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인간화와 해방을 위한 여성목회론
1.목회란 무엇인가?
1)한국개신교 여성사를 통해 본 여성목회론의 정립
나의 이야기
어려서부터 내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69년에 신학교에 가보니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왜 여자가 목사가 못되는지를 알아보았더니 성경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되어있고 여자가 가르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고 되어있다는 것과 또한 교회전통이 여자목사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유는 예수가 남자 제자만 선택했기 때문에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득 생각 난 것이 예수의 제자가 남자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원인이라면 예수의 제자는 유대인인데 그럼 왜 유대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여자에게 안수를 안주려고 별 이유를 다 끌어다 댄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기장 여신도회전국연합회에서 여목사 안수를 위해 힘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때부터 전국연합회사무실을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1974년에 우리 교단에서 간신히 여목사제도가 통과되었는데 통과 이유 또한 가관이었다. 당시 우리 교단 헌법에는 목사 안수 조건으로 “30세 이상의 사람으로...”라고 되어있었는데 이 사람에는 “남자와 여자가 다 포함되어 있다.”로 해석해서 통과가 되었다. 이 법은 그전에도 있었는데 그때까지 여자는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았나보다.이런 차별은 비단 목사 안수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어느 교회 교육전도사로 일하기로 했다. 담임목사와 만나 면접을 하는 자리에서 월급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12만원을 준다고 했다. 나는 화가 났다.왜냐하면 바로 한달 전에 학부밖에 안나온 내 남자후배가 그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는데 그 남자 전도사의 월급이 16만원인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학원 나온 내 월급이 그 전도사보다 적으냐고 했더니 나는 여자라서 그렇단다. 그래서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보다 월급이 적다니요, 신학교 다닐 때 여자라고 수업료를 반냈습니까?차비를 반냅니까?이건 명확한 차별입니다.” 하고 항의했더니 나보고 세상물정을 모른단다. 모든 한국사회가 다 여자가 남자 보다 봉급이 적은데 그렇게 억울하면 남자로 태어나지 그러느냐고 빈정대었다. 결국 나는 그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후 여신도회전국연합회에서 일하게 되었다.여기 와서 보니 교회에서의 여성들의 문제가 낱낱이 보이기 시작했다.여자들은 언제나 교회에서 식사마련등 뒷치닥거리만 하고 결의기구에는 참석못한다. 여자가 여장로를 안뽑는데 그 이유는 여자가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게 이상하고 남자보다 못미덥다고 한다. 그리고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을 댄다.그래서 일잘하는 여장로를 본보기로 추천하면 “그 장로님,여자 치고는 남자 못지 않게 일잘하대요.”라고 한다. 어느 교단에서는 여자가 목사가 되려고 하면 ‘임신해서 배가 불러가지고도 단 위에 올라갈거냐? 월경 때는 성례전을 어떻게 할꺼냐?’하는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한다고 한다. 여자 안수가 통과되었어도 청빙을 잘 안한다. 여자가 전도사로 일할 때는 괞찬아도 일단 목사고시에 통과하면 그때부터 일자리를 잃게 된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이런 차별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강단에서 목사들이 외치는 것은 정의와 사랑이다. 이런 불평등을 가부장적 유교문화에 익숙한 한국교회 여성들은 별 거부감없이 견디어낸다.뿐만아니라 이 차별이 하나님의 이름, 성경의 이름으로 햏해지기 때문에 이게 억압인줄도 모르고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인다. 이런 여성들을 대상으로 여성신학을 통한 의식화 교육을 하면 남자 목사들은 ‘왜 행복하게 잘사는 여성들에게 너는 불행하다는 의식을 심어주느냐’고 항의다. 한국교회는 유교문화를 우상숭배라고 철저히 배격한다. 그러면서도 유교의 가부장성만은 그대로 수용,교회의 가부장성을 더욱 강화시켜 나가고 있으니 알다가 모를 일이다.그러다보니 오늘날 한국교회는 일반사회 보다 더 가부장화되어 있다. 이런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한국여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목회가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2. 한국교회의 가부장화의 역사적 사회적 분석
예수가 목회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목회를 이렇게 정의하셨다.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며 주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누가 4:18). 목회란 한마디로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억눌린 사람들을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인간화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여성들을 위한 목회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철저하게 가부장적인 유교문화속에서 억압당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해방의 소식을 전해 주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데 유교문화에서 시달리는 여성들을 해방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독교의 가르침 때문에 여성이 억압당하고 교회에서 차멸당한다면 그 기독교의 가르침은 더 이상 여성에게 기쁜 소식일 수 없다. 기독교가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기독교는 한국여성들에게 해방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정착되면서 한국교회는 가부장적 성격을 강화하고 목회의 모습도 남성중심적으로 변한다. 이제 한국교회에서 여성들에게 바람직한 목회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초기교회의 모습을 알아보기로 하자.
