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국소금”, “이주여성의 대모”라고 불리는 한국염 목사,

한국소금 2018. 2. 16. 16:09



한국소금”, “이주여성의 대모라고 불리는 한국염 목사,

이주여성의 차별과 억압에 맞서다

현재 우리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이주여성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페미니스트예요. 지금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직업이 아닌 여성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하는 일이고, 여성목회자로서의 사명과도 연결돼 있어요. 한국사회에서 여성목사로 산다는 것은 어렵지만, 그 만큼 의미도 커요. 남자와 여자 중에 상대적으로 여자가 약자죠. 약자로서 억압당한 경험을 가지고 또 다른 약자를 섬기는 것, 그것이 여성목사의 길이죠. 이주여성과 함께 하는 것은 여성목회로의 길이고 저의 사명이죠. 그래서 저의 삶 자체가 여성차별, 이주민 차별을 없애려고 싸워 온 시간입니다. 저는 차별에 엄격하며 절대로 타협하지 않습니다. 만일 현재 제가 벌이고 있는 이주여성인권운동이 받아들여져서 우리사회에서 이주여성들의 인권이 안전하게 보장된다면 저는 또 다른 곳에서 새롭게 차별받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을 위해서 평생 운동을 할 겁니다.”

 

한국소금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한국염 목사, 그의 이름처럼 이주여성들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은 결혼이주여성들이 차별과 억압에서 벗어나 우리사회의 일원으로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이주여성들을 옹호하는 한국이주여성인권운동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현재 여성운동가이자 여성목회자로 그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 펼치는 인권운동은 미시적 차원에서 이주여성의 인권보호를 위한 인권상담 및 법률적 지원, 이주여성 가정폭력 쉼터운영, 한국어와 문화교육, 다문화가족프로그램 등을 거시적 차원으로는 이주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활동, 법 제정운동과 정책 제안 등을 통해 정부와 사회가 이주여성을 위한 더 나은 제도를 마련할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오랜 시간 내가 여성운동을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추진할 수 있게 만드는 에너지는 차별과 불의에 대한 분노다. 분노는 나를 행동하게 만든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우리 시대의 행동하는 페미니스트이자 가슴이 따뜻한 휴머니스트 한국염 목사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 만났다.

    1. 결혼이주여성 인권운동의 개척자, 한국염 목사

 

한국사회에서 국제결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약 20여 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다. 결혼이주여성들이 우리사회에 이웃이 되기까지 우리사회에 정치경제, 사회문화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그들은 우리사회에서 낯선 이방인이 아니다. 우리주변에서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이웃이다. 우리사회의 새 이웃이자 후()주민인 결혼이주여성들의 인권보호를 위하여 이들에게 불합리한 국적법 및 체류권 보장을 위한 배우자 신원보증제 폐지운동 등, 정부와 공권력의 차별과 억압에 강력하게 맞서며 한국이주여성인권운동의 역사를 쓰고 있는 한국염 목사, 햇살이 따스한 5,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 그의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염 목사(67)1991년 독일에서 신학박사 공부를 하던 중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소외된 이들을 위한 목회를 실천하기 위하여 평탄하게 살 수 있었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귀국, 남편(최의팔 목사, 외국인노동자센터소장)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란 표어를 내걸고 후미진 창신동 뒷골목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평화를 위한 공동목회를 시작했다. 그는 창신동을 중심으로 우리사회에서 가장 소외받고 차별받는 도시빈민들, 특히 저소득 맞벌이 가정과 한부모 가정의 자녀를 위한 무료 탁아방 설치와 운영을 시작으로 청소년지역공부방(현재 지역아동복지센터의 현신), 결식아동을 위한 신나는 밥집을 운영해 왔다. 이곳에서 1996년 외국인노동자들을 만났고, 2001년 이주여성들의 인권을 위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를 설립하여 고통받는 이주여성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함께 하면서우리사회의 어두운 구석구석에 희망의 빛을 비추고 있다.

