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여성의 고난에 대한 성서적 응답
한국염
‘여성들의 신학하기’에는 여성의 고난을 기억하고 회상하는 일이 중요한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먼저 한 기지촌 여인의 삶을 소개하는 글로 ‘기지촌 여성 윤금이를 기억하며’라는 시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윤금이’는 송정숙 여인과 함께 기지촌 여인의 삶을 대변하는 대명사다.
“ 기지촌 여성 윤금이를 기억하며*
하나님, 내가 탄식할 때에 내 소리를 들어주십시오.
제 이름은 윤금이, 남들은 ‘기지촌 여성’ 이라고 부르지요.
하나님, 어쩔 수 없이 미국병사들의 성 노예가 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우리가 탄식할 때에, 우리 소리를 들어주십시오.
험악한 미군 병사들의 성폭력의 위협에서 ‘우리의 생명을 지켜 주십시오’ 하고
언제나 기도했지요.
....
미군과 한국정부가 모의하여 만든 동두천 기지촌,
외인부대에 내 던져진 성 노예의 희생물이 되어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처절하게 살고 있는 신세들
돈 몇 푼에 험악한 노랑머리 사내들의 성 노예가 되는 것도 모자라
대한국민으로서 보호와 안전도 받지 못한 채
미군들의 전용나이트 클럽 호스테스로, 딸라 몇 푼 쥐어주는 미군들 속에서
웃음과 몸을 팔아 푼돈 모아 불쌍한 어머니에게 보내야지!
그들이 내 몸에 거리낌 없이 악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 칩니다. “누가 우리를 막으랴?”
1992년 10월 28일, 케네스 마이클이란 미국병사가
성을 팔아 생존하는 피곤에 지친 이 연약한 몸에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짓거리를 해 나는 순식간에 쓰러졌지요.
아, 그의 행악으로 나는 죽임을 당했고, 사냥개에게 물린 동물처럼 시신마저
콜라병과 우산대가 꽂혀지고, 가루비누 뿌려져 차마 볼 수가 없구나!
나의 영혼도 차마 처참한 내 시신 위를 떠나지 못했었지.
...........................
윤금이 살해대책협의회가 뿌린 성명서에 실린 내 처참한 시신은 부끄럽게도,
아주 낯선 외인이 되어 내 나라 사람들의 발걸음이 머문 서울 역 땅 바닥에,
시골의 어린 내가 처음 발 내린 서울역 그곳에, 대학교 교정의 나와 동갑짜리 학생들 속에
나는 그렇게 누워있고 벽에 수없이 부쳐있었네 ,
법정에 내 처참한 시신이 누워서 우리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을 주장하게 되었네
드디어 나의 죽음은 주한미군범죄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불평등한 한미행정법 개정을 주장한다네
이 땅의 여성들, 젊은이들은 용산 미팔군 정문 앞에서 매주 금요일 정오만 되면 외쳐대네.
“미군은 이 땅에서 떠나거라!” “한미행정법을 개정하라!”
내 죽음이 불씨가 되어 미군이 이 땅에서 사그리 사라질 때까지
나는 처참한 내 시신 옆을 떠 날 수가 없네.
-유춘자, 「기지촌 여성 윤금이를 기억하며」, 한반도에서 살아나는 여성시편에서 축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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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 여성이란 “미군이 주둔하는 기지 주변에서 미군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여성”을 말한다. 이러한 기지촌 매춘 여성의 문제는 노동문제, 농촌문제, 빈민문제, 여성문제에 분단의 문제가 더해진 형태다. 성서는 이러한 기지촌 여성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성서에서 기지촌 여성을 읽으려고 할 경우 기지촌은 성매매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성서가 성매매를 어떻게 보는지를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성서에서는 성매매(매춘)를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조나’라는 말로 표현되는, 돈을 벌기 위한 세속적 성매매이고 다른 하나는 ‘케데사’라는 말로 표현되는 종교 제의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성매매다.
‘케데사’란 신전에서 제의적 매춘에 종사하는 성전 창기와 창녀들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소위 ‘매춘부’라 하는 성매매 피해 여성들의 문제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성매매에 대한 여성신학적 응답
역사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매매를 없애려고 노력하였으나 제대로 성공을 거둔 일이 없었다. 왜 그럴까? 대부분이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이하 매춘부)을 회개해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위한 임시변통으로 갱생의 길만 열어 놓았지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 역시 성매매가 발생하는 구조에는 관심이 없이 매춘부 여성을 죄인이라고 정죄하면서 회개를 기다린다. 여기서 마찰이 일어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용산에 있는 막달레나의 집에서 전에는 성매매를 하다가 그 생활을 벗어나 성매매여성들을 섬기고 있던 한 활동가가 들려 준 이야기다.
