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심어서 평화의 열매를”.
6월 민주화 항쟁 20주년을 맞았다. 돌이켜 보면 6월 항쟁은 참으로 위대하였다. 20년 전의 6월 항쟁은 어두운 독재의 시대를 끝장내고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었으며, 독재와 폭압에 맞서 분연히 항거한 투쟁정신은 오늘에도 우리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이루어내는 강력한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6월 항쟁의 정신을 기리고 기념만 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어둡고 답답하다, 민주주의와 개혁은 후퇴하고 미국 자본 중심의 무차별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 파고 속에서 민중의 고통은 더욱 절박해지고 있다. 빼앗긴 10년 이라는 말로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폄하하는 기득권 세력들이 점점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가운데 민주를 부르짖던 민중들은 패배감으로 기가 꺾인 상태다. 남북의 관계도 화해와 일치의 분위기가 증진되는듯하다가 다시 긴장감이 고조되는 줄 달리기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마치 금강산에서 북의 교예를 보는 듯 조마조마하다.
세계 도처에서 이 순간에도 참혹한 전쟁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9․11 이후 세계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의 부시정권이 수행하는 패권적 전쟁정책으로 인해 평화는 파괴되고 전 세계는 분열과 전쟁의 공포에 휩싸여 있다. 강대국의 획책으로 팔레스타인은 두 동강이 날 지경에 이르러 팔레스타인 민중의 삶이 더욱 질곡에 빠질 위기 앞에 놓여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현실과 세계의 위기를 보면서 이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갈 희망을 만들기 위해 우리,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꾼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저께 제주에 강연이 있어서 다녀왔다. 제주 여성들과 만나제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 특히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제주는 ‘평화의 섬’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여기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고 한다. 평화의 섬에 군대는 걸맞지 않다. 군대의 힘으로 평화를 지키겠다는 발상인지 모르겠다. 이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싸고 반대하는 목소리와 찬성하는 목소리가 팽팽하게 울리고 있다. 이 한복판에 교회가 처해있는데, 교회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다. 천주교는 주교회의에서 반대를 표명해 다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고, 불교는 도법스님을 중심한 평화결사대가 순례행진을 하고 있는데, 기독교는 세력이 갈라져 있다는 것이다. 평화여성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교회가 양분되어 있는데, 큰 교회는 다 기지 찬성파에 속해 있고 그나마 반대하는 교회들은 작은 교회에 속한 교역자들이 목소리를 낸다고 한다. 해군 기지 예정지인 감영의 한 교회는 교인들이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둘로 갈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우리 기장 제주노회는 반대를 표명했는데, 역시 큰 교회는 교인들 눈치 보느라 엉거주춤하고 있고 박쥐처럼 찬성, 반대 양쪽을 다 기웃거린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작은 교회 목사님들은 잃을 것이 없어서 소신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서울에서 연대하느라 내려온 목사님들을 보아도 큰 교회는 아닌 것 같더라, 그래도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목사님들을 보면 작은 교회가 희망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늘 본문에서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라고 말하고 있다. 정의의 열매인 평화를 거두어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의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개인적인 의이다. 자신의 양심에 따라 스스로 이루는 의를 말한다. 이런 개인적인 의는 개인적인 삶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모두가 세상 풍조에 따라 편하게 살려는 현실에서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고 출세와 권력을 지향하고 있다.
둘째로, 사회적인 의이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이루는 공동체적인 의이다. 6월 항쟁은 이러한 공동체적 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인간을 억압하는 군사독재를 끝장내기 위해 ‘독재타도 민주쟁취’라는 깃발 아래 계급과 계층, 연령과 성별, 지역과 신앙의 차이를 뛰어넘어 온 국민이 분연히 일어난 항쟁이었다. 이제 이러한 사회적 의의 힘이 지금 온 세계에 만연된 전쟁의 위기를 극복하고 ‘반전 평화’를 위해 하나로 힘을 모을 것을 지향하고 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의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의로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의 회복을 뜻한다.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의는 때로는 독선과 교만을 낳을 때가 많이 있다. 자기 스스로 떳떳하다고 해서, 혹은 다른 사람이 알아준다고 해서, ‘나는 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 오직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의로운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이 기준은 육신적인 기준, 세상적인 기준에 달려있지 않고 순전히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선택기준은 약한 자를 들어 의를 위한 일에 강하게 나서도록 하신다.
의를 심어 평화라는 열매를 거둔다고 할 때, 그 평화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란 정의의 열매다. 즉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정의라는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이다. 이런 정의의 씨는 크고 강대하고 많이 가진 사람이나 조직, 교회들이 결코 거둘 수가 없다. 자기를 포기해야 정의가 이루어지는데, 가진 것을 수호하려는 사람이나 조직들이 어떻게 이 씨를 뿌리겠는가?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을 택하시고, 강한 자들이 아니라 약한 것을 택하신다. 하나님은 세상의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지들을 택하신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자신이 자랑할 게 있다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겠다고, 자신이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지기 때문이라고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청암교회는 의의 시를 뿌려 평화를 거둘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세상에 비해 약한 교회, 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약한 교회, 약한 사람들을 통해서 그의 평화를 이루시기 원하신다.
20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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