1)기독교 이전의 가부장적 유교문화와 한국여성의 삶
기독교가 들어오기전 한국여인들은 양반중심의 계급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유교적 가부장제 하에서 희생을 강요당하며 남존여비의 억압된 삶을 살아야 했다. “부인은 근(勤)과 검(儉)과 남녀유별의 계(戒)를 알면 족하니라.독서와 강의는 장부의 일이니 부인니 이를 힘쓰면 폐해(弊害)무궁하니라.”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듯이 여성은 부계혈통을 이어주기 위한 자녀출산과 양육이 여성의 임무였고 남성을 중심으로 한 대가족제도하에서 순종과 인내를 강요당하며 살아왔다.여성에 관한 속담을 보면 146개중 135개의 속담이 여자를 무능력하고 종속적인 존재로,집에 가두어두고 길들여야 하는 존재로서 정조와 복종을 강요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예를 들어 시집살이를 묘사하는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귀머거리 삼년,벙어리 삼년,장님 삼년”. 이 말은 여자가 시집살이를 하려면 적어도 삼년 동안은 보고도 못 본척,들어도 못들은 척, 할 말이 있어도 입이 없는 사람처럼 살라는 말이다. 속담은 그 시대상과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우리 속담을 보면 여성이 얼마나 억압적인 삶을 사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천한 존재로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았다. 샤를르 달레라는 한 외국인이 묘사한 대로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한국여성의 삶은 남자의 반려가 아니라 노예에 불과했다.
이조왕권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유교적 충신관을 강조하였는데 이 이념이 여성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정절이데올로기가 강화되었다. 전제왕권제도 하에서 신하는 나라의 장인 임금에게 충성하고 여자는 집의 가장인 남자에게 충성한다는 논리다. 그래서 여성에게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늙어서는 자식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가 강요되었고 칠거지악의 윤리가 적용되었다. 유교의 본산인 중국보다 더 여성에게 억압적이었다, 남편이 죽었을 경우 개가가 금지되었는데 과부가 개가하는 것을 짐승과 같다고 여겼다. 남편이 없을 경우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재혼을 한경우에라도 절개를 잃는 것이 굶어죽는 것보다 더 큰 잘못으로 간주되었고 과부들의 재혼을 막기 위해 개가한 여자의 자식은 벼슬을 못하도록 하였다.심지어 약혼자가 죽어도 다시 결혼할 수 없었고 과부로 취급되어 수절을 강요당했다.남편을 따라 죽으면 열려문을 세워주고 그 가문에 혜택을 주었기 때문에 시집식구의 압력에 의해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교문화는 남계위주의 가족제도를 형성시켰고 이에 따라 가계는 장남의 호주상속을 통해 계승되고 이러한 전통적인 가족제도하에서는 남존여비의 사상 속에서 부계혈통을 이어주기 위한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이 여성의 임무로 되었다. 유교에서는 “효”가 매우 중요한 사상인데 조상의 제사를 받들 남아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일부 양반가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 노동을 했다.특히 상민과 천민의 경우 권력의 횡포와 착취에 시달리며 생존의 위협을 당하는 가운데 농사나 품팔이 등으로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다. 이러한 여성의 노동은 가족의 지탱은 물론 국가의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생산활동은 경제적 가치를 평가받지 못하고 가족을 위한 사적인 영역으로만 간주되었다. 여성들은 어머니와 노동자로서 이중적인 노동에 시달렸다.
이러한 억압과 악조건하에서 시달리는 여성들의 탈출구는 무엇인가? 여성들은 불교와 무속,민간신앙에 귀의하였다.당시 불교 역시 이조의 유교주의로 인해 억압받고 있었으며 무속도 혹세미만 한다고 해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여성들은 불교와 무속에 귀의함으로 현실의 억압에서 해방되고자 했다.특별히 무속을 통해 여성들은 한풀이를 했다. 굿을 하면서 한풀이를 함과 동시에 자연의 신들,인간의 혼들을 통해 자신에게 닥칠 액운을 피하고저 했다.여성들이 사회와 가정의 억압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영계에 몰입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해방을 맛봄을 뜻한다.그러나 정체모를 귀신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의탁하고 그 귀신들이 행여 자신과 가족에게 액운을 가져올 까봐 두려워하면서 섬김으로 귀신에게 예속되고 만다. 이렇게 유교의 가부장 문화에서 시달리는 때 우리나라는 중국,러시아,일본의 패권주의에 나라운명이 풍전등화 같았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 또한 여성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했다. 기독교는 이때 들어오게 되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건 어떤 내용이어야 하는가? 당연히 여성에게 해방의 기쁨을 알리는 소식이어야 했다.
