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건너지 못하는 강

한국소금 2019. 3. 27. 18:18

건너지 못하는 강

 

고등학교 기하시간에 수학 선생님은 기하 문제를 풀 때면 언제나 여기 건너지 못하는 강이 있다.”라는 말로 수업을 시작하곤 하였다. 어떻게 하면 그 강을 가징 짧은 거리로 건널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내가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후로는 그 건너지 못하는 강이 임진강으로 다가와 가슴이 아파지곤 한다. 어떻게 하면 임진강을 쉽게 건널 수 있을까? 임진강이 기하문제처럼 쉽게 풀릴 수 있는 날이 언제일까?

 

건너지 못하는 강’, 그 임진강을 나는 1살 때 건넜다. 비록 어머니 등에 업혀서지만. 그 임진강은 우리 가족에게는 사상의 자유를 의미했다.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얍복 강을 건너야 했듯이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사상의 자유를 위해 임진강을 건너야 했다. 우리가 임진강을 넘어올 때 그 임진강은 건너서는 안 되는 강이었기에 목숨을 건 결행이었다.

해방이 되고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지 결혼하지 않고 온자 살려던 나의 어머니는 그 결심을 무너뜨리고 결혼을 하였다. 소련군이 여자라면 닥치는 대로 겁탈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단지 똑똑하다는 이유 하나로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 가난뱅이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 대가로 일생 신물 나게 가난을 겪어야 했다. 어쨌든 28살의 늙은 신부는 결혼해서 제대로 남편과 살아 보지도 못했다.

남편,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는 일제시대에도 사상범으로 고생했는데 북한이 공산치하에 들어가서도 사상범으로 몰려 감옥행을 일삼았다. 만일 아버지가 남한에서 오래 사셨다면 남한에서도 사상범으로 몰려 고생했을 건 뻔하다. 아버지의 기질로 미루어 유신이라든지 보안법 등을 그냥 보아 넘기진 못했을 떼니까.

 

빠삐용처럼 억압이라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나의 아버지는 마침내 남하를 결심, 어머니는 나를 등에 업고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룹으로 안네원 한 명을 사서 산을 넘고 밤을 틈타 임진강을 넘어야 했다. 그런데 안내원이 우리 부모를 닥달해댔다. 왜냐하면 당시에 나는 지족한 울보였는데 만일 내 울음소리를 듣고 북한군이 임진강을 건널 때 총질을 해 일행이 모두 몰살당하면 어쩌겠느냐는 것이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등에서 자고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나를 임진강에 던지자고 어머니에게 제안하자 어머니는 살아있는 생명을 어떻게 그러느냐? 차라리 같이 죽겠다고 버텼다. 결국 아버지와 일행은 어머니와 나를 남겨 놓은 채 배를 타고 먼저 떠났다.

망연자실 서 있던 어머니는 막연한 가능성을 가지고 걸어서 강을 건너기로 결심하고 임진강 상류로 올라갔다. 이미 늦가을이라 물이 찼다. 어머니는 나를 조금이라도 덜 젖게 하려고 연신 등에 업은 나를 치켜 올렸지만 물은 어머니의 허리를 넘었다. 나는 그 차가운 물에 발이 잠기는데도 어머니 등에서 세상모르고 잠을 잤다고 한다. 임진강을 다 넘어오자마자 내가 깨어나서 울었다고 한다. 내 명은 그때 이미 보장받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임진강을 넘었지만 나와 같이 임진강을 넘던 수많은 아기들이 임진강에 던져져 미처 울 사이도 없이 죽어버렸다.

임진강을 건너고 나서 어머니는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우리 전에 건너던 배에서 한 아기가 울려 하자 아기 아버지가 아기를 물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아기 엄마가 뛰어내려버렸다. 어이없어하던 아기 아버지는 아기와 부인을 잃고 살아서 무얼하나?” 하고는 자신도 뛰어내렸다. 살아남아 강을 건너야 했던 사람들의 무거운 마음도 마음이려니와 임진강에 버랴진 그 많은 아기들의 원혼과 어머니들의 한은 어디서 어떻게 만나고 있을까?

임진강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기금도 그 일을 회상한다. 그 일을 회상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다. “라마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해하는 소리, 자식을 잃꼬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구나!”

