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비평] 성차별적 설교를 해야 성이 찰까 ?
한국염/청암교회 목사
가부장적 설교가 한국교회 여성의 지위에 미친 영향
1998년에 세계교회협의회가 제정한 “교회가 여성과 함께하는 에큐메니칼 10년” 한국 중간 평가를 위한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에서 필자가 발제를 한 후 한국교회가 평등하게 바뀌기 위한 방안을 토론했다. 그때 한국교회 여성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예배’라고 지적되었다. 예배 중에서도 특히 설교의 영향이 큰 것으로 드러나 가부장적 설교를 평등 설교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이구동성으로 제기되었다.1)
가부장적 설교가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기에 교회 여성들이 평등설교를 요구하는가? 가부장적인 한국교회의 설교로 인해 한국교회 여성은 남성보다 매우 열등한 위치에 있다. 제도적 측면에서 여성 참여의 길이 매우 좁다. 여성안수가 허용되지 않는 교단이 많고 또 설사 허용되었다 하더라도 실제 결의기구에 나가는 참여도는 매우 미미하다. 관행은 제도의 변화보다 더 어렵다. 교회에서의 성차별적 관행은 성역할 고정관념의 관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교회예배에서도 남성은 설교자로, 여성은 듣는 역할이다. 남성은 정책을 결정하고 여성은 결정된 일을 따른다. 여성이 하는 일은 주로 교회의 잡다한 봉사로서 청소, 음식 만들기 등 집에서 하는 가사노동을 그대로 교회에서 재연하고 있다.
가부장적 교회에서 여성 억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교회 내 성폭력 문제일 것이다. 교회 내 성폭력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성폭력이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리어지는 목회자가 성서를 오용하고 남용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목회자들이 권위를 가지는 것은 이들이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라는 위상이 있기 때문이다. 여신협의 기독교여성상담소에 들어온 사건을 보면, 교회 내(內) 성폭력이 소위 가부장성이 강한 보수교단에서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교회 내 성폭력은 교회의 가부장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가부장적 설교를 평등 설교로 바꾸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여성 차별을 강화하는 설교의 본문들
그러면 교회 강단에서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설교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성차별 설교는 여성을 언급하는 본문과 예화 사용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종교가 그렇듯이 기독교 경전인 성서도 성(性)평등과 성차별의 양면성이 있으며, 해석학상의 문제를 갖고 있다. 어떤 눈으로, 어떤 관점에서 성서를 보고 말씀을 선포하느냐에 따라 끼치는 영향도 달라진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 속에서 특별히 여성 억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설교 본문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는데 많은 경우 한국교회의 설교에서 특히 성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말씀들이 선택되고 있다.
구약에서는 주로 창세기 2장과 3장의 본문들이 여성 차별을 옹호하는 본문들로 사용되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으니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었다. 여자는 돕는 자로 만들어졌으니 여자는 남자의 보조자다. 여자가 죄를 세상에 가져왔다, 여자가 남자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다.” 라는 주장이다. 신약에서는 고린도전서 11장이나 14장 또는 디모데전서 3장을 통해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므로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며…,”를 통해 여성의 발언권과 지도력을 부정한다. 베드로전서 3장과 에베소서 5장을 통해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고 어떠한 경우에라도 인내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친다.
이런 본문들을 사용하면서 철저한 주석 없이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 여성 억압적인 설교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물론 성서에 성차별적인 본문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문 못지 않게 여성 해방적인 본문들도 많고, 또 성차별적으로 인용되어 온 본문들은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재해석해야 할 부분들도 많다.2)
성차별적 설교의 유형
그러면 교회 강단에서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설교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성차별 설교는 ‘여성을 언급하는 본문과 예화 사용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1992년 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이 낸 『여성이 바라는 설교』에 의하면 성차별을 강화하는 설교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1) 여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성서 본문을 가부장적으로 해석하여 선포하거나, (2)성서에 있는 의미 있는 여성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남성 지도자들만 부각하거나, (3)여성의 역할을 순종과 겸손의 상징이나 성역할 고정관념을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선포하는 경우다.
여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경우
이 계통의 설교에서는 주로 이브와 고멜이 등장하는데 여자는 보조자로서, 유혹자로서, 배신자로서 부정한 이미지로 소개되고 있다. 한 예를 들어보자. M교회의 L목사는 “가데스의 반석”이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여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와 때문에 아담이 범죄했습니다, 이세벨 때문에 아합 왕이 범죄했습니다. 물질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범죄했습니다. …여자 때문에 다윗도 범죄했습니다.”3)
이 설교에서는 여성을 죄의 원인으로, 유혹자로 규정하고 여정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의미 있는 여성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경우
성서에는 많은 여인들이 나온다. 그러나 설교에서는 남자 지도자들만 모범으로 제기되고 여성에 대한 언급이 생략된다.
