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현장과 신학

기독여성평화통일운동의 역사와 성찰2

한국소금 2016. 4. 29. 15:27

2. 통일희년운동에서 평화연대운동으로

 

95통일희년운동은 분단극복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완의 희년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것을 준비하면서 맛본 기쁨은 참여한 이들에게 통일희년을 살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그런 운동이었다. ‘95년이 지나도 분단이 극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으나 교회협을 중심으로 한 한국교회의 진보적 통일운동은 분단극복과 통일의 문제가 평화와 직결되는 것이며, 통일을 위한 노력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이라는 신앙고백과 아울러 한국교회의 선교적 과제임을 부각시켜 교회의 분단극복과 통일의 당위성을 고취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뿐만아니라 아직 통일운동이 자유롭지 못한 한국사회에 통일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 북한주민 지원운동 시작

한편 한국교회가 선포한 희년이 와도 분단극복이 가시화하지 않자, 한국교회는 선언적이고 의식화적 측면의 통일운동에서 북한주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나눔운동을 강화하는 쪽으로 전환한다. 1995년 북한은 극심한 수해를 입게 되고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통해 남한교회에 긴급구호요청을 하게 된다. 이 요청에 응답하여 한국교회는 수십억에 달하는 물품을 지원했는데 여기에는 교회협 뿐만 아니라 교회협의 통일운동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교회들이 앞장서서 동참을 한다. 교회여성들도 이 북녘동포 지원 현장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19946월 그동안 평화통일운동에 매진했던 기독여성들, 교회협 여성위원회와 교회여성연합회, 여신학자협의회, 기장여신도회전국연합회, 기독여민회 등은 진보적인 여성단체와 더불어 평화를 만드는 여성연대를 결성한 바 있는데, 이 연대틀은 북한관련 핵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시기까지 여성들이 연대하여 공동실천하겠다는 취지로 결성된 조직이었다. 이 연대틀의 노력으로 북에 82714천만원에 상당하는 분유 26톤을 전달하였다. 이에 이어 1997912일 교회협 여성위원회와 교회여성연합회를 중심으로 평화의 쌀 보내기 기독여성운동본부를 발족하여 모금운동을 전개, 1998415평화의 쌀 43톤을 북에 보냈다.

 

2) 2의 기독여성 10년 선포와 북한여성과 어린이 지원

1998년은 세계교회여성운동사의 중요한 획을 그었던 여성과 함께 하는 에큐메니칼 10”, 즉 한국에서는 기독여성10을 마감하는 해였다. 한국의 기독여성들은 이 기독여성10년을 마감하는 축제를 하며서 “‘섬김과 나눔을 향한 제2의 기독여성 10을 선포하면서 고통받는 북녘 여성들과 어린이들에 관심갖고 나눔을 실천하기로 의지를 모았다. 그 실천의 하나로 북한어린이 돕기 운동을 전개키로 하고 2000626북한 어린이돕기 교회여성연대를 발족, 1구좌 1,000원 씩으로 하고 1인당 이유기 어린이의 한 달분 이유식가격인 5000원 씩을 모금하여 북한어린이게게 보내기로 하였다. 그 결과 2001119일에 1차분을, 200243일 인천항에서 분유 2차분을 보냈다. 2003년에는 과거의 북한어린이돕기 교회여성연대에 참여했던 기관과 단체들이 모여 반전평화기독여성연대를 구성하면서 평화운동을 벌여나갔다. 2003722일에는 전쟁방지를 위한 기독교 평화대회를 열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운동을 시작하고, 국가보안법 폐지기독교대행진에 참여하기도 했다.

 

