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4번 배타에서 포용으로, 이기적 동굴에서 공동체 구원으로.

한국소금 2018. 1. 31. 19:25

배타에서 포용으로, 이기적 동굴에서 공동체 구원으로.

한 국 염

 

에니어그램 유형 4번은 직관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자기 스스로에게 깊이 빠지고, 의기소침할 때가 많다고 한다. 4번 유형은 개인형으로서 예술인의 특성이 있으며, 평범한 것을 기피하고, 격정은 시기다. 함정은 진정성이 부족한 것으로서 하늘의 뜻과 일치할 때 변화가 되며, 침착해야 덕목을 유지할 수 있다.

김영운은 에니어그램으로 보는 성서인물에서 4번 유형의 대표적 인물로 욥, 요나, 이사야를 들고 있다. 그런데 욥의 경우, 아무리 4번의 특성이 고난에 민감한 형이라고는 하나, 욥이 당한 고난과 이에 대응하는 모습을 통해 4번으로서의 특질을 찾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고난을 감수하는 욥의 태도에서 고난을 기피해 동굴로 들어가려는 4번의 태도를 지양하는 최상의 모델로서는 의미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또한 이사야의 경우, 이사야가 홀로 기도하다가 환상을 본 모습에서 상상력이 풍부한 4번의 특성을 찾을 수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나타난 이사야의 모습은 성숙한 4번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가 부각되어 있어 보편적인 4번 유형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4번의 격정인 시기와 기피, 동굴심리의 전형을 보여주고, 하늘의 뜻을 따름으로 자신도 변화하고 니느웨도 변화시킨 요나를 통해서 4번의 특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1. 요나의 삶

 

요나라는 이름은 비둘기로서 평화 또는 화해라는 뜻이 있다. 예언자로서 그의 이름이 열왕기 하 14:25절에 기록될 만큼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지금의 갈릴리 가나인 가드헤벨 출신이다. 예수 시대에 가나에 요나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라는 성에 가서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고 전하라는 말씀을 듣고는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을 치려고 니느웨와는 정 반대인 지금의 스페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 바다에 풍랑이 일어 배가 요동치고 뱃사람들이 난리를 쳤으나 요나는 배 밑창에 들어가 깊이 잠을 잤다. 그 풍랑의 원인이 누구 때문인지를 찾아내기 위해 뱃사람들의 풍습대로 제비를 뽑아 요나가 뽑혔다. 요나는 자기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달아나는 길임을 이실직고 해 뱃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져 요나는 고래의 먹이가 되어 고래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뱃속보다 더 깊은 심연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요나는 고래 뱃속에서 사흘을 지내고서 홰개하는 기도,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부르는 감사의 노래를 부른다. 이 기도를 듣고 하나님이 고래에게 명하셔서 고래가 요나를 해변에 토해놓는다. 다시금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요나는 니느웨성으로 가서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하나님의 경고 멧시지를 전한다. 요나가 전하는 말에 니느웨가 회개를 하자 재앙을 면하게 된다. 그러나 요나는 심히 못마땅해져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항의하고 니느웨가 어떻게 된느지 모려고 초막을 짓고 그늘에 앉았다. 그늘이 된 박넝쿨이 시들자 기력을 잃게 된 요나는 또다시 죽기를 자청한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하룻밤사이에 나서 하룻밤 사이에 죽어버린 박넝쿨도 네가 그리 아까와 하는데, 하물며 이 큰 성 니느웨를 내가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

 