 

1960년대부터 성차별 철폐운동을 벌여

한국염 목사의 주요 관심분야는 페미니즘을 바탕으로 한 반차별 반억압 운동이다. 대학시절부터 평등과 정의문제에 관심하여 70,80년대는 민주화운동, 교회양성평등운동에 참여했고, 1990년대엔 도시빈민 여성과 아동의 복지지원 활동과 성차별로 고통받는 교회여성 반차별운동과 교회내 성폭력추방운동,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운동에 참여했고, 2000년대는 이주여성의 문제에 매달렸다. 그가 항상 우리사회에서 억압받고 차별받는 취약한 소수자들의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이유는 우리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으로 인하여 벼랑 끝에 설 수밖에 없는 소외계층을 섬기는 그의 소명을 실천하기 위함이다.

 

특히 한국염 목사의 활동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성과는 결혼이주여성들의 인권보호에 관한 것이다. 국제결혼이 시작되던 초기,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결혼이주여성의 인권보호를 위하여 그는 2001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를 설립하여 인종차별과 성차별, 가정폭력 등으로 고통받는 결혼이주여성의 한국사회 정착에 큰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당시 이주여성들의 인권불모지였던 한국사회에 결혼이주여성들의 안정적인 한국사회정착과 인권보호를 위하여 2005년 정부로 하여금 국제결혼이주여성을 위한 사업을 하도록 2년 동안 추동해 결국 여성부로 하여금 결혼이주여성을 위한 사업을 실시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이혼하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본국으로 귀국하도록 되어있는 국제결혼이주여성을 위해 가정폭력 등 혼인파탄의 귀책사유가 없는 이주여성은 국내에 체류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토록 하였다. 이 법 개정으로 인권침해를 받은 많은 이주여성들이 한국에 체류하며 국민이 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폭력피해를 당한 이주여성이 상담하고 신고할 수 있도록 이주여성성긴급전화 1577- 1366 전화를 개설하여 자리를 잡도록 했으며, 가정폭력피해를 입은 이주여성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가정폭력방지법을 개정토록 하고 가정폭력피해 이주여성이 보호받을 수 있는 이주여성쉼터를 설치토록 하였다. 이를 통해 지금도 많은 이주여성들이 보호를 받고 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도 그의 제안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염 목사가 이주여성인권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1980년대 말에 창신동에서 빈민운동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경기도 성남에 있는 양말 공장에서 일하던 이주노동자들이 그가 빈민운동을 하던 청암교회로 피신해 오면서다. 그들의 어려움을 알게 되면서 이주노동자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여성이주노동자들은 퇴근하면 자기시간이나 휴식을 가질 수 있는데, 결혼이주여성들은 그런 시간조차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결혼이주여성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는 이주여성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상담과 교육, 모성보호와 육아지원사업을 하면서 동시에 이주여성을 위한 각종 정책과 제도를 만드는 한편 잘못되거나 방기되고 있는 정부의 정책을 바꾸는 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국제결혼중개업체들의 인신매매성 중개실태를 알리고 이를 규제토록 하는데 앞장섰으며, 무분별한 지방자치단체의 농어촌장가보내기지원사업을 규제하도록 하였다. 또한 시민단체와 연대하여 법무부의 사회통합이수제’,‘영주자격전치주의도입제도, 결혼이민자 비자강화 정책 등 이주여성을 규제하는 법무부의 정책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고 개선책을 제시하여 법무부의 시정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이런 한국염 대표의 노력을 보며 한국염대표가 가는 길에 곧 이주여성의 인권을 위한 길이 열린다.”라는 말이 돌기도 한다.

 

이주여성의 인권을 위한 한국염 대표의 활동은 때로는 그의 신변에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아내를 폭력해 이혼당한 남편들이나 국제결혼중개업자들이 한 대표 때문에 자기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위협하기도 하고 한 대표가 일하고 있는 센터 앞에 집회신고를 해놓기도 하고, 한 대표가 주관하거나 참석하는 토론회나 정책세미나 장에 와서 난장판을 벌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위협에도 개의치 않고 꿋꿋이 자기 길을 간다.

