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꾼들의 사색터

주기도문 12-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 같이-함부로 정죄하지 말라.

한국소금 2019. 3. 26. 18:21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하는 기도는 매우 무서운 기도인 것 같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못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는 조건차럼 들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태복음 614-15절의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에 이은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주시지 않을 것이다.” 라고 조건을 달고 있다. 그러니 이 기도를 하기가 겁이 난다. 우리는 늘, 아무 생각 없이 이 기도를 반복하지만, 생각할수록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하는 이 기도는 함부로 쉽게 할 수 없는 기도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잘못을 용서해주지 못한 어떤 이는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 이 대목이 나오면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웃으운 이야기 같지만 아무 생각없이 이 기도를 하는 사람 보다는 차라리 이 사람은 양심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여러분은 어던가? 이 기도를 자신 있게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정말로 이 기도는 조건부 기도인가?

 

이 기도의 참 뜻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 남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의 죄를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배경이 있다. 마태복음 1823절 이하의 악한 종의 비유에서 보듯이 일만 달란트를 빚진 관리가 주인으로부터 빚을 탕감 받고 나서 그 주인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고작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가혹하게 했기 때문에 결국 주인이 괘씸하게 여겨 그 악한 종을 감옥에 넘긴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용서를 받은 사람들인데,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바로 그 악한 종처럼 하나님 앞에서 괘씸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는 하나님의 크나큰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므로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작은 잘못을 한 사람은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용서받은 사람의 당연한 도리를 말씀하고 있다.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남을 용서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잘못한 남을 용서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쉽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그런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 우리는 남의 잘못을 용서할 수 없을까? 우리 마음의 완악한 탓도 있지만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가혹한 우리 중심의 잣대 때문이다. 우리는 이중의 잣대를 갖고 있다. 자신에게는 넉넉한 자를, 남에게는 좁은 잣대를 적용한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대변하는 것도 우리가 얼마나 이중적인 잣대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다.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을 가장 잘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 마태복은 71-5절의 말씀이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잇는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를 빼내려고만 든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단적으로 위선자라고 지적하신다. 자기가 큰 죄인인줄 알면 다른 사람의 잘못은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쉽게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이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736-50절의 말씀은 예수께 향유를 바른 여인의 이야기다. 그 내용은 용서받은 여인의 이야기다. 한 여인이 예수께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울면서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았다. 그 여인은 속칭 주변에서 죄인이라고 비난받던 사람이었다. 주변에서 이걸 보고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께서 죄인과 상종한다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오히려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나무라신다. 당시에 손님을 맞는 풍습은 손님이 오면 주인은 그 손님의 발을 씻기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는 것이 풍습이었다. 주인 시몬이 이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손님인 예수께 대한 결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행동을 보며 주인은 반성하지 않고 단지 그 여인이 죄인으로 손가락받는 여성이었다는 이유로 여인과 예수님을 비난했다. 예수님의 눈에서 보면 여인이나 주인 바리새파인 시몬이나 다 죄인일 따름이다. 둘 다 죄인이지만 그 여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용서받을 것도 없다는, 그런 교만한 사람이었다. 이런 둘의 상태를 비교해보면 시몬의 경우 자기 눈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를 보면서 그걸 빼내라고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여인은 자기 눈의 티를 대들보처럼 생각하고 참회하는 행동을 보인다. 예수님은 이런 여인을 더 많은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구원을 선포하신다.

 

예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본문에 나오는 시몬처럼 자기는 경건하고 거룩한 자로 판단하고 다른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정죄하였다. 그래서 심판하기를 좋아했다. 요한복음 8: 1-11에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 한명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율법을 들먹이며 심판을 강요하다. 이때 예수님은 그런 무리를 행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한다. 그러자 하나 둘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자리를 떠나갔다.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이제부터 죄를 짓지 말라.”

 

흔히 사람들은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대들보 보기를 좋아한다. 우리 눈에 대들보가 있기 때문에 남의 좋은 점을 보기 보다는 단점이 더 잘 보인다. 자연히 남을 격려하는 말을 하기 보다는 비난하는 말을 해 남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다 보면 비난이 습관이 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기를 깎아내리게 되고 주변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불평과 불만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부부와 자녀, 동료와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도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인색한 잣대로 심판하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남을 심판하는 그 잣대로 자기도 심판받게 된다.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힌 만큼 우리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입힌다.

 

나는 바른 말을 잘 하는데,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상처를 많이 입힌다. 다른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기 보다는 비판하는 자세로 보기 때문이다. 나부터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심판적인 자세 때문에 상처를 입는지 헤아려보려고 한다.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주어야 할 애정과 사랑, 칭찬과 격려, 신뢰 대신에 심판을 주로 했고 그로인해서 상처를 입혔다면 그것도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이다. 이건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이런 일을 하지 않아서 내가 상처 입는다면 그들이 나에게 빚을 진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시고!“ 하는 기도는 우리에게 심판이 아니라 관용의 마음을 키우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200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