수난과 부활의 증인으로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성들의 역할은 매우 지대하다. 예수 십자가 밑에 있던 여인들, 특히 막달라 마리아라는 이름이 엄연히 본문에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절 설교를 하면서 여성들의 이야기를 삭제한 채,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나 변화된 예수의 몸만을 강조한다는 식으로 여성들을 배제하고 있다. 또 나사로를 살린 예수의 이야기에서도 마르다의 신앙고백이 베드로의 신앙고백보다 더 신앙적이고 신학적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신앙고백만을 선포한다든지, 분명히 ‘누가라고도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행 12``:``12)이라며 마리아의 이름이 언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순절 성령사건이 일어난 곳이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미가서에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 이름이 나란히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만을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각시킨다든지, 민족을 구한 드보라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도 드보라보다 바락을 중시하거나, 시스라를 죽인 야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거나 잔인한 여자로 치부하는 등 남성 지도자만 부각시키고 여성을 배제하는 경우가 있다.
여성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선포하는 경우
여성의 역할을 수동적이거나 성역할 고정관념적으로 해석하여 설교하는 경우가 많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본문으로 선택하여 예수의 발 아래에서 말씀 듣는 마리아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조용히 순종하는 여성으로, 반대로 분주하게 행동하는 마르다는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지 못하는 여성으로 부각하면서 행동하는 여성보다 조용하고 얌전한 여성을 더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상황에 따라 부엌에서 일만 하는 교회 여성들에게 부엌일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는 새로운 이정표가 될 수 있다.
한편 결혼식이나 가정의 달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시오” 하는 에베소서 5장의 본문을 아내의 순종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더 심한 경우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는 이야기와 2장의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아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구분해서 여성의 성역할 고정관념과 여성의 역할을 남자를 돕는 자로 규정해 설교를 하는 경우다.
한 예로 강남의 H교회 L목사의 설교를 보자. 이 목사는 베드로전서 3장 1-7절을 본문으로 하여 “신부여 단장하라”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하와를 만드신 후 돕는 배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는 물론 흙으로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명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 분명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서는 다릅니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여자가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남자와 여자의 창조원리는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는 창세기 1장의 사건이고, 2장의 사건은 남편과 아내가 창조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반드시 남편을 돕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이 아내 된 자의 삶입니다. 여자는 독립해서 살 수가 있으나 아내가 되면 그때부터는 돕는 자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여자의 일생은 어려서는 부모님께 순종하지만, 결혼하면 남편을 돕고, 또 어머니가 되면 아들, 딸을 도와주는 일생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설교에서는 여자와 아내를 구분하여 아내로 대표되는 여자에게 현대판 삼종지도를 하나님의 질서로 내세우며 아내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한 여성을 두고 여자와 아내를 구분한 것도 어불성설이지만 이 설교대로라면 여자가 독립적인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기 위해서는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목사의 경우 일 년에 한 번 있는 ‘여신도주일’에 여성에 관해 매번 잠언 31장을 본문으로 “현숙한 아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다. 잠언 31장에 나오는 현숙한 아내는 집안일은 물론 길쌈을 해서 상선처럼 돈을 벌어오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한다. 그 대가로 남편은 비단옷을 입고 성문에서 인사를 받게 하고, 그래서 남편이 “당신이 최고다”라는 칭찬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편에게 칭찬받는 아내, 현숙한 아내가 되라고 강조를 하는데, 맨 마지막 절에 나오는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그 행한 일에 대한 보답을 성문에서 하라” 하는 31절의 말씀은 언급을 하지 않는다. 성서에 한 본문으로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앞부분만 이야기하고 뒷부분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예화를 통한 성차별 설교
설교에 사용되는 예화는 설교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요지를 좀 더 쉽고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설교의 핵심 내용들은 잊어버려도 예화는 오랫동안 기억하기 때문에 설교에서 예화가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은 매우 높다. 따라서 여성이 예화 속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교인들의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여성을 묘사하는 예화는 크게 (1)부정적인 여성상, (2) 사적 영역에서의 여성상, (3)공적 역할에서의 부정적인 여성상으로 나눌 수 있다.4)
부정적인 여성상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예화는 불행과 잘못의 원인이 여성에게 있는 것처럼 여성에게 책임전가를 하는 경우, 교회와 교인의 타락의 상징으로 묘사하는 경우, 일생생활에서의 여성을 배제하고 미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가치만을 묘사하는 경우다. 설교에 많은 예화들이 등장한다. 예화란 설교를 설득력 있게 전개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설교자들의 예화 사용에서는 여성 비하적인 내용이 빈번히 드러나고 있다. 다음의 예는 기독교방송 작년도 설교를 모니터한 것이다.