3)<폭력극북 10>과 기독여성평화운동

소강상태에 든 한국기독여성통일운동을 북돋을 큰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세계교회협의회가 선포한 ,폭력극복 10> 프로젝트다. 세계교회협의회는 2001부터 2010까지를 폭력극복 10으로 선포하고 전 세계교회로 하여금 폭력극복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200124일 독일 베를린에서 기념예배를 드리고 <폭력극복; 화해와 평화를 일구어가는 교회>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이 취지는 모든 교회가 비폭력과 화해를 위해 일하고 비폭력문화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갈등전환과 정의로운 평화를 위한 접근방식을 개발하려는 의도였다. 여기서 제기한 폭력은 직접적, 구조적 폭력, 가정폭력, 공동체 안에서의 폭력, 국제사회에서의 폭력 등 모든 형태의 폭력을 문제시하고, 세계의 군사문화와 소형무기 확산에 도전하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기독여성10년도 그렇지만 폭력극복10을 살려 평화통일운동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폭력극복에는 일상적인 폭력과 국가폭력, 전쟁 등 국제폭력이 다 포함되어 있고, 이의 종식을 위해 나서야 한다는 신학적 당위성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통일운동 선상에서 이 주제를 살리지 못했다. 기독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교회내 성폭력문제를 비롯한 여성의 폭력문제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 문제를 분단극복이나 평화통일의 주제로 연결해 활동하지 못했다. “기독여성 10과는 달리 폭력극복 10이라는 주제가 한국 기독여성계에서는 실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2011517-25일 자마이카 킹스톤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의 폭력극복 10년을 마무리하고 <정의로운 평화.에 대한 에큐메니칼 선언을 발표한 한 달 후 69, 한국에서 교회협 양성평등위원회에서 <기독여성 폭력극복 10년 심포지엄>을 실시하고, 참석자들이 비폭력, 평화, 화해, 정의를 위한 헌신과 결단을 다짐한 것도, 작은 결실이라면 결실이겠다.

한편 2003년 기독여성통일운동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교회협여성위원회는 북한물자지원사업 등 대북관계 사업의 패러다임 전환들을 위한 기독여성통일운동 정책토론의 장을 마련키로 한다. 이 일환으로 430일 교회협여성위원회와 교회여성연합회가 공동으로 기독여성평화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주제를 갖고 기독여성운동정책협의회를 실시한다. 이 토론회에서 기독여성 평화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 한반도 평화와 여성, 교회의 평화운동과 여성, 군사주의와 여성이라는 발제가 있었다. 이 토론회에서 교회여성들이 통일운동과 더불어 세계 평화를 위한 군사화에 반대해야 하는 운동이 제기 되었다. 이미 19927월 한국국의 PKO(평화유지군)파병반대를 외친 바 있는 기독여성들은 1994414전쟁의 위기를 고조시키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깨드리고 국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패트리어트미사일 설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3. 615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여성본부를 통한 통일운동

 

1)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2000625일은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이 주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국방위원장과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고 정상회담을 가진 후 남북관계발전과 평화통일실현을 위한 중대한 선언을 한 날이다. 이 선언에서 남과 북은 우리민족끼리 자주통일, 남측의 연합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연방안의 통일방안의 공통성 중심으로 통일지향, 조속한 인도적 문제 해결, 경제협력을 통한 민족경제 균형발전과 제반분야의 협력과 교류, 남북사이의 대화 개최를 합의하였다. <615 남북공동선언>발표 후 향후 한국의 통일운동은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운동으로 자리매김 된다. 남측에서는 615 선언을 실천하기 위해서 보수에서 진보진영을 총 망라한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공동행사 준비위원회 남측본부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자주와 평화를 지켜내고 단합과 통일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여 세계 앞에 우리 민족의 지혜와 슬기, 단결을 보여줄 것을 선언하면서 ”1) 6,15 공동선언 실천에 천명된 대로 나라의 통일문제를 남에게 의존해서가 아니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과 지혜를 합쳐 풀어나갈 것. 2) 민족공동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각자의 의사를 존중하며 6.15 공동선언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그 실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 3)남과 북(북과 남),해외의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여성, 종교인, 문화예술인 등 각계각층의 자주적 연대와 협력이 풍성하게 꽃펴날 수 있게 할 것.4)-평화는 온 민족의 한결같은 지향이며 평화수호는 우리에게 맡겨진 절대절명의 과제임으로 그 어떠한 군사적 행동도 반대하고 이 땅에서 전쟁위협과 군사 적대결과 긴장을 걷어내며 항구적 평화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과제가 선포되었다.

 

이러한 615 실천과제를 수용하면서 한국교회는 한국교회 615 공동선언 실천과제로 1) 교회가 평화와 화해를 선포할 일.2) 북녘의 교회를 지원하고 민족 나눔운동을 펼칠 일(특히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해)3)화해와 평화교육을 실시하고 갈등해소를 위해 노력할 일.4) 남북평화통일주일 공동예배를 드릴 일을 병행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에 기독여성들은 615 공동실천과제와 교회의 실천과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동시에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측 여성본부에 가담하여 함께 실천운동을 벌여나갔다.



