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주기도문 10 - 일용할 양식과 하나님 가족

한국소금 2019. 3. 26. 18:00

일용할 양식과 하나님의 가족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지난 두 주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기독교인의 삶의 양식이 그날의 양식에 만족하는 삶임을, 나만을 위한 양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양식을 구하는 것임을, 그리고 일용할 양식이란 기본적으로 빵을 말하지만 포괄적으로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내포하고 있음도 살펴보았다.

따라서 일용할 양식과 가정의 관계에 대한 기독교인의 삶의 양식에 대해 말씀을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일용할 양식이 우리 생존에 필요한 것을 뜻한다면 가정도 하나의 일용할 양식의 하나다. 그렇다고 모든 가족이 일용할 양식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어떤 가족이 일용할 양식의 정신에 맞는 가족인가? 이에 대해 우리 공부방의 역사를 경험으로 통해서 같이 모색해보기로 하자.

 

지금은 지역아동센터에서 의례 저녁식사를 제공하지만 초창기 우리 공부방에서 아이들에게 저녁식사를 제공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아이엠에프가 터진 어느날 추운 날인데도 길에서 맨발로 놀고 있는 여자어린이 두 명을 발견하고는 공부방에 데려왔다. 배고프다고 해서 밥을 주었더니 두 그릇이나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웠다. 그 저녁식사가 그 아이들이 그날 먹은 유일한 끼니였다. 아침은 굶고, 학교에서 1,2학년은 급식을 안주니까 건너뛰고....다음날 밥을 먹으면서 미희가 시키지도 않은 말을 한다. “우리 엄마는 거짓말쟁이예요. 공장에 일하러 간다고 해놓고는 안 들어와요.” 이런 아이들이 제법 많았다. 엄마가 나간 자리는 비어있고 아빠는 아이들을 챙길 줄 모른다. 돈을 좀 버는 사람은 아이들이 가게에서 외상으로 먹으면 가끔 와서 갚아주기는 하지만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굶기 일 수였다. 엄마가 집 나가 가정이 깨어지고 그 속에서 찌든 아이들을 보며 화가 난다. 이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때때로 여성해방에 대한 회의가 생길 때도 있었다. 엄마의 해방을 위해서 아이들이 희생당해도 좋은가? 도대체 모성은 어디 갔는가? 자기 좋자고 아이들을 버려두고 나가면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회의도 잠시, 곧 집을 나갈 수밖에 없는 엄마들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가끔 아이들을 목욕시키다보면 아이들의 몸에 퍼렇게 멍이 들어 있고 채찍 자국이 나 있다. 아빠에게 구타를 당한 것이다. 아이를 때리는 아빠의 경우 십중팔구 아내구타로 이어진다. 매를 맞고도 모성 때문에 집에 남아야 하는가? 가난 때문에 먹고 살기도 힘든데 매까지 맞으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아이엠에프 후유증으로 경제적 이유 때문에 집을 나간 엄마도 있지만 남편의 술과 폭력 때문에 집을 나가는 경우가 많다. 가정파괴의 원흉은 아이엠에프 때문이라기보다는 남편의 폭력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어쨋든 공부방에서 밥집을 하면서 가정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성의 문제, 부성의 문제, 혈연중심주의, 남성중심의 가족제도, 결혼은 꼭 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 성서는 과연 대안이 있는가? 등등.

 

1. 성서는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정당화한다?

성서는 가족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가족에 대해 연구를 하는 신학자들은 가족의 기원을 성서에서 찿고 바람직한 가정상 역시 성서를 통해 모색하려고 한다. 실제로 구약성서의 첫 시작이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창조되었으며 그들이 어떻게 가족을 이루게 되었는가? 로부터 시작하고 있고 신약성서의 첫 시작 역시 예수의 족보로 시작될 만큼 성서는 가족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성서들이 가부장적 가정상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상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인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혈연중심적 가부장 가족제도를 모범적인 가족제도로 인지하도록 만드는 족장사, ‘가정생활 지침이라고 이름 붙은 골로세서 3:18-4:1, 에베소서 5:21-33,베드로전서 2: 11-3:12의 가정규례들은 아내로 하여금 남편에게 순종하도록 명령하고 있고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도 명령자와 복종자의 관계로 설정되어있다. 물론 이들 가정규례들의 후반부에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라거나 약하니까 도와주라거나 하는 등 행동규범을 지시하고 있으나 실제로 가정규례의 가부장성을 약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부장적 가족주의는 예수님의 가족관에 의하면 철저히 부정되고 없어져야 할 비판대상이다.

 

대안가족모델로서의 밥상공동체

예수는 혈연주의를 부정하신다. 마가복음 3: 31-35에 보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과 누이들이 예수를 찾아왔을 때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형제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또한 한 여인이 예수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다고 했을 때 이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여인이 복이 있다.”고 했다. 예수님은 혈연이라는 이유로 뭉친 가족주의를 거부하신다. 생물학적 모성주의와 혈연중심의 가족주의는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이루는데 장애요인이 된다. 실제로 예수님의 가정은 가부장적 혈연주의를 깨고 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자신의 아이가 아닌 예수를 받아들여 기꺼이 예수의 아버지가 되어 한 가족을 이루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상에서 임종시에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에게 부탁하면서 새로운 모자관계가 형성되도록 했다. 이후 마리아는 그 한 제자의 어머니에서 나아가 모든 제자들의 어머니가 되었고 이렇게 새롭게 형성된 가족공동체가 오순절 성령사건의 주역들이 된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 ‘민주화 가족실천협의회어머니들과 이들의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형성함을 경험한다. 민가협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민주화투쟁에 바치고 그 자식들의 정신을 잇기 위해 협의회를 구성하고 또 다른 젊은이들을 위해 투쟁했고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모두는 사람들과 가족과 같은 연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미 여기에는 혈연의 벽을 뛰어넘은 이념공동체로서의 가족관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이란 다른 말로 식구라고 한다. 이는 한 상에서 함께 밥을 먹는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가족이란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을 뜻한다. “화이어라는 책에서 로절린이란 한 흑인 여성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남의 집을 전전하며 보모로 일했다. 그런데 한 목사의 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밥 먹을 시간이 되자 그 목사의 부인이 로절린에게 함께 와서 밥을 먹자고 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식탁에 초대되었다. 그녀는 그때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 했다. “내가 그들과 한 식탁에 앉아 밥을 함께 먹을 때 나는 비로소 그들과 한 식구가 되었음을 느꼈다.”

 

함께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는 것은 가족의 개념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도행전 244-47절에 보면 신도의 공동생활이 나온다. “믿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소유물울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날마다 한마음으로 집마다 빵을 떼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함께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그 공동체가 바로 성서에서 배울 수 있는 대안 가족공동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자나 민중교회목회자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밥상공동체운동을 일치시키고 있다. 예수가 이루려고 했던 공동체는 모두가 한 식탁에 둘어 앉아 먹고 마시고 그래서 잔치 집처럼 기쁨이 넘치는 그런 공동체였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떡과 잔을 나누던 최후의 만찬도 바로 이 밥상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가족관계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혈연가족, 가부장적 가족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새로운 가족관을 가질 때, 그때 비로소 우리나라에, 전 세계에 일용할 양식이 은총으로 주어진다. 우리는 어떤 가족을 이룰 것인가?

 

20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