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온유와 자비

한국소금 2019. 3. 26. 00:59

온유와 자비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의 일이다. 추운 겨울 한 노인이 강을 건너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강은 무릎 정도의 깊이였지만 군데군데 얼어 있어서 함부로 건널 수 없었다. 그대 노인은 얼어붙은 길 저편에서 말을 타고 달려 오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말을 얻어 타면 쉽게 강을 건너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노인은 초초해 하며 신사들이 말을 타고 모퉁이를 돌아오는 것을 지켜 보았다. 허지만 몇 사람이 지나가는데도 노인은 도움을 청하는 아무런 손짓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마지막 사람이 눈사람처럼 서있는 노인 앞으로 다가왔다. 노인은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 선생님, 이 노인을 강 건너까지 태워다 주시겠습니까?” 말의 고비를 늦추며 그 사람이 말했다. ‘좋숩니다. 그렇게 하지요. 어서 올라타세요. “ 노인의 몸이 얼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그 신사는 말에서 내려 노인이 말에 올라타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사람은 노인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었다. 작고 안락한 노인의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 그 신사가 호기심에서 왜 다른 사람은 제쳐놓고 자기에게만 부탁을 했는지 물었다. 노인이 그 사람의 눈을 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보니 그들은 내 처지에 관심이 없었고, 그러니 부탁해 보아야 소용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당신 눈을 보았을 때, 그곳에 친절과 자비심이 비친 것을 보았다. 당신의 따듯한 마음이 곤경에 바진 나를 도와주리라 믿었습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 제퍼슨의 일화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경쟁의 시대다. 남을 지배하는 지배자가 되고픈 욕심으로, 정복자가 되고픈 욕심으로, 남을 이기고 싶은 욕망에 가득차 있다.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만이 대접받는 세상이 되고 있다. 모두 첫째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기고 봐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마음이 강팍해지고 몰인정해진다. 인들마져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모두 머리가 되어야 하는 판에 남을 돌볼 여유가 어디 있는가? 일류가 되어야 하는데 겸손과 양보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 성서는 성령받은 사람은 온유와 자비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씁하신다. 온유와 자비는 동전의 안 밖과도 같다. 온유란 히브리말로 아나윈(anawin)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낮아지고 비천해진다에서 유래된 말로 지배와 정복의 반대 개념을 갖고 있다. 억압받고 비천한 노예상태에 있는 것처럼 자신을 하나님의 비천한 종으로 여겨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것이 온유다. 자연히 이웃에게 노한다는가 교만한 생각을 품지 않는다. 온유한 사람은 겸손하다. 예수께서는 온유한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축복하셨다(마태 5,5). 분만 아니라 예수 자신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로 소개하고 있다(마태11,29).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으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일에나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시오. 각자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남의 일도 돌보아 주시오(빌립보 2, 3-4).   


자비 역시 에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창조된 인간에게 주어지는 은사로서 성령의 열매 중 하나다. 자비란 소극적인 동정의 뜻이 아니라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에 대한 적극적인 친절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비란 단순히 남을 도와준다는 구제행위 보다는 이웃의 불행이 내 것인양 깊은 일치감을 가지고 내 것을 나누어주는 행동을 뜻한다. 고난 당한 이웃과 깊은 연대감을 가지는 것이 바로 성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자비의 모습이다.

누가복은 1619-31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온다. 부자는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베풀고 호화롭게 살아다. 그러나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데려다 놓은 나사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얼마 뒤에 부자도 죽고 나사로도 죽었다. 그런데 나사로는 천사들의 인도로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는데,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아야 했다. 부자는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다가 나사로를 자기 집에 보내어 자기의 다섯 형제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경고를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무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고 하였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 그것은 바로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다. 예언서 전편에 면면히 흐르는 이야기가 과부와 고아, 나그네 등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 주라는 것이었는데, 부자는 자기 문간에 있는 거지 나사로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가 하데스에서 고통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의 교훈집인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하늘을 여는 열쇠는 곧 자비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웃과의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무관심과 냉대, 테러와 폭력이 판치는 오늘의 사회 속에서 온유와 자비의 열매를 맺으라고 한다. 사실 이기고 봐야 하는 세상에서 온유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을 섬긴다는 것은 뭔가 손해보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라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온유와 자비의 덕을 베풀어야 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고 나를 구원하셨다.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피조물인 내 이웃을 위해서도 피를 흘리셨기에 나는 그 이웃에게 결코 교만할 수 없는 존재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비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 이렇개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내가, 우리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잘난 체 하지 말고 서로 싸움을 걸지 말고 서로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니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십시오(갈라디아 5, 26-6,2)“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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