2)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기독여성들의 만남

 

(1)카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남북, 해외교회여성대표들의 만남

615공동선언 후 제일 가시화된 것은 남과 북, 해와의 각계 각층의 만남이었다. 여성들도 여성모임을 추진하고 구체화하였다. 가장 먼저 이루어진 여성모임은 한국기독여성들의 요청에 적국 응답한 미국교회협의회 봉사와 증언위원회와 카나다연합교회 차원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주선한 자리로서, 2001923-29일에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연대하는 여성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모임에 초청된 이들은 남쪽에서는 그동안 한국 기독여성 평화통일운동을 주동했던 기관의 대표들로서 교회협 여성위원장 송영자장로, 여신협총무 한국염목사, 여신협 정의평화위원장 이숭리선생, 교회여성연합회 회장 성영자장로, 총무 이문숙목사,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이사장 이우정장로 해서 모두 7명이었고, 북에서는 조선여성협의회 회장인 홍선옥씨, 카톨릭교회 대표 이산옥씨,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국제위원장 김혜숙 전도사, 이민영수행원 1명이었고, 여기에 재일교회여성연합회 양영지회장을 비롯한 아시아 대료 4, 한국의 통일을 위해 헌신해 온 미감리교 패터슨총무와 카나다연합교회의 총회장이었으며, 카나다 국회 상원위원이기도 했던 로이스 윌슨목사를 비롯한 북미교회 대표 13명으로 총 28명이 참석했다. 이 모임에서 남북의 긴장완화가 동북아의 평화와 직결됨을 확인하고, 615정상회담과 공동성명을 환영하고 지지하며,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기도를 지속한다는 것과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15개의 건의사항이 채택되었으며, 이 건의사항을 한국정부에 보고키로 하였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연대하는 여성 모임>은 카나다를 비롯해서 북미에 큰 반향을 일으켜으며, 이 모임을 통해 참여한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자매라는 일치의식과,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더욱 고취시킬 수 있었다. 한편 이 모임은 이우정선생의 통일을 위한 마지막 해외여정이기도 했다.

 

(2)금강산에서의 2002 남북여성통일대회

여성만남은 <2002 남북여성통일대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2002 남북여성통일대회>는 두 차례의 615민족공동행사와 815공동행사, 남북노동자통일대회, 농민통일대회, 청년학생통일대회에 이어 마지막 부문행사로 열리는, 사실상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민간부문행사를 마무리하는 성격으로 이루어졌다. 이 대회는 남측에서 민화협 여성위원회, 7개 종단 여성위원회, 통일연대여성위원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우리민족서로돕기 단체가, 북에서는 조선민주여성동맹, 조선여성협회, 민족회해협의회 여성부가 함께 2002년 남북여성통일대회 추진본부를 구성하여 행사를 진행하였다. 이 대회에는 남쪽에서 350여명, 북쪽에서 300, 해외에서 20여명이 참가하였다. 이 대회의 남측 참가자는 7개 주관단체의 회원과 여성정치인, 여성학자, 여성미술작가와 문화예술인, 여성노동자와 농민, 여성경제인, 교육 및 보육관계자, 기자단과 공연팀이 참석하였다. 이 대회를 통해 남북의 여성들은 따뜻한 자매애를 나누었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실천을 다짐하였다. 이번 대회를 통해 여성들은 민족의 동질성을 왁인하는 한편 분단세월이 가져다 준 이질성을 확인하면서 교류를 통해 상호 이해를 높이는 과정이 필요함을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이 대회에 북의 김혜숙씨와 이산옥 씨 외에 몇 명이 기독교인 자격으로 참여했다. 김혜숙은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국제위원으로 영어도 잘해 통역으로 국제회의에 많이 참석하는 북한 교회의 여성 대표이고, 이산옥 씨는 카톨릭 대표다. 다음 날 아침에 각 분야별 만남이 8시부터 열렸다. 북에서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서 4명이 참석했으나 남쪽에서는 개신교 대표로 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다 여성단체 연합 소속으로 참석했지 종단 소속이 아니었고, 개신교대표도 아니었다. 마침 남쪽에서 여성단체 연합 소속 대표로 이 대회에 참석을 여신학자협의회의 한국염목사, 기독여민회의 정태효목사, 여성단체 연합 공동대표 이강실목사, 전주의 김은경목사 4명의 목사, 여기에 여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인 윤명선 전도사와 카나다에서 온 서진옥씨, ywca에서 온 한 분 해서 일곱명이 조선 그리스도교 연맹에서 온 여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김혜숙씨가 현재 북에는 평양에 봉수와 칠곡 2개 교회가 있고 전국에 513개소의 가정교회가 있다고 북쪽 교회를 소개하고 나서, 지난 107일에 미국이 북한에 종교와 신앙의 자유가 없다고 발표한 데 대해 분노하면서 북조선 헌법에 엄연하게 신앙의 자유가 선언되어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힘을 합쳐 615 공동선언을 실천하기 위해 앞장 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기독교 모임에 북쪽 측 해외동포로 호주에서 온 두 명의 여성이 참석했는데, 어제 남한에서 온 사람들이 한 똑같은 질문을 하였다. “북한 교회는 예수 믿으면 천당 가는 걸 믿느냐?” 그러자 김혜숙씨가 예수 믿고 천당가는 걸 안믿으면 왜 어떻게 기독교신자라고 하겠습니까?“ 하고 답변을 했다. 그 호주에서 온 사람들은 호주에서 북한의 기아를 지원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로 통일운동이 아니라 북한 선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남북여성대회의 성질도 모르고 북에 관광 차 왔다가 묻어 온 사람들이었다.