2)기독교이전의 여성해방적 사상들
이런 해방의 소식은 1700년대에 전래된 천주교를 통하여 일차적으로 선포되었다. 천주교를 통해 여성들은 처음으로 만민평등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고 상하귀천 없이 교리를 배울 수 있는 천주교의 모습은 당시 여성들에게 이제까지의 삶에 회의를 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강완숙이란 여인은 양반임에도 책을 통해 천주교를 배운 뒤 ‘명도회’라는 여신도회를 조직하는 한편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도와 전교활동을 벌이다 순교당하기 까지 하였다.
천주교가 서양을 통해 들어온 사상이라 하여 이에 반대해 일어난 동학사상 역시 여성에게 평 등의 길을 제시하였다. 이 동학의 근본사상은 인내천(人乃天) 사상 즉 “사람은 곧 하늘이다”이다. 이 사상은 만민평등사상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양반계급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동학의 창시자인 최재우는 실제로 자기 집의 여종 2명을 해방시켜 하나는 양딸로 삼고 다른 한명은 며느리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동학교도들에게 “비록 부인이나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한울의 말인 줄 알고 배울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삼을 것은 스승으로 삼으라”고 권하면서 여성을 평등하게 대했다.이렇게 여성의 인격을 인정한 동학에 많은 여성이 참여했다. 이소사라는 22세의 여인은 동학농민혁명 때 두령으로서 말을 타고 장흥부를 공략하는데 앞장서므로 진보적 여성의 위치를 보여주었다. 동학농민전쟁이 실패한 후 1901년 강일순에 의해 증산교가 창시되었다. 증산교의 근본사상은 음양의 질서를 바로 잡아 혼탁한 세상을 구한다는 뜻으로 남녀간의 평등한 관계를 새로운 세상의 질서로 보고 남존여비의 관습을 타파할 것을 주창했다. 이렇게 천주교,동학,증산교등이 남녀평등의 길을 열어놓았지만 이들은 박해를 받아 널리 펼쳐지지 못했고 대다수의 여성들은 유교의 사회관습을 뛰어넘지 못했다.
3)여성에게 해방을 가져다 준 기독교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 전파된 기독교는 여성에게 구원의 빛이었다. 기독교는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게 지음받은 존재임을 일깨워주었으며 모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여성교육에 주력하였다. 선교사들은 여성을 위한 교육을 선교방침으로 정했다.여학교를 짓고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라는 교육을 실시했다, 물론 이러한 교육은 기독교를 전하는데 목적이 있었지만 기독교가 주창하는 일부일처의 가정윤리와 남녀평등사상은 여성에게 복음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기독교를 믿게 된 남자들은 첩을 얻지 않았으며 부인에게 인격적으로 대해주었다.이름 없이 누구의 엄마나 부인으로 불리던 여성들이 비록 서양식이나마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여성의 정체성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국여성에 대한 기독교의 적극적인 공헌을 역사가 문일평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기독교로 말미암아 첫째는 그네들이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소유자임을 발견하여 신신(神) 앞에는 남녀가 평등한 것을 알게 되었다.둘째는 여성이 오늘날까지 구금동양(拘禁同樣)의 옥내생활로부터 해방되어 일요일에는 교당에 가서 남성과 한가지로 청강할 권리를 얻게 되었다.셋째는 일반여성이 ‘바이블’을 읽기 위하여 조선글을 숭상한 때문에 여성사이에 문자가 크게 보급되었다. 이것은 기독교가 성행한 지방은 물론 아지 기독교가 보급되지 못한 지방에도 여성의 생활상태에 다소 변동을 주지 않은데가 없으니 기독교의 감화가 어찌 크지 않다 하리오.”
이러한 기독교의 감화를 받아 신자가 된 여성들은 복음전도자로,여성해방가로,구국운동가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인다.집안에만 은둔해 있던 여성들이 기독교를 통해 지도력을 키웠다.