첫 번째, 여성비하적인 예화의 경우
S교회 K목사는 주기도문 강해설교에서 기독교인은 명예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설교를 하면서 이런 예를 들었다. 프린스턴 대학원에 다닐 때 그 학교에 다니는 한 친구가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고는 10시만 되면 헤어졌다. 상대편 여학생이 더 만나자고 했지만 그 남학생은 몰인정하게 끊었다. 그래서 그렇게 원하는데 들어주지 왜그러느냐고 했더니, ‘명예’라는 단어를 외치면서 “내 명예가 있는데 어떻게 저따위 여자의 유혹 때문에 내 명예를 더럽힐 수가 있느냐?”고 대답하였다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기독교인은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설교에서 여성은 남성의 명예를 저하시키는 장애물로 소개가 되고 있으며, 여성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명예를 지키는 남성의 자긍심을 표현하고 있다. 이 설교 이면에는 여성을 유혹자로 보고 여성을 비하하는 신학이 내재되어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여성을 비하하고 경멸하는 게 남자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라면, 여성이 교회에서 어떤 존재로 대접받고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두번 째, 지적 능력이 결함된 부정적인 여성상
같은 목사의 다른 날 설교에 나오는 예화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는 “하와는 예쁘고 부드럽다. 그러나 맹한 데가 있다”고 말하자 하나님이 “그러니 너 같은 것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대답하셨다는 예화를 들고 있다. 이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웃었는데, 웃어넘기기에는 그 내용에 문제가 많다. 이 설교의 예화는 ‘여성은 지적 능력이 모자란다’ 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나올 수 있는 예화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불행이나 잘못된 책임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리는 경우
설교 예화에 나오는 여성들은 많은 경우 부정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한 예를 들어보자. N교회 P목사의 설교 내용 중 “왜 싸우냐? 신령한 것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싸운다”고 하면서 그 예화로 한 가정의 가정 싸움을 예로 들고 있다. 가정 싸움을 하게 되는 원인으로 “마누라가 동창회 갔다 와서 싸운다. 내가 눈이 삐었지, 이런 남자랑 결혼해서…저 무지렁이 앞에서…”라고 예화를 전개하면서 가정싸움의 원인을 여자에게 두고 있다. 여자가 세상적인 일로 가정 싸움이나 하는 모습으로, 여성들을 돈과 미와 편리함에만 관심을 두는 것으로 여성의 역할을 축소시키며 여성의 태도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사적 영역에서의 여성상
여성을 언급하는 절대 다수의 예화가 사적 역할을 감당하는 여성상이라고 한다. 사적 역할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여성을 자녀교육의 전담자, 모성 찬양, 가정 내의 위계질서에서 여성은 순종과 복종의 역할로, 남성은 양육하고 보호하는 관계로 묘사하면서 성역할 고정관념을 성서의 여성상으로 미화시킨다. 이들 예화의 공통점은 여성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바탕으로 한 가부장적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유지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한 예를 보자. K교회 P목사는 환란을 잘 견디어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를 하면서 경계 대상으로 여성의 신앙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예수 믿으면 축복을 받은 줄 알고…남편이 잘되고 출세하는 줄 알았는데…” 하는 내용으로 환란을 당하면 잘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여성을 예화로 들고 있다. 이 예화는 여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문제 외에도 여성의 삶을 남편에게 귀속되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다른 예를 보자. L목사는 “하나님이 세운 가정”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직장에서 피곤한 남자들이 자기 아내를 찾아 안식을 얻고자 집에 온다고 하면서 이런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으면 큰 일 난다, 피곤한 몸으로 돌아오는 남편에게 안식을 주지 못하면 결국 죽이는 것이 된다며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어느 집에 어떤 여자가 소리 지르며 남자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돈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자가 돈 벌고 나서 바람났다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온 남편 호주머니를 뒤졌더니 이상한 여자하고 찍은 사진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누구냐고 물으니까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리다가 다그치니까 ‘왜 남의 프라이버시를 건드리느냐?’고 시비를 걸어서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맞고 도망칠 정도면 무엇 때문에 건드립니까? ”
이 경우 누가 잘못된 것인가? 하나님이 세운 가정의 아내는 어떤 경우에도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가? Y목사는 한 결혼식 설교에서 남편을 왕처럼 대하면 자기는 왕비가 된다고 하며 남편에게 잘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런 성역할 고정관념적인 예화는 사회 진출을 통해 공적 영역으로 나가는 여성들에 대해 부정적인 상을 심어주고 가부장적인 가족주의를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인 여성상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런 예화는 강단에서 축출되어야 한다.
