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어린이와 하나님 나라

한국소금 2019. 3. 25. 22:15

어린이와 하나님 나라

 

복음서에는 어린이를 보는 예수님의 태도가 매우 적극적으로 나타나있다.

첫째, 마가복음 1013절 이하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께 축복을 바라고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것을 제자들이 나무라자 예수께서 화를 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한다.”

 

오늘의 본문은 사람들이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고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여기서 쓰다듬는다는 말은 손을 얹음으로 축복을 내려달라는 것을 시사한다. 당시에는 부모들이 곧잘 라삐 즉 훌륭한 선생님에게 자기의 어린이를 데리고 가서 축복받는 풍습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가 병도 고치고 훌륭한 가르침도 베풀었기 때문에 당시의 풍습대로 아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온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꾸짖었다. 당시에 어린이들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사람 측에도 들지 못해 사람 수에도 끼지 못했다. 어린이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존재였기에 제자들에게도 하잘 것 없는 존재로 여김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가 가르치는 곳에 어린이들을 데리고 오자 제자들이 꾸짖을 수 도 있다. 예수를 번거롭게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린이를 거부하는 제자들에 대하여 예수는 오히려 이 어린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선언하신다. 이 뜻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 나라에서 특권의식이나 공적 사상이 거부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화를 내신 것은 제자들이 갖고 있던 특권의식을 바로잡으려 하신 것이다. 본문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를 보면 하나님 나라는 은총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당시의 일반적인 판단에 의하면 율법을 모르는 어린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공적을 세울 수 없다. 당시 가치관에 의하면 어린이는 공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 예수는 당시 가부장적인 사회에 팽배해 있던 신학적 공적사상을 공격하고 공적도 세울 수 없는 어린이를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선언하신다. 어린이가 절대적으로 자기 부모를 신뢰하고 따르는 것처럼,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만이 하나님 나라가 열려있다는 것이다. 아무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본 제자들과 달리 예수는 어린이가 부모를 신뢰하고 따르는 것을 어린이의 능력으로 인정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중요한 자격으로 선언하신다.

 

둘째로, 예수님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신다. 어린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어린이처럼 되라는 말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작아지고 타인에 대한 지배욕을 버리고 자신의 특권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함을 뜻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제자들이 갖고 있는 특권의식이나, 아버지가 자식들을 지배하듯 그런 지배욕이나 이기적인 편견에서 자유로워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부모 앞에 있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를 의지하고 있는 어린아이에게는 자기가 의지할 존재를 믿고 따를 뿐이지 특권의식이나 남을 지배한다는 의식 같은 것은 자리 잡을 수가 없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작아지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을 때, 그 온유의 모습이 바로 어린아이처럼 작아진 모습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가복음 933-37절에 나타난 말씀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제자들이 서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고 다툴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그리고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즉 어린이를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핵심이다. 여기서 어린이란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사람의 대명사다. 작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어린이, 자녀에게 잘 하는 것이 하나님께 잘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어린이를 영접하는 것인가? 우선 성서의 가르침대로 모든 어린이를 하나님 나라의 담지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어린이를 하나님 나라의 주인인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니 그 주인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어린이 위에 군림하거나 지배하려고 들 수 없다. 내 자식이라고 내 소유물로 생각할 수 없다. 어린이를 영접한다는 것, 어린이를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린이를 내 부속물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으로 대함을 의미한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녀, 내 동생, 조카 등, 주변의 어린이를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영접하듯 이들을 영접한다는게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에베소서 64절에 보면 부모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가르치라고 권고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는 어린이를 하나님처럼 영접하기 보다는 노엽게 하는 일이 더 많고 더 쉽다. 그래서 금년 어린이주일에는 최소한 자녀를 노엽게 하는 일에서 벗어나 보자는 제안을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어린이를 너무 왕처럼 대해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자기 멋대로 굴어도, 기죽이지 않는다고 내버려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어린이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방기하는 것이다. 각설하고, 어린이를 기르면서 고래반응을 교육법으로 사용해보자. 고래반응이란 긍정적인 일에 관심을 갖고 칭찬을 통해서 긍정적인 관계로 이끌어가는 것을 말한다. 부정적인 일이 생겼을지라도 야단하기 보다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행동을 유도하는 행동방식을 고래반응이라 한다. 사실상 아이들이 어떤 일을 잘하고 있을 때 그 잘한 일에 관심을 갖는 부모는 드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는 순간은 무언가 잘못되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가 대부분이다. 반대로 문제가 없거나 잘하고 있을 때는 무관심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뒤통수를 치면서 화를 낸다. 그런데 이런 뒤통수치기 반응으로는 아이들의 행동을 생산적으로 바꿀 수 없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칭찬과 격려 보다는 질책과 부정적인 반응 내지 무관심에 둘러 싸여 있다.

 

그러나 칭찬과 격려의 힘은 대단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샌디에고에 있는 씨월드 해양관에서 범고래 샴에게 쑈를 위해 춤을 가르칠 때, 벌이 아니라 칭찬을 통해서 춤을 가르친 일화를 책으로 출판했는데, 그 제목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이다. 무게가 수천 파운드나 되는 범고래가 수면 위로 솟아있는 줄을 넘어 점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조련사가 항 상 고래를 칭찬하고 긍정적인 관계로 이끌어가는 방법을 사용한데서 비롯된 방법이다. 고래 조련사가 범고래에게 춤을 가르치면서 배운 세 가지 지혜는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라! 잘한 일에 초점을 맞춰라! 벌을 주지 말고 시간을 주어라! . ’고래반응에 나타난 칭찬 10계명을 음미해보자. 1. 칭찬할 일이 생겼을 때는 즉시 칭찬하라. 2. 잘한 점을 구체적으로 칭찬하라. 3.가능한 한 공개적으로 칭찬하라. 4.결과보다는 과정을 칭찬하라. 5.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칭찬하라. 6.거짓 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칭찬하라. 7.긍정적인 눈으로 보면 칭찬할 일이 보인다. 8.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더욱 격려하라. 9.잘못된 일이 생기면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라.

 

물질적 보상보다 칭찬과 긍정적인 격려가 사람을 변화시킨다.


200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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