한 대표는 시간이 갈수록 한국 내에 외국인혐오단체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는데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그는 한국사회를 열린 다문화사회를 만들기 위한 빗장열기 교육을 통해 한국사회의 인식개선사업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의 교육을 들은 사람들의 이주여성에 관한 편견이 많이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염 목사의 이주여성인권운동 개척의 생생한 실천전략과 경험에 대한 일문일답

 

남편 최의팔 목사와 함께 이주노동자 운동을 하셨는데, 따로 결혼이주여성인권센터를 만든 계기가 있었나요?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 받는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바로 이주노동자였어요. 그 이주노동자들 중에 이주여성들이 더 약자였고요. 당시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활동가들을 보니 성인지적인 면이 약하다는 판단이 들어서 여성운동의 경험이 있는 제가 이주여성을 위한 지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당시 이주여성 쉼터가 전국에 하나도 없었어요. 남성이주노동자들은 노숙을 해도 되는데, 여성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당시에는 이주여성에 대한 인식이 없던 때라 한국에서는 돈을 구하지 못해서 독일 교회기관에서 3천만 원을 지원받아 시작했어요. 막상 독일에서 돈이 왔는데, 전세 값이 5천만 원으로 뛴 거예요. 국내모금을 해서 채웠는데, 이제는 외국인이라 전세를 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세를 끼고 작은 집을 하나 샀어요. 이게 한국 최최의 이주여성 쉼터가 된 거지요. 우리 쉼터가 지금은 창신동에 없고, 다른 곳에 있는데 그게 시금석이 되어서 오늘이 있는 거지요. 그렇게 시작이 되었어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지위 향상과 여성차별 철폐운동을 어떻게 하셨나요?

한국 최초의 여자목사가 되고 싶어서 신학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가보니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말도 안되는 성경을 끌어다 대면서. 전 여자가 능력이 없어서 목사가 못된 줄 알고 있다가 성차별적 제도 때문에 그렇다는 걸 알고 이때부터 여성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교단 여신도회 전국연합회에 실무자로 들어가서 여성신도들 의식화교육을 시작하며 투쟁을 계속하여 여자목사가 됐습니다. 제가 대학원 졸업하고 잡지사에 있었는데 월급이 24만원이었어요. 그런데 여신도회는 14만원밖에 못줬어요. 그래도 일의 의미를 느끼고 이 일을 택한 거지요. 여신도 의식화교육을 할 때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여성들이 자신에 대해 눈을 떠가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이주여성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이후에 교회 내 성폭력을 금지하지 위해 1998년 교회 내 성폭력문제를 터뜨렸고, 목사들의 성폭력문제를 처음 이슈화했지요. 교회내 성폭력문제를 다루니까 국정원에서도 우려를 했어요. 공청회를 할 때는 경찰 2개 소대가 와서 보호를 할 정도였어요. 보수 교회들이 행패를 부릴까봐요. 가부장적인 예배와 설교, 관행들에 대해서도 비판을 했어요. 이런 것들이 교회를 성차별교회로 만드니까요. 교회가 바뀌어야 사회도 같이 바뀌지 않습니까? 교회개혁운동을 벌이며서 사회의 성차별 철폐운동에도 참여했어요. 호주제 폐지운동 등 여러 가지 사회 이슈에 다 참여했어요. 성차별이란 하나의 연결고리가 있으니까요. 사회의 변화와 교회의 변화가 서로 맞물려 있으니까요. 주한미국기지촌 여성문제, 군산개복동의 성매매여성문제, 농민여성문제 등 차별이 있는 곳에는 열심히 참여하려고 애썼지요.

결혼이주여성 인권운동을 할 때 활용하신 전략은 어떤 것인가요?

전략이란 게 별다른 것이 없어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성폭력문제, 교회성차별폐지운동, 호주제폐지운동, 우리 사회 이슈에 다 참여하였고, 빈민운동, 민주화운동, 여성운동 등을 섭렵하다보니 어느 덧 운동에 대한 방법을 체득하게 됐습니다. 운동이라는 것은 단기간에 해결되지 않아요.

제가 우리나라 이주여성 관련법이나 정책을 바꾸는 데 이바지 하게 된 동력은 이전에 교회여성과 한국여성운동을 하면서 터를 잘 닦아 놓았기 때문이에요. 거기에다 숟가락을 하나 더 얹어 놓은 거라고 봐요.

