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잉태
2004년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오늘을 바라보면 희망을 볼 수 없는 때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곳곳에서 탄식소리다. 서민경제가 바닥을 치고, 곳곳에서 탄식과 한숨소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고, 빈부의 차이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국회는 국정에 관심 없이 힘겨루기에 여념이 없고 4대개혁법안은 물 건너 갈 조짐이 보이고. 노동계는 비정규직 노동자 양산문제, 빈민들은 생존권 문제, 이주노동자들은 강제추방문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다. 어느 곳에서 희망을 볼 수 없다. 미국에서는 극우파 부시가 대통령에 재선되어 한반도의 정세가 어떻게 변할지 불안하고. 곳곳에서 희망적인 조짐이 보이지 않아 암울하기만 하다. 이러한 때,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가? 무엇을 기다리는가? 어둠이 깊어가고 있다.
그런데 성서는 이렇게 밤이 깊을 때, 그곳에 바로 희망이 잉태된다고 말하고 있다. 깊은 밤은 새벽이 오는 징조임으로 희망을 가지라고 설득한다.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거칠 날이 온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친다(이사야 9장1-3).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하나님의 희망의 메시지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스블론과 납달리 땅, 이방 사람들이 살고 잇는 갈릴리 지역을 지시하고 있다. 이 지역은 이사야가 지적한 대로 멸시받는 땅, 희망이 없는 땅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희망이 없는 땅을 선택해서 희망을 불어넣어주신다. 지금은 어둠 속에 있으나 곧 날이 밝는 새벽이 오고 빛이 동터오를 것이다‘ 어둠이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 좌절하지 말라! 그 희망의 징표, 어둠을 물리치는 새벽이 와 빛이 비치는 징표가 바로 평화의 왕이라고 불리울 한 아기의 탄생이다. 그 아기가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대림절 기간에 있다. 2004년 대림절에 우리에게 희망의 아기가 기다려진다. 마치 엣날 2000년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를 기다리듯이 우리를 구원해 줄 메시야가 기다려진다. 이스라엘은 수백년동안 이민족의 침입으로 나라를 잃고 나중에는 로마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로마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도무지 이스라엘에게 희망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기득권 층의 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정경분리 정책에 말려들어 적당히 안주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체념하며 살아가고 있는 때였다. 이런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성서에 예언된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며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실날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새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희망의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은 메시야라는 희망의 씨앗을 잉태하게 하신다. 이 메시야를 보내시면서 하나님은 독특한 방법으로 희망의 징조들을 보여주신다. 오늘 본문의 잎에 보면 세례요한의 탄생이야기가 나온다. 세례 요한은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즉 새 날을 알리는 사명을 띠고 잉태된 예언자다.
그런데 이 세례 요한의 탄생 신비는 희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사가랴는 자녀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자식을 낳기에는 이미 나이가 많았고, 그 아내 엘리사벳도 임신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갸랴가 성소에서 분향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그가 원하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그 아기는 주의 길을 예비할 아기라고 예언을 하신다 . 얼마나 신방성이 없었으면 사가랴가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고 반문을 할 정도였으나 엘리사벳이 임신을 하였다.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포기하던 그런 사람을 통해 새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예언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희망이란 불가능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세례요한의 잉태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역시 희망 없는 가운데 희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세례 요한의 잉태 예언이 있은지 여섯 달 후에 천사 가브리엘이 나사렛 동네에 사는 마리아에게 예수의 잉태 예언을 한다. “ 두려워 하지 말라,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라. 그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은 1장 23절에는 그 아기 예수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그 예수란 이름의 뜻은 임마누엘이고 기록되어 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다. 예언서에 의하면 메시야는 다윗 왕가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되어 있다. 비록 다윗의 가문에 속한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했다고는 하나, 메시야가 나사렛 출생이라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상식에 어긋난다. 나사렛이란 폭도들이 사는 곳이고 천민들이 사는 곳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나다나엘이 예수가 예언자라는 사실을 부인했을 정도로 나사렛은 버림받은 땅이었다. 이런 곳에 사는 마리아를 메시야를 잉태할 어머니로 점찍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더더욱 그 예수를 잉태할 마리아는 아지 처녀였다. 마리아가 자기는 처녀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묻자 천사가 대답한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나이 많아 월경이 그친 엘리자벳이 임신을 한다는게 모순이요 희망이 없는 이야기라면, 마리아의 경우는 더더욱 불가능한 경우다. 그런데 천사는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로 이 불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차단해 버린다.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한다.” 보십시오. 나는 주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하시고자 하는 경륜은 헤아릴 수 없음을 드러낸다. 인간의 상식을 넘어선다. 희망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기다리기는 했지만, 너무 그 기다림이 오래 모두 포기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은 전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희망을 이루어주신다.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잉태한 이야기, 동정녀인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이야기는 희망 없는 상태, 가망 없는 상황이 어떻게 희망 있는 이야기가 되는 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징이다.
2004년의 대림절 길목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갖고 있는가? 끝없는 밤이 계속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떨고 있지는 않는가? 세상 사람들이 다 틀렸다고 절망해도 신앙인은 불가능 속에서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다. 신앙인은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을 믿는 사람들이기에 절망하지 않는다. 비록 어둠 속에 있을 지라도 희망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으로 “나는 주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응답하면서.
2004년 12월 첫째주 청암교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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