공적 영역에서의 여성상
공적 영역에서의 여성에 대한 예화는 매우 드물다. 오랜 인내 끝에 성공을 한 여성의 이야기나 마더 테레사 같은 세계적인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간혹 긍정적인 입장에서 소개되기는 하나, 직장에서의 일을 통한 여성의 사회 참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 지배적이다. 이는 공정 영역은 남성의 일이고, 사적 영역은 여성의 일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비롯된다. 이 이분법적 사고는 여성의 역할과 위치를 가정에 국한시키고 어머니로서, 아내로서의 위상에 고정시켜 둔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비롯된다. 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의 연구 결과는 설교자가 예화를 사용할 때에 여성을 핵심이 아니라 부차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극복되어야 할 전형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예화를 통하여 가부장적 여성상이 재생산된다고 한다.5)
따라서 남녀평등의 가치관에 위배되는 예화 선택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러면 어떤 설교를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한국교회의 설교는 남성 설교자에 의해 권위주의적이고 여성 억압적으로 선포되고 있다. 개신교에서 설교는 교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성차별 문화를 평등 문화로 바꾸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평등적인 설교로 바뀌어야 한다. 한국교회에서 설교는 강단 책임자의 몫으로 정해졌다. 일차적으로 설교자가 평등의식을 가지고 설교를 해야 하겠지만 설교자가 가부장적일 경우, 설교를 듣는 이들이 설교를 비평할 수 있어야 한다. 교인들이 단 아래서 설교를 듣는 평신도의 역할로 만족한다면 한국교회 설교는 개혁될 수 없다. 교인들이 평등적인 안목을 가지고 설교를 모니터링하고 문제제기를 한다면 한국 설교가 바뀔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설교가 바뀌면 교회도 바뀐다. 이 점에서 모니터링의 가능성과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평등주의 관점에서 설교를 하거나 모니터링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 사항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 설교자가 어떤 본문을 어떤 입장에서 사용하고 있는가?
둘째, 설교자가 본문을 성 평등적으로 해석하고 있는가?
셋째, 설교자는 여성을 어떤 식으로 설교에 등장시키고 있는가? 긍정적으로 묘사하는가, 부정적으로 묘사하는가?
넷째, 설교 본문에 나오는 여성이 여성에게 힘을 주는가? 아니면 주체성을 상실하게 하는가?
다섯째, 설교에 나오는 여성 예화가 여성의 자긍심을 북돋우는가, 아니면 자긍심을 상실하게 하는가?
여섯째, 설교를 통해 성역할 고정관념이 강화되는가? 없어지는가?
이러한 설교모니터링은 설교를 하는 설교자 본인에게도 유효한 일임은 물론이다.
(주)
1) 실제로 1994년 1995통일희년교회여성협의회가 실시한 “한국교회여성들의 의식과 교회 내에서의 위치”에 대한 설문조사를 보아도 ‘여성들은 주로 설교를 통해 신앙교육을 받는다’라고 한 응답이 67.8%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설교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한국교회여성들의 의식과 교회 내에서의 위치,” 『'95통일희년교회여성협의회보고서』, 1996, 368.
2) 여성신학자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는 여성을 차별하거나 억압하는 사례로 인용되는 본문들이 나올 경우 그 성서 본문에 대해 과연 그런가 하고 일단 의심해 보는 의심의 해석학, 성서에서 여성 해방적인 면을 찾아 이를 선포하는 선포의 해석학, 성서에서 여성 해방의 근거가 될 수 있는 해방의 자취나 여성 고난의 자취들을 찾아 회상하고 기억하는 회상의 해석학, 이를 창조적으로 되살려 여성 해방을 위한 힘을 주도록 하는 창조의 해석학 등 네 가지 해석학을 제시하면서 이러한 성서해석 방법을 통해 여성에게 힘을 주는 주도록 제안한다.
3) 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 『여성이 바라는 설교』, 64에서 재인용.
4) 『여성이 바라는 설교』, 91.
5) 기독교여성평화연구원, 『여성이 바라는 설교』,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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