2. 요나의 격정과 함정, 그리고 성숙

요나는 엘리야, 이사야 등 대예언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열왕기 하 1425절에 이름이 기록될 만큼 특별한 존재다. 성서에 기록될 만큼 알려진 예언자로서의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고 특별한 존재로서 스스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을 것이다. 에니어그램 4번으로서 요나의 격정은 시기다. 나보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요나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니느웨로 가서 멸망한다는 경고를 하라고 하지만, 듣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다. 요나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니느웨보다 잘 되야 하지, 다른 나라가 이스라엘보다 잘 되는 것은 못 견딜 일이다. 이방인 니느웨, 이스라엘 보다 크고 부유하며,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받아가는 니느웨는 망해야 하는 대상이지 구원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직관이 강한 요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 메시지를 전하라는 것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하실 의사라는 것을 안다. 시기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이라도 내 뜻과 달라 수용할 수 없으니 도망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언자로서 하나님에게서 맡겨진 일을 피해 도망간다는 게 합당한 일인가? 에니어그램 4번 유형이 격정에 사로잡히면 자신도 모르는 새 방종이 늘어나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후퇴하고 숨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이 모습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는 것이다.

4번 유형인 요나의 함정은 기피다. 무결주의자인 요나는 니느웨를 시기해서가 아니라 이방인들이 사는 나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를 돕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기피하는, 나름 타당성 있는 핑계와 원망의 이유를 만들었다. 자기가 싫은 것을 하지 않기 위해, 그 명령을 피해 동쪽 니느웨와는 정반대로 서쪽으로 가는 다시스행 배를 탄다.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전혀 반대 방향으로 가다니! 4번이 격정에 빠지면 평소 자기가 하던 일, 해야 하는 행동과 전혀 반대의 길로 간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정면으로 나서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기피해버린다.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납득할 수도 없는 현실을 만나면 일차적으로 그 현실을 도피하면서 눈을 감고 외면함으로 문제를 해결책을 찾으려는 성향이 있다. 자신이 싫어하는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것 자체가 요나에게는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다. 이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도피하고 동굴로 잠입한다. 분노와 불평과 원망이 일어나고 체념에 이르게 되고 그 결과 동굴심리로 들어간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는 것, 풍랑이 몰아치는 뱃속에서 잠을 깊이 잤다는 것은 스트레스로 인해 동굴심리가 작용해 세상이 어떻게 되는 나 몰라라.’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뱃사람들이 픙랑을 없애기 위해 난리를 치는데도 혼자 잠에 빠져 그 현실자체를 나와 상관없는 일로 외면하고 기피해버린다. 개인주의 적 성향이 강하기에 이런 방콕이 가능하다.

 

3. 요나의 변화와 성숙

요나의 변화는 하나님의 뜻과 합치는데 있다. 제비뽑기는 요나에게 변화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였다. 요나는 제비뽑기를 통해 하나님의 길을 이탈한 자신의 모습을 새삼 자각하게 되고, 자신의 이탕로 인한 뱃사람들의 고통을 인식하게 된다.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의 길, 가야 할 길을 가지 않았음을 이실직고하고 뱃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바다에 던져진다. 이는 에니어그램 4번 유형 사람들의 이기적인 기피, 이탈이 자기가 동굴로 숨어들어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임을 보여준다. 이렇게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동기로 동굴로 들어갔던 요나는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내던져지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된다. 뱃속과는 비교도 안 되는 더 큰 심연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상태가 되면 보통의 4번은 고통을 환상으로 처리해 한 번의 기피를 하거나 자살로 처리한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선택해서 만든 동굴은 자극이 주어지면 헤어날 수 있는데, 외부에 의해 생긴 고통이나 고통이 극심해져 물고기 뱃속에 빠지듯 헤어날 수 없는 심연으로 빠지게 되면, 자기 스스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단계로까지 처하게 되는 듯하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은총의 힘밖에 기댈 수가 없다. 이걸 보여주는 것이 요나가 사흘 밤낮을 지내면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자기 성찰에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자기 모습,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해서 성숙의 단계인 침착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요나는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되고 평정성을 회복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다. 깊은 심연 속에서 침착하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된 것이다. 이때 요나의 기도는 구원해주십시오.”하는 간구가 아니라 구원해 주심을 감사하는 기도를 한다. 상상력이 풍부한 4번 요나는 그 심연의 고통 속에서 4번이 갖고 있는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고통을 승화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에게 오는 구원을 확신하고 아직 오지 않은 구원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평정심을 회복한다. 아직은 오지 않았으나 온 것이나 다름없는, ‘아직’, ‘이미의 직관을 보여주고 있다. 요나처럼 에니어그램 4번 유형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고, 또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자신을 파악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물고기가 요나를 통해내었다는 것은 요나가 새로 거듭남을 의미한다. 물고기 속에서 살아난 요나는 다시금 하나님께 니느웨에 가서 경고를 전하라는 말씀을 위임받는다. 이제 변화된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경고를 전한다. 4번으로서 감정과 정서가 풍부한 요나가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니까 니느웨사람들이 모두 회개를 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만큼 4번 유형은 호소력과 설득력이 강하다. 감정과 정서, 직관력과 호소력이 뛰어나니까 4번 중에 예술가가 많다고 한다. 암튼 요나가 격정인 시기를 버리고 이기적 불순종으로 도망이라는 기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에 자기 뜻을 일치시킨 변화는 니느웨라는 큰 성을 구원에 이르게 하였다. 이기주의적인 시기가 원인이 된 기피로 동굴에서 내 이기적인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칠 때 그 방향전환에서 공동체의 구원이 일어난다.