 

3) 615남북공동선언실천을 위한 여성본부 결성과 남북여성들의 만남

 

(1)여성본부 결성

2000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남한 내에서는 615남북공동선언실천을 위한 추진본부를 결성하였고, 이 추진본부는 7대 종단, 통일연대, 민화협 3자 단위로 구성이 되었는데, 7대 종단 중 개신교를 대표하여 교회협이 들어갔다.

여성들 역시 615 공동실현을 위한 여성본부를 결성, 종교여성, 통일연대,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등으로 남한 내 여성관련 최대조직으로 구성되었다. 기독여성들은 종교여성 범주에 들어가서 활동했으며, 종교측 대표로 첫해에 한국염 당시 여성위원장이 공동대표로, 정해선 부장이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여성부문이 아닌 남측 본부 대표 단위에서 활동한 기독여성들이 15명 이상이 되었고, 여성본부 종단 개신교부문에 교회협여성위원회에 참가하고 있는 단위 대표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2) 화해와 평화를 희망하는 이웃종교여성들과의 만남

앞에서 살펴 본 바, 기독여성들은 615 공동선언실천활동과 관련하여 종교여성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어서 종교여성과의 연대가 필수적인 사항었다. 이를 위해 해방60, 분단60년이 되는 200571일 이웃종교 여성들과 만나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과 종교여성의 역할을 공유하는 자리인 이웃종교 여성들과의 만남, 화해와 평화를 희망하다.”를 마련하였다. 이웃종교여성들과의 만남 자리는 작은 음악회로 이루어졌다. 각 종단 여성들이 평화와 통일에 대한 꿈을 종단 고유의 기도와 음악에 실어 나르면서 종교여성들간의 연대와 통일에 대한 의지를 불지폈다.

 

(2)<815 남북해외여성연대모임>

615공동선언실천본부의 사업에서 중점 사업은 615남북공동실현을 위한 민족공동행사였다. 삼일절, 615, 815, 103일 개천절에 민족공동행사가 때로는 남에서, 때로는 북에서 실행되었다. 부문별 공동행사도 추진되었다. 여성의 경우 815민족대축전, 815남북해외여성연대모임, 남북여성대회를 추진하였다. 분단 60주년이 되는 2005, 남에서 815민족대축전이 열렸고 이때 여성들은 816일 여성정책개발원(연구원)에서 <815 남북해외여성연대모임>을 했다. 북측에서 7명의 여성위원이, 남측에서 55개 소속단체의 대표와 임원, 해외동포 약간 명 해서 약 150명이 참석했으며, 부문별 주제발제로 북에서 김경옥부위원장, 남에서는 한국염공동대표가 발표를 했다.