초창기에는 이주노동자만 이슈가 되었어요. 국제결혼여성은 존재감조차 없었는데 짧은 시간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됐습니다. 그동안 여성운동과 민중운동을 한 것이 이주여성운동으로 이어지게 된 것인데 그 기초를, 추동력을 놓은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그동안에 했던 여성운동을 비롯한 다른 운동들이 이주여성운동을 하기 위한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독일에서 파독광부와 간호원들의 이주노동자들의 삶이나 독일 정책을 보게 된 것, 여성운동에 참여했던 경험도 큰 힘이 된 것 같아요. 미리 준비 되었다고나 할까요? 이런 경험들에 이 큰 원동력이 되었던 거지요. 결혼이주여성을 비롯해서 이주여성들을 보면 문제의 핵심이 보였어요. 저는 생각하면 실천에 옯기는 사람이라 바로 운동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면 전략은 어떻게 세우셨나요?

그동안 살아 온 노하우를 제도적으로 확대했어요. 이주여성과 생활화다보니 이들이 필요한 것을 정부에 제안을 한 거죠. 제가 만드는 전략은 우선 이주여성이 이런 제도가 필요하다, 정부에 먼저 건의하고요. 안 되면 단체를 모아서 기자회견하고, 그것도 안 되면 농성도 해요. 이주노동자들의 합법화나 인권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국회 앞에서 제도 개선을 위한 2주 단식투쟁도 했고요. 한 겨울 성공회 성당 뒷머리에서 3개월 천막농성도 했어요. 이런 노력들이 모아져 고용허가제라는 게 만들어졌는데, 원래는 노동허가제를 목표로 했지만 현실과 타협한 셈이지요. 이주여성들을 위해서 출입국 앞 시위나 길거리 시위는 했어도 아직 농성 같은 것은 안해봤어요. 대신 정부 정책을 모니터링하고 문제에 대해 캠페인과 제도 마련과 개선을 위한 건의 운동을 주로 했지요. 이런 운동 전략들은 1960~70년부터 시작해서 1980년 대 삶에서 배운 겁니다. 단지 이슈만 다를 뿐이지요. 주제와 타킷에 따라서 다른 거지. 맥락은 다 같아요. 차별받고 억압받는 사람을 위한 일이니까요.

 

결혼이주여성인권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요?

미국은 이민국가이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이 존재하지요. 일본은 뉴커머라고 해서 브라질 등 해외 동포들이 귀화하는데, 거기도 우리보다 더 차별이 심해요. 일본의 이주연구자들이 한국에 와보고는 깜짝 놀라요. 제도들을 많이 바꾸어 놓았잖아요. 한국 시민단체들이. 한국의 경우 단일 신화가 있어서 한편에서는 힘들었지만 우리나라는 NGO가 세잖아요. 이주민 운동하는 사람들이 민주화 운동했던 사람이라서 잘하는 거지요. 그러한 삶의 경험을 이주운동하고 연결하니깐 이주운동이 확확 바뀌는 겁니다. 그네들은 그게 없는 거죠. 그래서 그들이 한국의 시민운동을 부러워해요. 시민사회의 민주화경험과 여성운동 경험, 그것이 성공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해요.

 

결혼이주여성운동을 추진하면서 소진되었을 때 어떻게 이겨 나갔는지요?

운동이 생활화되어서 힘들지 않았어요. 그것이 제 소명이죠. 아직까진 소진되진 않았고, 특별히 어렵다고 하는 느낌이 없어요. 이건 내 생활이고, 내 삶이니까요. 제가 가끔 반성도 해요. ‘내가 민주화 운동할 때 그렇게 치열하게 데모도 하고, 그랬는데 이주민 운동도 치열하게 했는가?’ 자문해 보면 그렇게 치열하게 안 해서 소진할 일이 없어요. 아직까지 탈진을 안 한 것을 보면 죽을 만큼 한 거는 아니구나 생각해요.