기독교가 한국여성들에게 복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유교의 가부장제 문화속에서 억압당한 여성에게 남녀평등사상을 전했기 때문이며 아프리카나 남미와 달리 기독교가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한국을 개화시켜 일본,러시아, 중국 등의 제국주의의 위협 앞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민족의 열망이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수용케 한 것이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때 교인들의 입교동기는 사회적 현실적 요인이 강하였다.일반민중과 여인들은 기독교가 전한 만인평등사상 때문에 입교했고 지배층의 경우는 개화를 통한 구국의 방편으로 입교했다. 한국여성의 지위는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향상되었다.그러나 당시 유교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교회에 나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여성들이 신자가 되기로 작정한 경우 남편과 시집식구에게 박해를 받았고 쫒겨나기 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은 한 번 맞본 자유와 해방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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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해방의 복음과 가부장적 근본주의신학의 한계
그러나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여성들에게 해방의 소식이었지만 기독교가 정착한 후에는 가부장적 신학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것은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 형의 보수적인 경건주의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편에서는 여성은 남성과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성서에 있는 대로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쳤으며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을 것을 가르쳤기 때문에 바울서신의 글대로 여자안수가 허용하지 않았다. 1932년 김춘배목사가 바울이 “여자는 잠잠하라고 한 것은 그 시대 특정지역의 사정과 문화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은 여성안수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선교사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목사로부터 이단이라는 규탄을 받고 그 발언을 취소하는 사건까지 생겼다.
한국교회의 실질적인 여성지도자들은 전도부인이었다. 이들은 한국의 언어와 풍습에 익숙치 못한 선교사들을 대신해서 선교사로 부터 배운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 전도부인이 발전해서 여교역자가 되는데 이들은 남자 목사 급료의 5분의 1을 받았다. 그래서 여전도사들이 “예수께서 자유와 평등을 말씀했다고 하면서 오늘날 기독교 내에는 너무나 계급차별이 많다.”고 여전도사에 대한 차별대우를 비판하면서 남존여비의 악습을 고칠 것을 요구하나 선교사들이 가부장제 문화를 비판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 않아 시정되지 못했고 이 악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결국 서구 근본주의 신학의 한계 때문에 한국의 남존여비사상이 완전히 깨뜨려지지 못하고 기독교의 복음이 본래적인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서구문화와 기독교가 동일시되었으며 선교사의 가르침은 곧 복음 그자체로 받아들여졌다. 유대사상과 헬레니즘의 가부장적 토양에서 자라난 기독교의 복음은 서구 근본주의 가부장제의 옷을 입고 이 땅에 들어와 기존의 한국의 가부장적 유교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사회의 법과 제도가 남녀평등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실정에서 오히려 교회가 사회보다 더 가부장적 인 것은 이 미국청교도적 근본주의 선교사들이 가르친 신학의 한계 때문이다.
3. 마리아의 찬가를 통해 본 해방으로의 변혁을 위한 목회의 모델 정립
목회가 해방의 기쁜 소식을 알리고 해방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가부장적 한국문화 풍토에서 한국교회 여성을 향한 목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한국여성을 위한 목회는 사람을 사람땁게 살지 못하게 하는 억압의 문화를 해방의 문화로 변혁시켜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변혁시켜야 하는가? 우리는 이 변혁의 모델을 ‘마리아의 찬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나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이 설레입니다.
주께서 여종의 천함을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 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사람은 빈 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 누가복음 1:46-55 -
마리아가 부른 노래는 이미 널리 알려진 노래로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사무엘을 임신했을 때 부른 노래를 모형으로 하고 있다. 아들을 못 낳던 한나에게 있어서 사무엘의 임신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고 찬미의 노래를 부를 만하다. 그러나 마리아는 입장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나의 노래를 자신의 노래로 선포한다. 당시 여성에게 씌워졌던, 아니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조라는 굴레를 과감히 떨쳐 버리고 해방의 새날을 노래한다. 저주스러울 수 있는 자신의 상황을 축복의 상황으로 변모시킨다. 한나의 노래가 강자와 약자의 질서를 역전시키고 있듯이 마리아는 현재의 지배질서의 역전을 노래한다.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들의 힘을 꺾으시고 약한 자를 일으키신다. 굶주린 자들을 배부르게 하시며 부요한 자를 내치신다. 낮은 자를 들어 높이신다. 마리아는 이 노래에서 자신을 고난받고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여긴다. 구체적으로 억압 속에 살고 있는 여성, 정치적으로 눌려 지내는 힘없는 백성,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해방을 노래한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 해방의 노래 속에서 여성의 해방을 우선적으로 선포한다. 마리아는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첫째 이유로 하나님께서 종처럼 천대받고 있는 자신을 돌보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흔히들 인권운동, 노동운동, 민중운동 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경제적 문제가 해결되면 여성문제도 해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리아의 노래는 여성의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제일 먼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함을 얘기 한다.