 

(3) 2005 남북여성통일행사

한편 2005 남북여성통일행사가 910-14일 묘향산에서 개최되었다. 이 행사는 통일과 평화를 위해 일해온 지난 시간들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해방60주년의 의미를 성찰하고 615공동선언 실천을 확고히 하기 위한 자리였다. “615공동선언 실천과 반전평화를 위한 남북여성총일연단에는 남측 대표 100, 북측여성 500명이 참여했다. 한국염 615남측여성본부 공동대표와 김경옥615북측여성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의 사회, 정현백616남측본부 상임대표와 박순의 615북측여성분과위원회위원장의 기본연설, 북측 장금숙선생의 615공동선언실천과 여성의 역할, 남측 김숙임대료의 q'반전평화와 여성의 역할보충연설과 공동선언문 낭독이 있엇다. 교회협에서 한국염위원장, 신효희부위원정, 정해선부장 참석했고, 이문숙교회여성연합회 총무를 비롯해서 많은 기독여성기관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남쪽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비롯해서 반미여성회까지 폭넓은 계층들이 참여하다보니 갈등의 조짐도 있었고, 언어사용들의 문제로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 모임에서는 부문별 모임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식사시간등에 북측의 교회여성지도자들과 만나 서로 평화의 의지를 확인했다.

 

(4) 615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남북여성대표자회의

남북여성통일행사를 묘향산에서 치룬 이듬해 <38 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뜻에서 200639-11일 금강산에서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여성대표자회의를 개최하였다. 남측에서 30, 북측에서 30명이 참여하였다. 이 대표자회의는 2006년도 여성통일운동의 방향과 향후방향제시를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남측 한국염공동대표와 북측 김경옥부위원장의 사회, 남측의 정현백 대표와 북측의 박순희 대표의 연설, 남측의 김숙임공동대표와 북측의 김인옥부위원장의 구체적 실천과제가 발표되었다. 그리고 남북여성들이 분단을 종식하고 자우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함께 전진할 것,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전평화실현을 위해 힘을 쏟고 군사적 대결과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근원을 제거하는데 여성들의 힘을 쏟을 것, 여성단체들이 연대와 단합, 협력을 강화하여 통일운동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높일 것,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 일제잔대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할 것, 자주, 평화, 통일의 새날을 열기 위해 북과 남 모든 여성들이 나아갈 것을 내용으로 한 남북여성 공동호소문이 발표되었다.

한편 이해 615, 615민족공동행사가 광주에서 열렸다. 이 행사를 계기로 여성들도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남북여성상봉모임을 열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대표연설과 호소문이 채택되었다.

 

5) 교회여성평화연대 활동

기독여성들은 615공동선언 10주년을 기해 교회여성평화연대 활동을 다시 가동하기 시작했다. 첫 활동으로 세상읽기와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정기적으로 실시키고 하고 한 당에 1, 매달 둘째 주 수요일 2시에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열기로 하였다. 기도회는 연대하는 단체가 돌아가며 주최키로 하였다. 그 첫 기도회가 20061018일 오후 2시에 시작되었다. 이 기도회는 20082월까지 이어졌으며, 기장여신도회전국연합회, 교회협양성평등위원회, 교회여성연합회, 새가정사, 성공회어머니연합회, 디아코니아자매회, 기장여교욕자회, 여신협, 복음교회여성신도회 등 13개 단체가 기도회를 주관하여 기독여성의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별히 20061115일에 열린 기도회에서는 한반도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북한의 6자 회담 복귀와 동북아 평화, 한미 FTA와 경제정의 실현, 군부에 의해 목회자와 시민활동가, 신부 등이 살해당한 필리핀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한편 이렇게 평화를 위한 기도를 통해 통일의 의지를 다잡은 교회여성들은 다시금 북한동포를 위한 지원활동을 시작했다. 2004년 용천참사로 고통을 당하는 북한동포를 지원하기 위해 용천돕기 여성행동발대식 및 거리모금 캠페인을 벌인 바 있는 교회여성연대는 2007년 북한수재민을 위한 모금을 전개키로 하고 95일에 종각 국세청 앞에서 북한수해복구지원 거리 캠페인을 시작으로 모금운동에 나섰다. 원래 700만원을 목표로 했으나 실모금액은 3백여만원밖에 되지 않았다. 이 모금액은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에 기부, 북의 영유아 양식과 보건의료사업에 사용토록 하는 한편, 평화기도회에서 모은 1백만원 상당은 교회협을 통해 대북지원사업에 사용토록 했다.

