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우리 모두는 나그네다

한국소금 2019. 3. 25. 13:16

우리 모두는 나그네다.

 

본문 신명기 265-19

 

1.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차지하고 해야 할 일을 지시하신 명령이다.

첫 열매를 드리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해야 한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사람이었습니다. 이집트로 내려가서 몸붙여 살다가 크게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는데,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여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키고 학대하여 괴롭게 함으로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해, 이곳,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첫 열매를 여기에 가져왔습니다.”

이런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 경배 드리고 해야 할 일은 함께 사는 외국인과 함께 좋은 것들을 누리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십일조를 떼어서 함께 거하는 외국인들에게 레위인이나 동족인 과부와 고아에게 하듯이 나누어주라는 것이다. 이런 약속을 지키면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전제 조건이 우리 가운데 사는 외국인들과 좋은 것으로 나누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조건을 거셨을까? 그것은 이스라엘백성이 자기 조상들이 떠돌아 살며, 바로의 압제 하에서 억압받던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압제에서 풀려나 지금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 기억으로 자기 땅 안에 들어 온 외국인들을 어렵게 사는 자기 백성과 같이 돌보아주라는 것이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이 기억이다. 지금의 내가 누구인가? 나를 있게 한 내 조상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는가를 기억하는 것은 내가 어디로 나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방향 짓는다. 비단 단채 신채호 선생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내일이 없다, 이스라엘에 있는 홀로코스트 야드 밧센에 새겨진 글, 망각은 멸망에 이르는 길이고, 기억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라는 말이 아닐지라도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들의 기원에 대해 기억할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내 기원이 남의 땅에 멈붙야 살던 외국인, 이방인이었음을 기억하고, 함께 거주하는 외국인에게 잘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외국인에게 잘하는 것을 하나님 백성됨의 조건으로 다셨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만큼 외국인들에게 잘하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예수님도 난민의 경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하자 이집트로 패해갔다. 헤롯이 죽자 이스라엘로 귀환하였으나 헤롯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사렛이라는 곳에 살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예수가 바로 난민이었던 때가 있었음을 안다면,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난민을 거부하고 난민박해에 앞장 설 수 있단 말인가?

 

-. 기독교인들은 어찌 보면 모두 난민이다. 베드로전서 1장과 2장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하늘나라에 시민권을 두고 이 세상에는 잠시 머무르는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묘사하고 모든 사람을 존경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난민이요, 나그네라는 말이다. 같은 나그네끼리 차별하고 혐오할 수 있는가?

 

2. 우리 안에 거하는 외국인들

 

지금 우리나라는 200만의 이주민들이 살고 있다. 최근 제주도에 들어 온 549명의 난민들이 있다. 이주민에 대한 배타로 인해 인권문제가 심각한데, 여기에 난민들에 대한 혐오감이 더해지고 있다. 현재 예멘 나민닌 수용문제로 두가지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하나는 이슬람혐오증으로 인해 그들이 테러리스트가 아닐까, 또 외국인 범죄율이 높아질 것에 대비해 이를 막아야 한다, 일 안하고 우리 세금 빨아먹으려고 온다 등 근거없는 혐오정서에 의한 부정적인 입장이요, 다른 하나는 인류애와 인도주의 입장에서 이들을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제주도에 입국한 난민들 일부 임신부나 미성년자 부상자 등 23명이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난민반대집회와 난민에 대한 혐오를 규탄하고 난민지위를 인정하라는 수용 집회가 열리고 찬반논란이 커졌다. 우리나라는 난민 수용률이 4%도 안된다. 그런데도 난민들로 인해 국민들이 위협받는다, 난민들이 강한 범죄와 테러를 일으킬 소지가 있어 국민의 안전이 위태롭다는 가짜 뉴스가 판을 치며, 난민법을 폐지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한달만에 70만명을 넘어섰고, 제주에서 이들을 전담 지원하는 부서를 만들고 인도적인 지원을 한다는데 대해 반대 여론을 펴고 있다. 사실상 한국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보면 외국인 범죄는 전체 폭력비율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 미만으로 내국인 대비 낮은 편이며, 외국인 밀집지역이라 해서 범죄율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제주에 온 예멘 난민들이 더 배척을 받는 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이슬람신도들이기 때문이다. 종교에 대한 편견이 혐오를 부채질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이주민이나 난민을 배격하는 우리의 근원을 돌아보자. 과거를 잊어도 너무 잊었다. 대부분의 우리 역시 처음부터 이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회교고서 민족이동의 역사에서도 보듯이 우리 조상들이 중앙아시아를 떠나 우랄 알타이 산맥을 넘어 중국의 만주 벌판을 거쳐서 한반도 땅에 들어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성씨만 보아도 절반이상이 중국 성씨를 갖고 있다. 고려시대 박해를 피해 바다를 건너 온 베트남의 한 성주가 있고, 그가 화산 이씨의 시조다. 다 난민이었다. 일제에는 일제의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연해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 있다. 우리 역사 난민의 후예들이다.

