와 같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 우리가 우리의 허무를 통해 삶의 의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찾는다면, 우리는 보잘 것 없는 먼지가 아니라 생명으로, 영원으로 채워지는 생명적인 존재기 될 것이다. 먼지를 생명적인 존재로 바꾸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200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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