힘이 되는 건 변화해 가는 것보다는 같이 있다는 게 힘이 아닌가 생각해요. 창신동시절에서 배운 거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다는 거, 이게 참 목회라고 배웠어요. 저하고 남편이 독일에서 창신동에 있는 빈민교회에서 목회를 처음 시작했을 때, 창신동 저소득 가정을 위해 놀이방을 시작했어요. 그때는 아직 창신동에 어린이집이 없을 때라 무료로 한 거지요. 저는 그때 창신동에 전세를 얻어 살고 있었는데 저녁에 엄마들이랑 대화를 하려면 이분들이 마음을 안여는 거예요. 이래서 안되겠다 싶어 교회가 있는 건물로 이사갔어요. 우리 교회는 공장의 한 낡은 건물을 얻어서 한쪽은 어린이집을 하고 다른 한쪽은 사무실로 쓰고 있었는데, 이 사무실 건물을 장롱으로 칸을 질러 장롱 이편에는 우리 부부와 딸이 자고, 저편에는 중학교 다니는 아들이 잠을 자는 식으로 살기 시작했어요. 3개월 지나니까 엄마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어요. 우리 삶의 모습이 자니게랑 별반 다를 게 없었던 거지요. 이런 엄마들을 보면서 배운 거지요.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요!”. 운동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있는 겁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하게 되면 기대하는 것이 있잖아요. 같이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해요. 함께 있는 것은 잘 안 돼도 그렇게 실망하는 일이 없어요.

 

그동안 펼쳐 오신 다양한 여성운동을 하시면서 획득한 성과를 꼽는다면?(개인적 변화에서 제도적인 변화까지)?

호주제, 성폭력특별법, 가정폭력방지법 등에 참여했고, 이를 경험으로 이주여성을 위한 지원법을 비롯해서 각종 법과 제도를 만들었지요. 이주여성에 대해 아무도 관심갖지 않던 초기에 이주여성 인권지원활동을 하면서 민간단체 힘에 한계가 있는 것예요. 그래서 여성부가 가장 열악한 이주여성들을 위한 일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여성부 장관을 2년 쫓아다니면서 이주여성 지원사업을 하도록 졸랐지요. 결과적으로 태평양화학기업에서 한해 2억 씩 5년 동안 10억 기금을 받아 이주여성을 위한 기금을 마련한 거죠. 당시에 이주여성에 관련한 일을 하는 전문단체가 우리밖에 없어서 결혼이주여성지원사업을 우리가 위탁을 받아 전국 6개지역에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제공했어요. 7~80년대 여성단체 대표로 쭉 여성운동에 가담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죠.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농민지역 같은 데는 거기에 맞는 곳에 연결했죠. 여기 참여한 단체들 중 일부가 우리 센터 지부가 되었지요.

정부가 이주여성 사업을 시작하니 언론에서도 관심을 갖게 되어 이주여성 지원사업에 동력이 붙게 되었어요. 이 여세를 몰아 이주여성을 위한 제도 마련에 나섰지요. 초창기에는 결혼이주여성이 이혼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어요. 이의 부당함을 알리고 결국 혼인파탄의 귀책사유가 이주여성 본인에게 있지 않을 경우 한국에 체류할 수 있도록 체류법이 개정되었지요. 이를 시작으로 가정폭력방지법에 외국인도 포함시키도록 개정하고 이를 근거로 해서 폭력피해 이주여성 쉼터도 개설할 수 있게 되었고, 폭력피해이주여성들이 자국어로 상담할 수 있는 이주여성 긴급전화 1577-1366도 개설하는 등, 제도개선과 법들이 마련되었지요. 이런 제도 마련이 가장 성과였다고 봅니다.

 

힘든 여건에서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운동을 하는 추진력은 무엇인가요?

불의에 대한 분노, 이게 엄청난 에너지가 된 거죠. 차별하는 현장을 보면 좌절하기 보다는 분노가 생겨서 그게 힘이 되는 거예요. 분노는 나의 힘이죠. 옳지 않은 것에 분노하는 것, 저는 이것을 분노의 영성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유 없이 차별하는 데는 화가 나요. 제가 태생적으로 반골이라 그런가 봐요. 옳지 않은 거에 분노하지 않고 지레 포기하는 사람보면 안타깝지요. 불평만 하는 사람 달래는 것보다 그 에너지 가지고 격려할 사람을 키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이 이주여성관련 운동을 한다면 어떤 조언을 하시겠습니까?

