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5월의 광주, 우리들의 십자가

한국소금 2019. 3. 25. 22:19

5월의 광주, 우리들의 십자가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많은 사람이 실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수천 명이 죽어갔다 /수만 명이 죽어갔다./ 아니 수백만 명이 다시 죽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아다오, 동지여! /피의 양분 없이 자유의 나무는 자라나지 않느니 / 보아다오. 이 나무를 / 민족의 나무 해방의 나무 / 민족해방투쟁의 나무를 보아다오. / 이 나무를 키운 것은 / 이 나무를 이만큼이라도 키워낸 것은 / 그들이 흘리고 간 피다. 투쟁의 한가운데서 /

그렇다, 그들이 흘린 한 방울 한 방울의 피는 / 어머니인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 어느 날엔가 / 자유의 나무는 결실을 맺을 것이며 /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 그들이 흘린 피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김남주의 시 전사 2’ 중에서

 

성서와 광주민주항쟁과의 만남

우리는 오늘 광주 518 26주년을 맞는다. 광주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가? 최근 열린 우리당의 국회의원이 518 광주항쟁 때 군이 들어가 폭력으로 진압한 사태를 가리켜 질서유지 차원에서 한 것이라고 망언을 하여 광주를 다시 한번 들끓게 했다. 나중에 평택사건에 군이 들어가 진압한 사태를 질서유지 차원에서 정당한 것이라고 강조하다보니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변명을 했는데, 이 사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의미는 평택과 광주는 같은 맥락에 있다는 것이다. 똑같은 일이 평택지킴이들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데, 사건의 본질이 왜곡된 채 반미주의자로 몰아 군투입을 정당화하고 있다. 아무튼 이처럼 19805월에 광주에서 일어난 그 역사적 사건은 그냥 묻어두면 잘라도 다시 솟아나는 메두사의 머리처럼 역사의 진실을 은폐시키거나 왜곡하려는 세력들이 끊임없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광주의 이야기를 계속 전해야 할 소명이 있다. 지금 우리 세대에서 역사의 먼 훗날까지, 이 세계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사명이 있다.


마가복음 149절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5월의 광주 이야기는 이 땅에 민중의 역사, 민주화의 역사에서 계속 전해지고 기억되어야 할 중요한 사건이다. 우리가 전해야 할 광주 이야기는 단순한, 낭만적인 옛날 무용담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해방의 역사, 민주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민중들의 항쟁이야기이다. 바로의 압제에 항거한 이스라엘 구원의 역사처럼 광주의 이야기는 민족구원의 이야기이다. 이 사건으로 한반도가 안고 있는 민족모순과 분단의 모순이 직시되었다. 광주사건은 광주의 시민과 민중들이 우리의 민족모순, 분단모순이라는 민족의 십자가를 지고 억울하고 의롭게 죽은 사건이다. 2천년 전 당시 로마권력과 자칭 민족의 지도자로 행세하고 있는 이들이 예수를 민중을 선동하고 로마에 반역하는 반역자로 몰아 십자가를 지게 했듯이 광주도 군사정권이 민주를 염원하던 이들을 폭도와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대학살 사건이다. 수의 십자가와 광주의 십자가는 무고한 이가 불의한 공권력에 의해 죄인으로서 낙인찍혀 무고한 피를 흘렸다는데 같은 선상에 서있다.

 

의의 투쟁이 피흘림으로만 끝나면 우리에게는 절망뿐일 것이다. 하나님은 불의한 역사에 그냥 침묵하시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듯이, 광주를 민주화를 위한 역사적 사건으로 부활시키셨다. 광주 민중의 이야기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같이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느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절규했듯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하느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절규로 끝난, 실패한 이야기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고하게 죽임당한 예수가 하느님에 의해 다시 살림을 받았듯이, 광주에서 죽임당한 민중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에 의해 다시 살림을 받아 폭도들이 일으킨 만행에서 민주항쟁으로 부활했다. 무고한 아벨의 피를 그냥 땅에 묻어버리지 않으시고 그 피의 호소를 들으시고 가인에게 그 책임을 추궁하셨듯이, 광주학살 진상규명이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광주의 인식이 여기에서 멈춘다면, 광주는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의미가 퇴색한다. 광주의 진정한 의미는 오늘 읽은 본문 이사야 53장의 빛에서 파악할 때 나에게 살아있는 사건이 된다. 광주항쟁사건은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겪은 사건이다. 우리 대신 멸시를 받았는데, 우리 역시 폭도라고 멸시하고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은 광주가 우리가 앓을 분단모순의 병, 우리가 받을 민족모순의 병을 앓아주었던 것이다. 우리가 받을 채찍을 대신 맞아주었고 우리 대신에 상처를 입었다. 광주가 우리 대신에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민주화를 누리게 되었다. 광주는 우리 민족과 분단의 속제물이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짊어진 광주 사람들의 고귀한 죽음이 있었기에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결국 우리 모두 광주에 역사적 빚이 있는 것이다.

 

이사야 5312절에 의하면 광주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죄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나선 중재자다. 민족과 민주를 위한 십자가를 진 광주로 인해서 우리는 이 민족이 참으로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우리에게 희망적인 것은 광주의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생명의 역사로, 승리의 역사로 빛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11절에서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죽는 데까지 자기의 목숨을 서슴없이 내맡긴 이들, 남들에게 죄인처럼 여김을 받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정의의 중재자가 된 이들, 그로인해서 많은 이들을 의롭게 만든 이들이 자기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예수의 부활사건이다.

 

우리는 광주의 피 흘림을 통해서 정의롭게 된 이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광주의 십자가였던 민족모순과 분단모순을 극복해야 할 사명이 있다. 광주민중들이 지고 간 민족과 통일에로 가는 십자가를 지고 그들의 뒤를 따라야 한다. 민주와 민족을 위한 희생양으로서 죽어간 그들의 정신을 온 몸으로 드러내는 일을 해야 한다. 오늘날의 광주는 평택 대추리다. 평택을 아시아 군사화의 전초기지로 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광주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 일에 우리가 중재자로 나설 때, 하나님은 생명의 빛을 주실 것이다.


20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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