종처럼 여김받는 여성들이 주인이 되는 것이 일차적이어야 한다. ?아무리 못난 남자도 종 하나는 거느리고 산다?는 말처럼 정치와 경제 문제가 해결된다고 여성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민중이 해방된다고 여성이 자연히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계층의 맨 밑바닥에 있는 여성의 구원이 우선되어야 한다. 가부장제 하에서 억압받는 여서의 해방이 일차적으로 들려 져야 할 기쁜 소식인 것이다.
이 마리아의 노래가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마리아가 소위 여성이기에 당하는 성의 불이익을 뛰어 넘어 해방을 노래한다는 것이다. 마리아에게서 처녀로 임신했다든지, 정조관념 따위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상의 가부장 질서 하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가치관을 깨뜨려버린다. 일반적으로 여성에게는 정조가 강요되어 왔다. 처녀성의 파기는 여자로서 결격사유가 된다. 그래서 강도들이 여성을 강간하고는 신고하지 못할 무기로 삼는다. 어떤 이유로든 정조를 상실 당하면 당한 사람들이 망신으로 알아 쉬쉬해 버린다. 급기야 이 정절이데올로기는 한국에서 여성을 고문하는 고문의 도구로까지 파급되었다. ?설마 제가 당했다고 불까?? 이런 배짱처럼 실제로 성폭력당한 여성은 자신이 당한 폭력을 숨기기에 급급하다. 당할 때 충격으로 그때부터 정상적인 삶이 깨어져버린다. 숨기는데서 오는 양심의 가책과 당한 한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과 갈등 속에서 죽은 듯이 살아간다. 여성이 온전한 삶을 살려면 이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정절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조 때문에 삶을 저당 잡혀서는 안된다. 마리아처럼 인간적인 모욕과 굴레를 뛰어 넘어서는 성의 가치전도가 필요하다. 성의 가치전도는 여성해방의 중요한 요소다.
다음으로 나는 마리아의 노래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임산부인 엘리사벳이 같은 임산부인 마리아에게 해 주는 격려, 그 격려를 받고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는 자매정신의 좋은 본보기다.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공감해주고 격려를 해주는 일, 서로가 서로를 지지해 주는 일, 이런 자매애와 연대를 통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자매애와 연대는 고난을 극복할 힘을 준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연대하듯 연대성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찌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여성해방을 위해 여성끼리의 연대는 특히 중요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마리아의 노래는 사무엘상 2:2-10절의 한나의 노래를 그 모형으로 하고 있다. 이사야 61장에도 해방의 메시지가 있고,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그의 첫 설교를 바로 이 이사야 61장을 인용해서 했는데, 마리아는 왜 유독 한나의 노래를 취했을까? 우연일까? 나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같은 여성의 격려를 받고 부르는 여성의 노래는 당연히 여성의 것을 취해야 한다. 마리아는 철저히 여성과 연대하고 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의 자매애 속에서 먼 옛날의 할머니와 연대하면서 자신이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는 세계를 꿈꾸고 노래한다. 그 연대 속에서 자신의 불리한 상황을 뛰어 넘어 자신의 해방과 이유의 해방을 노래한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때부터 눌린 자, 가난한 자의 해방자로서 여성들에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마리아는 우리 편에 있으니, 우리는 부르조아지를 분쇄하리라!?는 멕시코 여성들의 노래처럼 마리아는 해방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이렇게 일차적으로 종처럼 여김을 받는 여성들에게 해방의 노래를 들려준 다음 그 다음으로 마리아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에서 시달리는 백성의 해방을 선포한다. 백성을 억압하는 권력자를 내치고 빽 없는 사람들이 기 펴고 살 수 있는 사회,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가 해결되고 부자가 더 이상 축적을 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토록 가부장적 문화로부터의 여성의 해방을, 정치적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모든 인간의 해방을 노래한다.마리아의 노래는 우리에게 목회란 모든 사람들을 억압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인간화작업임을 보여준다.
* 이 글은 1996년 레티 럿셀교수와 함께 한 여성목회 세미나에서 발제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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