요나의 삶에는 또 하나의 반전이 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해 하나님의 재앙을 면하게 되자 가까스레 격정을 극복하고 평정심을 회복한 요나는 다시금 시기라는 격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큰 죽음의 고비를 두 번 씩이나 담은 심연에서 구함을 받고도 더위를 피해주게 한 박넝쿨이 말라버렸다고 차라리 죽는 게 났다.”고 항의하는 요나의 모습에서 일상의 작은 어려움, 극히 작은 고통도 견디지 못하고 불평하는 4번의 격정을 보게 된다. 박넝쿨이 죽었다고 불평하는 요나의 모습을 보며 문득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옆집 아이가 아파서 죽었다는데 한 엄마가 업은 제 아이를 가리키며 우리 아이 감기 걸려 아픈 것만 하겠어요?” 고통에 민감하다고 하는 4번의 비명은 아마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엄살로 보일 거다.

요나의 반전기사에서 박넝쿨 사건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을 보고 다시금 격정을 일으킨 요나의 태도다. 요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이기주의 적이고, 민족과의 관계에서는 자기 민족만을 아는 편협하고 배타주의적인 사람이었기에 근본적으로 변화가 없으면 그로 인해 사로잡히는 격정은 언제나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 한번 격정에서 변화되었다 하더라도 늘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나 격정에 사로잡힐 수 있음을 경고해주고 있다. 요나의 격정과 기피, 변화, 반복되는 격정, 그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작게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크게는 민족주의와 우리 안에 거주하는 이주민들을 대하는 한국사회와 교회가 어떠해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4. 요나에게서 나를 들여다본다.

