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주기도문 11-일용할 양식, 생명의 양식

한국소금 2019. 3. 26. 18:06

일용할  양식, “생명의 양식

 

 

일용할 양식은 생명의 보존을 위한 양식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을 살찌우는 영혼의 양식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을 때의 그 빵은 단순한 일용 양식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통해 세리들과 죄인들에 대한 구원의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그 사건은 단순히 사람들을 먹이신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의 양식, 영혼의 양식을 체험하는 기적의 순간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공동식사는 일용할 양식의 의미만이 아니라, 주님이 행하신 사랑의 일들을 기억하고 함께 친교를 나누며 주님의 길을 따르고자 온전히 결심하는 자리였습니다.

 

본문의 요한복음서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생명의 빵(6:49)'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며, 이 빵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6:51)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한 유대인들과 제자들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먹으라는 것인지, 그리고 마시라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이해합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6: 63)

 

양식을 나누는 행위는 단지 육적인 행위 일뿐 그 안에 예수님의 말씀의 영, ,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극적이게도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의 양식, 생명의 말씀을 먹지 못한 불신앙 때문에 당시 무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성서는 증언합니다. (6:66) 그러나 이러한 무리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 모습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과 무리들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영혼의 일용할 양식을 함께 나누기 보다는, 함께 친교하고 주님이 주신 사랑을 나누기 보다는, 바쁘게 끼니를 잇고 또 다시 개인적인 일들로 바쁘게 돌아가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런 모습은 당연한 결과처럼 느껴 질 수 있는 우리 일상의 모습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핵가족화 되어 있는 현대 사회 속에서 개인은 가족과 이웃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보다는 자신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시간을 절약하고 빠르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의 대부분의 가족들이 일주일에 한번 다함께 밥을 먹는 시간을 갖기조차 어렵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일용할 양식을 함께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함께 한 식탁을 통해서 우리는 단순히 식사를 하는 것만이 아닌 우리의 친교와 사랑을 나누고 한 식구로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일들에 대해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와 함께, 어떻게 먹었느냐, 사랑과 관심을 함께 나누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식사시간은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하고 기분이 좋지 않은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공부방에서 이런 경험을 많이 하곤 합니다. 아이들끼리도 서로 싸웠을 때에는 같은 식탁에서 먹지 않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싸움을 지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서로 쳐다보기도 싫어합니다. 또 어떤 즐거운 일들이 있을 때에는 아이들이 더 기분이 좋아져서 시끌벅적 웃으면서 식사를 하기도 합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편식을 하는 아이들은 선생님이 관심을 가지고 싫어하는 반찬을 먹을 수 있도록 유도하면서 먹기도 합니다. 오늘은 학교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 서로 나누면서 먹는 모습은 그 자체로 서로에 대한 관심입니다.

 

얼마 전에는 새로 들어온 두 자매로 인해 아이들의 모습이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밥시간을 통하여 아이들이 두 자매를 서로 챙겨주며, 드러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살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기 자신만 알았던 아이들이 두 여자 아이들을 아껴주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 혼자 더 간식을 많이 먹으려던 아이들이 그 두 자매를 챙기면서 자신의 간식을 나누어 주고, 고기만 좋아하고 야채를 싫어하던 편식하는 아이가 그 두 자매의 편식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다 잘 먹어야 건강해 지는 거야.’라고 말해 주는 모습을 볼 때면 정말 이기적이기만 한 것 같았던 아이들이 다르게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두 자매는 엄마가 집을 나간 후,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자매는 아버지의 밤 직장 생활 때문에, 그나마 아버지로부터도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해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끼니도 거를 때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오빠가 생겼고 언니가 생겼고 동생도 생겼습니다. 특히, 이 두 자매는 식사 시간을 제일 기다립니다. 공부방에 들어서자마자 ~ 밥 냄새!! ~ 맛있겠다.~!! ~ 빨리 밥 먹고 싶다~!!’ 라고 하는 말은 아이들이 얼마나 밥시간을 기다리는지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사실 저는 처음에는 이 시간이 아이들에게 허기를 채우는 시간이려니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이 지나고서야 이 시간이 이 아이들에게는 관심 받고 사랑을 느끼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이 아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시간인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공동식사를 통해 아이가 그동안 얼마나 혼자서 인스턴트식품으로 배고픔을 채우고, 무조건 기회가 되었을 때 많이 먹어두려는 욕구불만족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보고 제 마음도 아프고 이 아이들을 더 위해주고 싶은 마음을 진정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공동식사의 모습이 요즘에는 없어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왜냐하면 정부가 지역아동센터 급식의 투명성을 위한 새로운 시스템을 실행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지급되는 한 끼 3,500원의 지원을 아이들에게 카드로 지급하고 지역아동센터는 하나의 식당이 되어 카드를 결제해야만 식사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함께 식사를 나누고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예절을 배울 수 있었던 지역아동센터의 식사 문화가 완전히 뒤바뀌어 지고 선생님은 식당의 주인이 되어버리고 아이들은 소비자가 되어 버리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 카드는 카드기계가 있는 다른 식당에서도 사용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아이들이 다른 곳에서 먹고 올 경우에는 미리 만들어 놓은 식사가 불필요해지게 됩니다. 결국 지역아동센터 선생님은 함께 사랑과 관심을 나누고 함께 식사했던 선생님으로서가 아니라 매번 끼니때마다 카드를 결제해 주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지역아동센터 급식의 투명성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에 결국 우리가 갖고 있는 소중한 것들이 빼앗길 위기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바로 아이들과 함께 느꼈던 천국의 기쁨이 우리의 식탁에서 더 이상 유지 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우리 식탁속의 생명의 양식에 대한 위기는 단지 공부방의 이야기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제도적인 상황 때문만이 아닌 우리의 모습 속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한 신명기 기자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생명의 양식이 없는 삶, 우리가 공동체 식사를 통해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예수님의 행적을 기억하지 못하며, 그렇게 살아가겠다고 암묵적으로라도 함께 다짐하지 못한다면, 그 자리가 곧 죽음의 식탁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기억하라고 말씀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이를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음식을 나눈 다는 것은 단지, 먹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함께 주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곧 생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빵이 멀리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셨던 생명의 양식을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웃들과 식탁에 함께 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서로를 사랑해 주면서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서로를 돌볼 때, 이 양식이 곧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함께 하는 식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기까지 주신 사랑을 경험하고 예수의 살과 피의 나눔을 통해 모두가 한 형제자매로서 풍요해지고 이 세계의 불의에 저항할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에게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식탁을 함께 나누고 생명의 양식을 맛 볼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그 생명의 식탁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매 순간 이를 기억하고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의 양식으로 배부른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