6) 615 10주년 기념 기독여성 평화통일문화제와 한반도평화통일을 위한 기독여성 성명서

615 남북정상들의 만남과 공동선언은 한반도에 평화의 서광이었다.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남북공동행사>를 비롯해서 남북여성들의 만남은 남과 북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이를 수용하며, 거리를 좁혀가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2007104일 노무현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 정상회담에서 나온 104 선언의 내용인 서해평화협력지대 수립, 개성공단사업, 금강산관광, 남북경협, 철도와 도로, 통신등의 연결, 이산가족상봉, 국군포로문재, 사회문화교류 등의 과제를 설정했다. 104 선언으로 615선언이 더욱 현실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2008년 정부가 바뀌면서 남과 북의 관계가 경색되었고, 공동행사를 비롯해서 여성들이 만날 수 있는 장이 폐쇄되어 버림으로 통일논의는 더 진전되지 못하게 되었다. 통일부를 없애자고 주장한 사람이 통일부 장관이 된 상황에서 금강산에서의 한 여성의 피살과 20103월의 천안함 사건 이후 615 공동선언과 104 남북정상선언이 침몰되고 있는 가운데 남북 사이 대화단절은 물론, 간신히 일군 화해와 평화의 무드가 실종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런 위기 속에서, 한일강제병합 100, 한국전쟁 60, 615남북공동선언 10주년을 맞으면서 2010610일 기독여성들은 교회협양성평등위원회와 교회여성평화연대의 이름으로 평화통일에 대한 기독여성의 과제 인식, 평화감수성 향상 그리고 통일을 위한 연대의 자리로 <기독여성 평화통일문화제>를 개최하고 한반도 평화통일을 향한 기독여성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행사는 여성의 감수성을 살린 몸짓공연, 노래, 연주 등으로 진행되었다. 선언서의 내용은 천안함 침몰로 희생된 46명의 장병들의 죽음을 애도함과 동시에 이 사태 이후 불신과 갈등의 위기로 치닫고 있는 남북관계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정부가 인도적 대북지원을 지속하고 생명을 살리는데 앞장설 것, 막혀 있는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 할 것,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완하하며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기독여성들은 갈등해소의 중재자로, 인도적 대북지원을 지속하고, 일상에서 평화살기를 실천할 것을 촉구하였다.  

대북지원을 지속하고, 일상에서 평화살기를 실천할 것을 촉구하였다.  


. 성찰과 전망

 

이제까지 한국기독여성의 평화통일운동을 개괄해보았다. 다음은 기독여성통일운동 경과를 살펴보면서 기독여성 통일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1. 성과

1) 기독여성 통일운동의 면모를 살펴보면 가장 눈에 띄는 특성으로 기독여성들의 통일운동은 단순히 남성기독인들의 뒤를 따른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들이 독자노선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통일문제를 접근하는 분석틀이 교회협을 중심한 일반 분석틀과 다르며, 이 다른 분석틀이 기독여성들로 하여금 통일문제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다는 점이다. 기독여성통일운동의 발화점이 된 <여신학자 선언>이나 <한반도 평화를 위한 여성협의회>선언을 보면 분단의 원인을 단순히 강대국의 폭력이나 분단을 고착화해서 이익을 취하려는 빈공이데오로기 주입자들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일차적인 원인을 가부장제라고 적시함으로 여성이 접근하는 통일상이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통일을 위해 일해야 하는 당위성으로 생명의 담지자로서의 모성성을 들고 있는데, 이는 자칫 여성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이데오로기로서의 위험성을 안고 있지만 교회여성들에게 통일의지와 사명을 북돋우는데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분단의 원인을 가부장제로 규명했다는 것은 분단극복을 여성해방의 과제와 동일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으며, 바로 이 지점이 한국기독여성운동을 남성에 일방적으로 흡수되지 않고 나름대로 독자노선을 걷게 한 원동력이라고 본다.

 

2) <‘95통일희년운동>에 기독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였다. 그 원인 중 하나는 통일운동에 참여한 1세대 여성들이 분단으로 인한 여성의 고통을 직접 체험했거나 간접으로 체험했고, 이 경험이 여성들의 참여를 불러왔다고 여겨진다. 결국 자기 문제화 할 때 운동이 생명력을 갖게 됨을 알 수 있다.