이런 난민을 조상으로 둔 우리가 우리의 뿌리를 잊고, 과거를 망각하고 살겠다고 이 땅을 찾아 온 난민들을 배척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 가까이 눈을 돌려보자. 지금 일본에 한국인,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최근에 이주한 사람 말고 전에 간 사람들은 일제하 징용으로 끌려갔거나 제주 43항쟁 때 박해를 피해 간 피난민들이다. 이들을 박해하고 차별하는 일본인들에게 우리는 엄청 분노를 하면서, 살겠다고 우리에게 온 난민들을 배척하고 혐오하는 것은 모순이다. 더더욱 말도 안되는 것은 사랑을 종교의 기본정신으로 하고 있는 일부 기독교가 난민이나 이주민 배척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로 고백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도 난민 출신이었는데도 말이다.

 

3. 그럼 어떻게?  룻기를 통해 본 이주민 인권옹호 실제

 

룻기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살이 이후 주전 5세기 중엽에 씌어진 작품이다. 룻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모압 여인으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이주 노동자로 일하다가 나오미의 주선으로 보아스와 결혼한 여성이다. 룻기는 국제결혼에 배타적인 느헤미야나 에스라서와 달리 외국인이라고 차별하지 않고 서로 평등하게 자유로이 사는 것이 올바른 공동체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전통적으로 룻기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거나 이방인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이 룻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인종차별, 민족차별, 계급차별, 성차별을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이주민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국제 결혼하여 우리 땅에 살고 있는 이주여성들을 어떻게 돌보고 보호해야 하는지 좋은 귀감이 된다.

 

나그네 보호법과 이주민의 생존권보호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에 온 룻은 생계를 위해 보아스의 밭으로 이삭줍기를 나갔고 보아스는 이스라엘의 전통인 약자보호법 중의 하나인 나그네 보호법에 따라 이삭줍기를 허용한다. 이스라엘민족에게는 이주민보호를 위한 약자보호법을 지킬 의무가 있었는데 추수법과 십일조 법, 첫 열매를 드리는 법등 세 종류의 법이다. 신명기 1428-29, 2419-22, 2611-19, 레위기 199-10, 19-22, 에 의하면 이삭은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다. 이스라엘은 추수할 때 이삭을 싹 훑어 자기 집에 가져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고 추구한 곡식 한두 단을 잊어버리고 왔을 경우 다시 찾으러 갈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 곡식단은 가난한 과부나 고아, 외국인을 위한 몫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그 공동체에서 가장 힘이 없는 이주민, 과부, 고아는 공동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인데 이들의 보호와 하나님의 복은 서로 직결되어 있다. 약자 편에 서계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가난한 이들이 이삭을 주을 수 있도록 남겨놓는 전통을 만들었다. 이렇게 율법은 소외된 이주민을 보호할 것을 법으로 규정해 놓은 데서 한 걸을 더 나아간다.