하면 되지요. 특별한 사람은 없어요. 다만 이주여성 일은 젠더 관점과 이주의 관점이 있어야 해요. 여성에 대한 성인지적 평등 관점과 지구화시대의 이주의 상황에 대한 인식만 있으면 되지요.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성의 문제를 볼 수 있는 사람, 이주여성관련 일은 평등한 젠더관점이 가장 중요해요. 이주여성 관련해서 일하는 사람 중에 젠더 관점이 없는 사람이 많아요. 반면 여성운동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주관점이 부족한 사람들이 있어요. 왜 세계화 시대에 이런 지구적인 이주가 생기는가? 이주와 신자유주의의 글로벌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해요. 여성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시각과 인식이 정말 중요합니다.

 

결혼이주여성인권운동이 발전되기 위해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은요?

정부가 자꾸 이렇게 센터도 세우고, 뭐를 세워서 관리를 하잖아요. 그러면서 예전에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자꾸 정부의 자금을 받으면서 운동이 약화됐어요. 이런 점이 안타까운데 어떻게 이주여성을 임파워먼트 하느냐는 것이죠. 결국 이주여성운동이란 이주여성의 주체성, 이주여성세력화인데 어떻게 이주여성과 시민들의 의식변화를 일으켜 이주여성이 주체성 있게 살 수 있게 하느냐? 그런 문제죠. 결국은 자기세력화를 해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이주여성들이 정부의 사탕에 약해서 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에 다문화가정에서 국회의원이 나왔으니까 많이 발전한 게 아니냐? 이렇게 물어요. 그러나 아직은 이주여성이 국회의원이 될 시기는 아니라고 봐요. 자칫하면 이주여성이 정치 도구화될 수가 있어요. 결혼이주민 이십만 명에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내놓을 시점이냐?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의원만들기 보다 중요한 것은 이주여성들이 세력화하여 정부정책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하느냐? 어떻게 이주여성 친화정책을 만들게 하느냐?는 것이예요. 이주여성의 롤 모델이 뭐냐는 거예요. 물론 이주여성 정치대표가 나오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정치대표가 있으면 롤 모델이 성립되니까요. 그러나 상징성으로 끝나서는 안되는 거지요. 자칫 문제를 흐릴 수가 있어요. 이주여성 정치인 한명 배출해놓고 봐라, 이만큼 이주여성의 인권이 신장되었다. 이러면 곤란한 거지요. 정의로운 이주인권 정책을 세워서 추진하는 것, 정책을 제대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 허긴 상징적으로라도 이주여성 국회의원 만들기를 하는 새누리당이 이주여성 입장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안하는 민주당 보다는 났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제가 새누리당 옹호하는 것으로 오해하지는 말고요. 다만 정치 홍보도구가 안되도록 경계하는 일은 필요하고요.

 

한국에서 결혼이주여성인권운동의 전망은 어떻게 보시나요?

이제는 한국인들이 하는 선에서 결혼이주여성 당사자들이 하는 운동으로 나가야죠. 지금 하는 운동은 당사자들이 앞으로 운동하기 위한 주춧돌이 되는 거죠. 우리도 주춧돌을 놓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이고, 당사자들이 운동을 할 수 있도록 그 기틀을 우리가 만들어주는 거지요. 이주민운동은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시작했어요. 그래서 힘이 있는 거지요. 일본에서 이주운동하는 사람들이 한국의 이주문제 발전을 보면서 깜짝 놀리지요. 민주화운동의 경험 때문이라고 답해요. 민주화운동하다 이렇게 이주운동으로 와서 여태껏 20여 년 동안 깔아 놓은 것들이 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니까. 결국은 당사자와 함께 옆에서 치열해야 한다는 거죠. 당사자운동으로 나가야 하는 거죠. 우리 센터의 미래를 구상하면 이주여성들이 지도력이 발전해서 센터의 대표가 되는 날이 오는 거도 꿈 중의 하나입니다.

 

운동할 때 장애가 많이 있었을텐데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가로막는 것, 장애라는 것 자체가, 부수거나 넘어가야 하는 것이잖아요? 벽은 부수는 길이 있고 돌아가는 길이 있는데 담만 있다면 넘어갈 수 있지만 견고한 지붕까지 있다면 부수어야 되는 거죠. 중요한 것은 장애를 극복 못할 것이라 포기하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70년대 운동하면서 부른 노래가 있는데혼자로는이라는 노래가 있어요.“혼자로는 힘들겠네. 둘의 힘으로도 할 수 없겠네. 둘과 둘이 모여 커단 함성 될 때 저 억눌린 사람 참 자유 얻겠네.” 이런 노래가 있어요. 결국 함께 가는 거죠. 이주여성당사자들과 우리들은 다 한 자매잖아요. 함께하면 힘이 들지 않아요. 살면서 보니 운동이란 것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거고, 옆에서 같이 해야 힘이 돼요. 도종환 시인이 말한 것처럼 담쟁이가 어느 날 보니 함께 벽을 넘더라. 그런 것이 장애를 넘는 힘이죠.

