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한국염
‘슬퍼하는’ 보다는 ‘애통’하는 사람이라는 번역이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슬픔을 느낄 때는 종종 있지만 애통한 경험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내가 정말로 애통해 운 적이 한번 있는데 그건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니고, 세월호 사건이 났을 때도 아니다. 광주항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참히 죽었을 때도 애통이 아니라 분노가 더 강했다. 내가 정말로 애통해 한 것은 아들 한솜이가 고3때 결핵에 결렸을 때다. 학교에서 피를 쏟고 와서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고 폐에 3센티 구멍이 생긴 것을 알았을 때다. 고3인데 학교도 쉬어야 하고 일년 이상 요양을 해야 한다는 의사 말에 기가 막혔다. 그때 한솜이는 담임 선생님이 반에서 서울대 보내겠다고 점찍은 세명 중 한명 이었는데, 서울대학은커녕 졸업도 하지 못할 판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한솜이 방에 앉아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겼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 세상에 결핵이라니? 애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난 도대체 무얼 했단 말인가? 이것저것 생각하다 문득 내 위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동안 말로는 학력 없는 세상, 학력 때문에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외치며 살았지만 정작 내 아들 한솜이는 공부를 잘해서 일류 대학에 가기를 원한 게 내 진심이었다. 이런 위선적인 내를 깨우치기 위해 한솜이가 벌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내 위선을 용서할 수 없었고, 나 때문에 고통당할 한솜이가 불쌍해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위선적인 내 모습에 대한 회개와 한솜이에 대한 연민으로 통곡을 했다. 한 시간 이상 그야말로 애통의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통곡을 하는 중에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하는 위로의 음성이 들렸다.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위로의 축복을 경험한 순간이었다.
이 위로의 말씀에 힘을 얻어 사태 수숩에 나섰다. 다행히도 한솜이는 치료를 받고 3분의 2 이상 학교출석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일류학교 진학에 대한 꿈을 접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사람은 얼마나 간교한가? 이렇게 혼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한솜이가 수능고사 4% 안에 들어 성균관대학에 진학하니 매우 기뻤다. 건강이 회복된 것도 기쁘지만 좋은 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통한 경험을 하고도 완전히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경험으로 나에게 ‘애통’은 그저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뉘우침이 수반되는 슬픔으로 정의된다.
사실상 생애를 돌이켜보면 나는 애통과는 거리가 먼 편이다. 텔레비전을 보며 따라 울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할 때 눈물을 흘리기는 해도 정작 남의 슬픔을 깊이 느끼지 못한다. 남의 슬픔에 가슴으로 위로하지 않으니 내가 위로받을 일도 드믈다. 가슴 속에서 울어나오는 슬픔이 없다. 대학교 때 병원에 입원한 급우를 일주일 이상 수업도 빠져가며 돌보아준 적이 있는데 아픈 사람에 대한 연민이나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해서 한 일이다.
이건 비단 다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는 말씀은 다른 사람의 슬픔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뜻으로도 읽혀진다. 내 경우 나를 슬퍼하지 못한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나 생명에 대한 애착이 부족한 자신을 슬퍼해야 함에도 ‘문제구나!’ 생각은 하지만 뜨겁게 반성하는 눈물을 흘려보지 못했다. 내가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정서적이든, 현실문제든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것이다보니 우선 머리가 움직이지 마음이 들어 올 여지가 없다. 다른 사람 앞에서 챙피해서 못한다고 할 수 있는데, 나 혼자 있을 때도 나 자신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다. 이미 자기 위선이 나를 지배해 애통할 줄 모르는 중병에 걸려있다.
이렇게 애통함에 무감각한 것은 내 격정인 정욕과 정의라는 함정 때문이다. 의식해서 강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것은 아닌데, 강한 모습만 보이게 되고 약한 모습을 기피하고 슬플 일에도 슬퍼하지 못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내면화되어 있다. 자신에 대한 연민을 느낄 줄 모르니 다른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거나 뜨거운 동정심을 느끼지도 않는다. 약자에 대한 관심도 정의감에서 하는 것이지 연민에서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이 누구냐?“ 묻고 민중목회, 이주민목회를 했지만 그들에 대한 연민에서보다는 정의감에서 이 일을 했다. 그러니 교인들 때문에, 이주민들 때문에 가슴 속에서 터져나오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8의 회개가 뜨거운 동정심이라는데 내가 가장 못하는 것 중 하나가 뜨거운 동정심이 없는 것이다. ‘뜨거운’이라는 말을 부칠 것도 없이 동정심도 약하다. 다른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고 예수님의 밀씀처럼 슬픔을 당한 사람과 함께 슬퍼하고 우는 자와 같이 울어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걸 알면서도 잘 되지 않는다. 뜨거운 동정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연민으로 안타까워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 짝이 없다. 문제적 나를 들여다보면 애통해야 하는데 애통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 완악해서 애통해 하지 못한다. 나는 애통할 줄 모르는 나의 모습을 안다. 소박이 덕목인데, 소박해야 진정으로 애통할 줄 알까? 진정으로 애통하기 위해서는 ‘내가 죄인입니다.”하는 고백이 있어야 가능한데 그런 경험을 하고서도 애통할 중 모른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위로를 원하기는 하는 걸까? 위로를 기대할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뜨거운 동정심’이라는 내 회개는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가능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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