 

너희 동족 가운데, 아주 가난해서, 도저히 자기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너희 곁에 살면 너는 그를 돌봐주어야 한다. 너는 그를 나그네나 임시거주자처럼 너와 함께 살도록 해야 한다(레위기 25:35). ”

 

이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이주민의 인권보호를 위해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잘 드러난다. 가난한 동족을 보호하듯이 이주민을 돌보아주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자기 동족을 이주민처럼 잘 대우하라고 할 정도로 이주민 대우가 약자보호의 이상형으로 나타나 있다. 보아스는 생존을 위해 이삭을 줍는 나그네에게 이삭을 주울 수 있는 전통을 남겨놓은 이스라엘의 법 정신에 따랐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일꾼들로 하여금 단에서 이삭을 조금씩 뽑아 흘려 룻이 이삭을 넉넉하게 줍도록 배려한다.

룻이 나오미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이삭줍기를 하듯 오늘날 한국 땅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가족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일을 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한국인들이 하지 않는 3D업종이며, 한국인들의 떨어드린 이삭과 같은 일자리다. 보아스가 이스라엘의 약자 보호법에 따라 이삭줍기를 허용했듯이 이주민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3. 이주민에게 힘을 주는 위로와 격려, 그리고 함께 음식을 나눔

보아스는 이삭줍기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물을 마시도록 허용한다. 이런 보아스의 배려에 대해 룻은 이렇게 응답한다. “저는 한낱 이방여일 뿐인데, 어찌하여 저같은 것을 이렇게까지 잘 보살펴피시고 생각하여 주십니까? 이에 대해 보아스는 댁은 친정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고, 태어난 땅을 떠나서 엊그제까지만 해도 알지못하던 다른 백성에게로 오지 않았소? 댁이 하나님의 날게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넉넉히 갚아주실 것이오.“

이주민들은 보아스의 말처럼 부모와 고향을 떠나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 사이로 왔다. 이들을 보살피는 것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 온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보아스의 말을 듣고 룻은 이렇게 응답한다. “저를 이처럼 위로하여 주시니,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힘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주민의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배려하는 일은 이주민에게 힘을 준다.

보아스는 이렇게 룻을 배려할 뿐만 아니라 식사 때가 되자 음식을 나누어 준다. “이리로 오시오. 음식을 듭시다(2:14). “ 보아스가 룻을 함께 음식을 먹도록 초청했다는 것은 더 이상 룻이 타국인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같은 한 공동체에 속한 일원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보아스처럼 우리도 이주민을 우리의 식탁에 초대해서 음식을 나눔으로 같은 식탁공동체를 일굴 필요가 있다.

 

3. 성적 착취와 성의 상품화에서 보호

룻에게 이삭줍기를 허용한 보아스의 이야기에서 특이한 것은 그의 일꾼들에게 룻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여기에서 일꾼들이 괴롭힌다는 말은 룻에게 성 희롱이나 성적 착취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보아스의 이런 행동은 이주민의 생계를 보장함은 물론 여성의 성을 함부로 짓밟지 못하도록 보호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 공동체의 법정신임을 깨우쳐 준다.

우리나라에서 이주민 여성들은 가정폭력, 성폭력의 위협 앞에 노출되어 있다. 이주여성노동자의 12%가 성폭력의 경험이 있다. 사업장 내 성폭력 경험에 있어서는 12.1%가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중 30.4%가 신체 만지는 성폭력을 당했다고 하였고, 55.6%가 한국인 직장상사에 의해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였다. 성폭력은 55.0%가 퇴근시간 이후에, 56.3%가 작업장 내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보아스가 모범을 보여주었듯이 이주여성들의 성을 착취하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일에, 이주여성들을 성의 상품화에서 존엄한 인간으로 대접하는 일에 한국 교회가 나서야 할 것이다.

 

4. 자기 권리를 적극적으로 찾도록 도와

룻이 돌아와 그날 있었던 일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말하자 나오미는 룻의 행복을 위해 보아스와 룻을 결혼시키려고 한다. 룻은 나오미의 계획에 따라 밤중에 보아스의 발끝에 가서 살며시 눕는다. 룻의 이러한 행동은 신명기 255-10절의 자식이 없이 남편이 죽었을 경우 죽은 형의 동생이 형수를 맞아들여 그 형의 후손과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는 레비라토율법에 근거한 것이다. 룻기에서는 이 레비라토 율법을 직계 형제가 아닌 집안 친척에게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가난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률의 한계가 없음을 뜻한다.