 

실천가로서 한국사회복지학계나 사회복지실천가들에게 바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첫째, 사회복지를 살펴보면 사회복지하시는 분들은 자기한테 오는 대상들을 대상으로만 보는 거 같아요. 한국사회복지는 실적주의에요. 숫자로 다 봐요. 인권사회복지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고 있어요. 클라이언트들에게 수혜가 강화되다보니 대상을 주체적인 사람으로 만들기보다는 시혜적인 사람으로 자꾸 길들이는 것이죠. 그런 초점으로 클라이언트에게 복지를 베풀면 수혜를 받는 당사자인 수혜자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사회복지현장 실천가나 사회복지사가 인권개념이 없다보니 이주여성을 수혜대상으로 보면서 그들을 거지근성으로 만드는 것 같아서 그런 게 걱정이 됩니다.

두 번째는 인권 감수성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용어에요. 용어에 대한 차별이 없어야 해요. 이주민과 함께 할 때 용어를 살펴야 하지요. 나는 한국인, 당신은 외국인, 이 사이에 벽이 생겨요. 우리는 먼저 오래전부터 여기에 살았으니 선주민이라고 하고, 뒤에 우리 땅에 온 사람들이니 이주민이라고 하면 평등 관계가 형성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 센터에서는 선주민 활동가, 이주민활동가라고 불러요. 이런 것부터 차별성을 없애야 해요.

 

차이는 차별하지 않고 차이를 인정하는, 더불어 사는 사회가 되어야

차이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인권의 기본이고 지금 다문화사회에서 기본 슬로건이에요. 이것이 기본인데 한국 사람들은 그런 차별도 무시해요. 그런 취약계층에 있는 사람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이주여성들은 다문화가정이란 용어를 싫어해요. 우리나라는 다문화라는 것이 하나의 계급으로 분리되고 있어요. TV프로그램 미수다에 나오는 사람들은 글로벌가족이라고 해요. 그러나 동남아에서 온 사람은 다 다문화가정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차별이라는 거죠. 다문화 아동들한테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다문화 남아라.”라고 한다고 해요. 바로 이것이 차별이지요. 그래서 다문화아동 이런 것에 대한 용어를 고려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주배경청소년, 베트남출신 한국인 이렇게 자기 출신국 배경을 말할 수 있는 언어사용을 사회복지현장에서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해요.

셋째, 사회복지를 권리로 볼 것이냐. 시혜로 볼 것이냐의 문제인데, 사회에서 공동체로서 함께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사회보장이지요. 문화도 문화를 향유할 때가 중요해요. 사람들이 문화를 권리로 향유하느냐 아니면 시혜로 향유하게 하는 거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문화를 향유하는 것을 권리로 보아야 하지, 시혜로 향유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이주민들도 자신의 문화를 권리로서 향유할 수 있게 해야 해요

 

언제까지 이 운동을 하실 건가요?

이 운동을 특별히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저에게 와서 하는 것이니,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할 겁니다. 만일 결혼이주여성을 비롯해서 한국에 거주하는 모든 이주여성들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 또 다른 소외계층이 저를 찾아오면 또 다른 일을 하게 되겠지요. 남북교류가 이루어지고 북의 주민들이 남쪽으로 와 살게 되면 그분들이 중요한 소외계층이 될 것 같은데, 아마 그분들과 함께 있지 않나 싶네요.

 

2013년 중앙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의 급진사회복지실천이라는 수업에 참여한 이들이 기획, 현장 활동가들을 인터뷰하여 급진사회복지 실천가들의 현장 이야기를 엮어 〮 『옆으로 간 사회복지 비판이라는 책으로 출간하였다.

이 글은 김은재가 한국염을 인터뷰하여 이주여성의 빛과 소금이 되다.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글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