3) 기독여성들이 통일문제를 선교과제나 신앙과 연결할 때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서 기독여성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신앙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통일을 신앙실천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4) ‘95통일희년운동을 여성들이 성공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여성운동에 참가한 단체들의 효과적인 연대틀 형성에서 비롯되었다. 기독여성전문 연구기관의 결과물을 교단 교회여성들이 받아 적극적으로 확산하는 일을 했는데, 이를 통해서 통일운동의 저변화가 가능했다. 이는 효율적인 연대가 운동의 필수사항임을 입증해준다.

5) 초창기 기독여성들의 통일운동이 활발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통일운동이 불온시되던 풍토에서 그나마 교회의 통일운동의 입지가 자유로웠기 때문에 기독여성의 통일운동이 진보여성들을 흡수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고, 이들을 통해서 통일운동의 지평이 넓어졌다.

 

2. 한계

1) 기독여성들이 적극적으로 통일운동에 참여했다 하더라도, 교단 차원에서는 여성의 공헌이 가시화되지 못했다. 이는 북한지원 등에 여성들이 적극 참여를 해도 교단의 이름이나 교단의 남성지도자 역할만 부각되지 교회여성의 이름은 묻혀지는 현실이다.

2) 진보성향을 가진 기독여성단체들과 달리, 교단의 교회여성조직은 교단의 정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일례로 ‘95통일희년운동에 어느 교단 여성조직은 참여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 여성조직이 속한 교단에서 이 운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교회여성조직의 자율성 여부가 기독여성운동의 성패를 가를 수 있다.

3) 기독여성들이 일반여성단체와 연대해서 운동을 하려고 할 경우, 정보취득력과 관계망이 견고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일례로 615 여성본부에서 종단 몫 공동대표가 타 종단으로 이관되었을 때 정보망이 형성되지 않아 615사업을 교회여성들이 공유하기가 힘들었다.

4)기독여성, 특히 교회여성들의 통일운동이 교단 제도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사람이 바뀌면 운동이 연결되지 않아 활성화되지 않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5) 교회를 바탕으로 통일운동, 평화운동 하던 여성들이 교회의 보수성이나 획일화에 견디지 못하고 일반 사회단체나 여성단체로 가서 일을 하는 현실에서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 제도권 밖에서 운동하는 기독여성지도력을 교단 제도권이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종국에는 이들을 밖으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오며, 이로 인해 기독여성의 통일운동의 역량이 줄어든다.

6) 615 여성본부와 일을 하면서 직면한 문제는 기독여성진영에 통일전문가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여성단체는 통일운동전문가를 키워냈으나 교회는 통일운동을 위한 여성전문가를 키워내지 못하였다. 통일운동에 참여하는 기독여성들의 경우, 교단 여성단체 실무자들이나 임원들 중심이다 보니 역량의 한계와 전문성 부족에 직면하게 된다. 일반여성단체에서는 각 기관이 고유업무를 갖고 있고, 활동가들도 자기 영역이 있다. 그러나 교회기관 실무자는 다양한 업무를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한 방면으로 집중해서 지도력을 키우기가 어렵다. 자연히 한 방면의 전문가를 발굴하기 어렵다. 통일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통일문제를 전문으로 하는 인물을 발굴하고 키우고 뒷받침해야 한다.

7) 여성통일문제 전문가 육성을 비롯해서 통일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재정지원이 필수다. 교단적으로 교회의 구성원 60%이상이라는 현실을 감안해서 여성지도력 육성에 재정지원을 하도록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8)615 남북교류 현장에서 드러난 문제로서, 교육에 돈이 들다보니 자기 돈 갖고 갈 수 있는 사람만 교류가 가능해진다. 의식없는 사람이 북의 현장을 보고 오는 것도 계몽을 위해서는 필요하나, 활동가가 돈이 없어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는 방지해야 한다. 여기에도 경제정의가 필요하고 나눔이 실천되어야 한다.

9) 초기 기독여성통일운동을 할 때, 여신학자협의회, 기독여성평화연구원, 기독여민회 등이 기독여성통일운동 이론의 산실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기독여성평화연구원을 해체하고 평화문제에 관심하던 기독여민회 여성회원들과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를 만든 여파로, 여신협에서 통일에 대한 관심과 역량이 줄어들면서, 기독여민회가 평화와 통일에 대한 활동을 접고 기층여성들과의 연대에 중심하면서 결과적으로 기독여성통일운동을 위해 이론작업을 해 줄 단위가 약화되었다. 왜 이런 결과가 발생했는지 살펴서 전문기독여성기관의 역량을 살리고 존속할 수 있도록 연대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3. 기독여성 통일운동의 과제

시대가 달라졌다 하더라도 향후 기독여성통일운동의 과제는 궁극적으로 한국여신학자 선언에서 제시된 실천과제, 폭력극복 10년에서 제시된 과제, 74합의서 정신하에서 615공동선언 실천과제를 구현하는 것이다.