요나처럼은 아니라 할지라도 나도 종종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가야할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런 것은 직관력이 발단되어서 곧 감지할 수 있는데, 때로는 다시 돌아가기가 싫거나 해야 될 일인지도 알면서 하기 싫을 때도 있다. 이럴 때 스트레스를 받는다. 요나와의 차이라면 시기 때문이 아니라 게으름 때문이다. 물론 나도 때로 시기심이 생길 때가 있다. 나보다 잘나 보이는 사람을 보면 배가 아프다. 그렇다고 시기를 해서 상대가 나빠지거나 내 자신과 비교해 깊이 상처를 받는 일은 드물다. 상대가 나보다 우월해 보이는 점이 있으면 나는 나의 다른 우월한 점을 찾아 자존심을 세우는 경향이 있다. 물론 에니어그램 4번 유형처럼 나도 스트레스를 받거나 긴장하면 두통이 생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을 때 편두통을 앓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나의 경우 문제가 생기거나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기피하거나 방콕을 하지 않는 편이다. 스트레스가 생기면 해소용으로 추리소설이나 무협소설을 읽으며 현실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잊지는 못한다. 그러니 동굴심리나 방콕에 빠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쏘다니는 편이다. 따지고 보면 추리소설을 읽거나 쏘다니는 것도 기피의 한 방법이기는 한데, 4번의 기피는 함정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깊이 빠지는 것이 문제일 게다. 나에게 요나 이야기가 자극이 되는 것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 그 심연까지 들어갔다가 간신히 하나님의 뜻과 합치를 할 결단을 하고 나와서도 니느웨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다시 격정이 되살아나는 모습, 작은 박넝쿨 하나에도 원망하고, 심지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불평을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격정은 자꾸 되살아나니 늘 깨어있어야 하겠구나, 작은 것에 목숨 걸고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작은 것에 감사하며 사는 연습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뱃속에서의 제비뽑기처럼 우리가 격정에 빠져  동굴로 기피해 갈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기회를 잘 포착해서 변화로 이끌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 중요하고, 고래 뱃속과 같은 심연에 처했을 때 그 심연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결단을 할 수 있는 은총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나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이렇게 요나로부터 개인적으로 깨우칠 게 있지만, 이주운동을 하는 나로서 요나의 이야기는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요나서는 기본적으로 선민사상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방인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임을 깨우쳐주기 위한 도구로서 기록된 것이다. 요나는 하나님이 이방인에 관심하고 사랑하고 구원하신다는 자체에 기분이 상해 반대 길로 도망을 간다. 오늘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약 200만 명 가량 되는데, 이들을 대하는 한국사람, 한국교회의 태도는 요나 못지않다. 일상에서 차별하고, 다문화반대위원회, 외국인추방대책 위원회를 만들어 이주민에 대한 증오와 편견을 심어준다. 심지어 한쪽에서 한류열풍으로 우리 문화를 해외에 퍼뜨리겠다고 기염을 토하는데 우리문화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외국문화를 배척하며 다른 문화를 갖고 있는 이주민들에게 함부로 대한다. 요나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지구인을 사랑하신다는 것, 외국인이나 우리 안에 거부하는 이주민에게 배타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민족 제일이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민족주의를 금하고 있다. 우리 민족 중심의 이주민 차별은 요나 때문에 뱃사람 모두 고통을 당하듯, 요나 하나의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주민들이 도착하는 한국사회와 출발하는 나라 모두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더 큰 고통으로 확대되기 전에 우리 사회의 외국인 차별을 없애나가야 한다. 이런 큰 원칙 말고도 우리가 관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요나는 니느웨의 구원이라는 큰 명제 앞에서도 자기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는 박넝쿨에 집착하였다. 한국인들도 마찬가지로 이주민들이 많아지면 한국인들이 일자리를 뺏기는 게 아니냐, 이주민에게 복지를 잘해주면 한국인들의 그늘이 줄어드는 게 아니냐고 불평을 하며,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이주민들을 경계한다.

 

이런 전반적인 한국사회의 문제와 더불어 한국교회가 특별히 변화되어야 할 지점이 있다. 요나서는 특별히 배타적인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씌어진 것이다. 물론 요나서에서 하나님의 길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요나가 전하는 경고를 듣고 니느웨왕이 백성들에게 금식하며 회개하라고 한 내용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저마다 자기 가던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없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치라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요나서를 외국과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기독교인 만드는 포교를 하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외국에 가서 포교를 하기 전에 우리 안에 있는 이주민들이 힘이 없다고 함부로 휘두르는 폭력을 그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이 회개를 먼저 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할 일이다. 남편에게 맞아서 갈빗대 18대가 부러져 죽은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 후인 마이사건을 재판한 판사가 이런 말을 했다. “21세기 경제대국, 문명대국이라고 하는 허울 속에 갇혀 있는 우리의 야만성을 가슴 깊이 고백해야 한다.” 외국인에게 회개를 외치기 전에 한국교회가 먼저 회개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글을 쓰다보니 나도 요나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요나의 격정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이주운동을 한다고 하면서도, 종종 내 안에 있는 인종차별의식이 되살아날 때가 있다. 죽였는데 살아나고 자꾸 살아난다. 늘 깨어 있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