성서의 라헬은 살아남아 애곡할 처지라도 되었지만 임진강은 그 라헬마저도 삼켜버린 채 지금까지 건너지 못하는 강이 되어 흐르고 있다.

 

임진강 사건은 그야말로 나에게는 생명의 가늠쇠이기도 했지만 내가 나의 아버지를 비롯한 남성이 가진 부성의 실체와 자식 따라 목숨을 버리는 부성성에 대해 어려서부터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강과 결부된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나는 이 이야기를 알고 나서부터 아버지하나님과 그리 친하게 지내지 못하였다. ‘하나님!’ 하고 기도하면 포근한 마음이 드는데 하나님 아버지하고 기도하려면 나를 임진강에 던지려 했던 그 아버지가 연상되곤 하였다.

또 하나님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보내셨다고 하는 이론에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어 별로 감격해하지도 않았다. 그때 우리 아버지에게 자식은 나밖에 없었다. 그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대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물에 던져 죽이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예수를 이 당에 보내 죽게 했다는 게 그리 새삼스러운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도 별 수 없구나! 하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나를 임진강에 던져 버리려 했던 그 아버지도 6·25 때 피난길에서 국군의 총에 맞아 개죽음을 하고 말았다. 남해 섬으로 피난 갔다가 전쟁이 어떻게 되었나 정황을 알아보러 육지로 나왔다가 남한 군인의 총에 잘못 맞아 길에서 객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자유를 찾아 남으로 왔다가 아군의 총에 맞아 죽다니, 팔자도 참 기구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부터 나는 비록 밉살맞은 아버지였지만 도대체 군인이라는 것에 정이 들지 않았다.

 

한동안 우리는 전쟁미망인을 위한 모자원에 산 적이 있다. 이 모자원은 군경 미망인과 일반 전쟁미망인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군경미망인에게는 많은 특혜가 있었으나 일반미망인에게는 궁핍이 뒤따랐다. 전쟁에 무기 들고 나가 싸우다 죽은 가족과 그 무기에 의해 남편을 잃은 가족이 받아야 하는 차별 대우! 내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가 계급의 갈등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된 것은 바로 전쟁미망인과 군경 유가족이라는 한울타리 안에서의 구분을 통해서였다.

어머니는 생활이 힘들 때면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살 바에야 혈육이 있는 고향에 남아 있을 걸. 그놈의 사상이 무엇인지!”하고 곧잘 중얼거렸다. 내 기억에 어머니에세거 북한 욕 하는걸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가진 것 없는 어머니로서는 빼앗길 게 없었고 공산치하가 되면서 실시된 배급제는 가난한 살림에서 끼니 걱정을 덜어주었다. 더욱이 당신은 기독교인도 아니었으니, 우리 부모가 남하한 것은 사상의 자유 그 한 가지 때문이었는데, 그 사상의 자유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 바에야 왜 갈등이 없었겠는가?

 

부모의 등에 업혀 사상의 자류를 찾아 임진강을 건너와 이 땅에 살고 있는 나에게 요즈음 한 가지 고민이 있다. 부모의 자식답게 비판의식이 강하고 평등, 해방, 자유라는 것은 어느덧 내 기질의 구성요소가 되어 있는 셈인데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머리만 지배할 뿐, 심장의 한 부분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이 머니로만 구현될 것은 아닐진대 딸을 버리면서까지 배로 임진강을 건너 온 아버지의 이기적이 자유사상을 닮은 탓일까? 왜 나는 자식의 생명을 위해 자식을 업고 그 찬 강물을 건너 온 어머니처럼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몸으로 뛰지 못하는가?

죽을 용기로 살아서 투쟁하라는 요즈음 지식인들의 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나마 죽을 용기도 없는 나는 최루탄 터지는 소리에 간이 오그라드는 그런 나약한 지식인이 되어 간신히 시위장 주변만 서성일 뿐이다. 페퍼포그, 물 대포, 지랄탄에도 의연히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그리 못하는 자신의 용기 없음에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를 뇌이며 한심해한다. 시위장은 나에게 임진강과 같다. 나의 부모들이 자유를 찾기 위해 임진강을 건너야 했듯이 시위장은 내가 통일을 위해 민주화를 위해 건너야 할 강이다. 그러나 나는 그 강을 건너지 못하고 강가에서 서성일 뿐이다.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