룻과 나오미는 보아스에게 레비라토 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나오미와 룻의 이러한 자세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그저 가진 자들, 힘 있는 자들의 자선이나 처분만 바라서는 안 됨은 물론 자기들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용기와 지혜로 나서야 함을 뜻한다. 인권이 무시되는 불의한 사회에서의 권리회복은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에서 비롯됨을 룻과 나오미가 가르쳐준다. 이주민의 권익보호 문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산업연수생으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에 대해 항의했을 때 처우개선이 된 사례가 있다.

지금 한국에는 이주여성들을 위해 일하는 단체들이나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이주여성들의 인권이 향상되도록 법을 개정하고 국민 의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계가 있다. 룻과 나오미처럼 이주여성 당사자 스스로가 일어서야 한다. 이주여성과 함께 하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주여성이 자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4. 법을 제정하고 악법을 바꾸는 일에 앞장

나오미와 룻의 소망을 안 보아스는 나오미 집안의 유산지분으로 있는 땅을 속량시키고 이를 통해서 레비라토법을 이행하려 한다. 레위기 2524-28절의 속량법에 의하면 누가 가난하여 땅을 팔 경우 가까운 친척이 사서 나중에 형편이 좋아질 경우 되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 능력이 없어 되살 수 없다 해도 희년에는 되돌려주어야 한다. 보아스는 이 법에 따라 나오미의 제일 가까운 친척을 찾아가 나오미가 팔려고 내어놓은 땅을 사라고 한다. 그 친척이 사겠다고 하자 그 땅을 사는 대신 룻에게 레비라토법을 이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오미에게서 밭을 넘겨받는 날 당신은 고인의 아내 모압 여자 룻도 떠맡아야 하오. 그리하여 고인의 이름을 이어 그의 유산을 차지할 사람을 낳아주어야 하오(룻기 4, 5).” 그러자 자기 재산만 손해 볼 것 같아 그 친척은 자기 속량자의 의무와 그 권리를 포기한다.

그러자 보아스는 나오미의 땅을 사기로 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마홀론의 아내 모압 여자 룻까지도 유산과 함께 아내로 얻었습니다. 나는 고인의 이름을 이어 그 유산을 차지할 사람을 낳아주어서 고인의 이름이 그 형제들과 함께 남아 이 고장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룻기 4, 10).” 본래는 별개인 속량법과 레비라토법을 서로 뒤섞어 적용하고 있다. 이 상황은 우리에게 힘없고 가난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어떤 법 보다 우선하며 또한 가난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률마저 바꿀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5. 종교를 초원한 새 날을 여는 사람들의 연대

 

룻은 모압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힘없고 소망을 잃은 나오미와 동행하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자기 의지를 밝힌다.

 

어머니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내리신다해도 달게 받겠습니다.”(룻기 116-17).

 

룻은 나오미와 함께 하기 위해 자기 일신상의 편안함은 물론 민족과 종교까지도 포기한다.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하는 본문 즉 룻이 자기의 신을 포기하고 나오미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겠다고 한 것에 대해 한국교회에서는 기독교우월주의를 내세우거나 시집을 왔으면 시집종교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룻이 나오미의 고향을 자기 고향으로, 나오미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기로 한 것은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맹목적으로 따른다거나 기독교의 우월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나오미와 함께 떠나는 룻의 이야기는 외롭고 힘없는 여성에 대한 한 여성의 민족과 종교를 초월한 자매정신과 연대성으로 파악해야 한다.

진정한 연대란 룻처럼 힘 가진 자가 약한 자의 편에 서서 철저히 자기 것을 포기하는 데서 가능하다. 세계화 시대에 고통받는 이주민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룻과 나오미가 보여준 자매애와 연대정신이 필요하다. 오늘날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에게 관심을 갖는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이주민의 인권문제 보다는 이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그러나 진정한 형제, 자매애는 자기가 갖고 있는 강한 힘을 바탕으로 개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한 상대의 종교를 포용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편에 서는 것이다.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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