 

1)한국여신학자선언에서 제시된 과제

(1) 분단으로 인한 갈등구조와 고통의 원인을 연구하고 규명하며 고난당하고 있는 여성들의 사례를 모아서 신학화하여 남북한 여성들의 공감대를 형성 확산할 일.

(2) 각 교단과 기독교 여성단체에 <평화통일 연구위원회> 신설하여 통일교육에 나설 일.

(3) 교회제도의 민주화와 인간화를 위하여 언론매개체와 교회교육교재를 통하여 의식화할 일.

(4) 북한에 대한 무지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자료를 수집, 공개함으로써 반공이데올로기에서 올바른 인식에로 전환될 수 있도록 노력할 일.

(5) 북한 기독여성들과의 여성차원의 만남을 실시할 일.

(6) 한반도 평화는 세계평화를 위한 열쇠이므로 한반도 비핵화와 온 세계 핵무기의 폐기를 위하여 세계적인 평화 운동과 연대할 일. 등을 다시금 구체화하는 일.

 

2) 615선언 실천을 위한 과제

(1) 6,15 공동선언 실에 천명된 대로 나라의 통일문제를 남에게 의존해서가 아니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과 지혜를 합쳐 풀어나갈 것.

(2)우리는 민족공동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각자의 의사를 존중하며 6.15 공동선언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그 실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

(3)남과 북(북과 남),해외의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여성, 종교인, 문화예술인 등 각계각층의 자주적 연대와 협력이 풍성하게 꽃펴날 수 있게 할 것.

(4)평화는 온 민족의 한결같은 지향이며 평화수호는 우리에게 맡겨진 절대절명의 과제임으로 그 어떠한 군사적 행동도 반대하고 이 땅에서 전쟁위협과 군사 적대결과 긴장을 걷어내며 항구적 평화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

 

3) 폭력극복 10년 과제

(1)직접적인 폭력, 구조적인 폭력, 가정폭력, 공동체 안에서의 폭력, 국제사회에서의 폭력 등 모든 현대의 톡력을 다루고, 폭력에 대한 세계 각 지역의 분석과 촉력극복을 위한 방법들을 배운다.

(2)교회들은 폭력에 대한 신학적 정당화를 폐지시키고 화해와 비폭력의 영성을 새롭게 확인한다.

(3)지배와 경쟁이 아닌 협력에 기초한 공동체 내 공동안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창조한다.

(4)공동체 내의 다른 종교와 협력하고 다른 종교로부터 평화건설에 대한 영성을 배우고 자료들을 얻는다.

(5)세계의 군사문화와 소형무기의 확산에 도전한다.

 

나가면서

이명박 정부 들어 교회협을 비롯한 개신교의 통일운동이 소강상태에 직면하고 있다. 이명박정부의 반통일정책 때문이라고 하지만, 냉정히 보자면, 지금의 남북상황이 ‘95통일희년운동을 할 때 보다 더 악화된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 왜 통일운동에서 적극적이지 못하는가? 문제는 비전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95년 통일희년을 선포할 때, 그 시기 세계적 환경은 독일이 동서 자유왕래가 되고 동구권의 몰락, 통일을 눈앞에 둔 독일을 보면서 우리도 분단 50년에는 분단의 장벽이 무너지리라는 비전을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615공동선언실천에 나름대로 열심을 다한 것도 생각지도 못했던 남과 북의 정상회담과 그 정상회담에서 선언된 실천과제들을 보면서 그것이 이행되면 남북이 한 형제, 자매가 되리라는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위성이 힘이 있으려면 비전이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가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기름을 준비한 여성들이 신랑이 갑자기 와도 신랑을 맞을 수 있는 것처럼,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비전을 만들고 비전이 이루어질 준비를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통일에 대한 비전이 필요한데, 우리는 어떤 비전을 만들 수 있을까?

 

**이 글은  2014년에 실시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 주최로 열린 "기독여성들의 평화통일운동 역사와 성찰"이라는 세미나에서 발제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