“언젠가 제가 아이들하고 쭉 만나서 상담을 하면서 지내온 적이 있는데, ‘언니, 성당 갈 때 나 좀 한번 데리고 가, 성당에 가보고 싶어’. 그래서 여럿을 데리고 간 적이 있어요. 우리 지역에 있는 교회로 나간 적이 있는데 그 때 저를 알고 그 애들을 알고 있던 신자 한 분이, 참으로 교회 일 열심히 잘 하시는 분이어요. 그 분이 대단한 분인데 그 양반이 나를 보고 하는 이야기가 저 애들, 저 생활에서 언제 끝내느냐?, 왜 그러냐고 하니까 그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교회에 나오면 교회 인상이 나빠진데요. 정말 그런 사람이 교회를 찾음으로 해서 교회의 인상이 나빠진다면, 정말 교회가 이 땅에서 무슨 소용이 있으며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혼자 들었으니 망정이지, 그 애들이 들었으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겠는가? 그래서 다시는 그 애들을 데리고 교회를 안 가요.”(한국교회여성연합회 편, <국제세미나-여성과 관광문화> 자료집에서 인용)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는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조차도 죄인이라고 정죄하지 않았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예수는 그 여인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과 이 여인을 죄인으로 몰고 가는 잘못된 성 인식과 구조악을 꿰뚫어 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처럼 성매매여성들이 여성억압의 한 희생자이며 매춘제도는 가부장제도 하에서 빚어지는 구조악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고 예수가 간음한 여인에게 말했다고 성매매여성의 자리가 쉽게 포기되는 것이 아니다. 설사 그 여성 교인이 바라는 대로 그 여성들이 그 생활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그 자리는 다른 여성으로 교체될 뿐이지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않는다. 성매매가 근절되려면 성매매가 일어나는 구조악의 고리를 깨뜨려 버려야 한다.
첫째, 남성 중심적인 성 인식과 성의 이중 규범을 바로 잡아야 한다.
성매매는 왜 발생하는가? 성매매제도는 성의 이중 규범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성서는 물론 남자나 여자나 혼전 순결을 지키도록 장려한다. 그러나 신부의 처녀성과 결혼한 여자의 정조는 강조되었지만, 남자의 순결상실은 문제 삼지 않는 이중적인 규범이 문제다. 신명기 22장 20절 이하에 의하면 신부가 처녀성을 상실한 것을 발견했을 경우 돌로 처 죽이도록 되어 있고, 남자가 미혼 여자와 자다가 붙잡혔을 경우에 처녀의 아버지에게 오십 세겔을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재산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여자가 처녀성이 없으면 돌로 맞아 죽는데, 남자는 간단한 손해 배상만 하면 되었고 또한 기혼남의 간통은 넘어가면서 기혼녀의 간통은 제재를 가했다. 이렇게 이중적인 성 규범의 이면에는 여자를 재산의 일부로 보는 가치관 때문이다. 여성을 재산으로 가치 매김 하는 사회에서는 여성의 성이 상품으로 팔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여성을 상품화하고 억압하는 규율을 만들어 놓고 남성은 성 구매자로서 성적 자유를 누리는 남성중심적 성차별 제도 하에서 성매매제도가 형성된 것이고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의 성을 상품으로 보며, 성에 대한 여성의 권리는 없고 오직 남성의 권리만이 있는 가부장적 성 규범이 없어져야만 성매매는 뿌리 뽑을 수 있다.
둘째,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성서에서 어떤 사람들이 매춘부가 되었는가를 살피면 매춘과 여성의 지위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사람들이 매춘부가 되었는가? 우리가 성서에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노예나 과부, 고아, 그밖에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매춘부로 나섰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말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유일한 생계 보호막인 막내 시동생을 주지 않자 창녀로 나서서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했다든지, 라합이 여리고성 성곽주변에 살면서 식구들을 부양했다던 지, 또 가난에 딸들을 판 부모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아모스나 느헤미야서, 남편에게 쫓겨나 성매매를 하게 된 고멜의 경우 등을 보아도, 성적 방종 때문이 아니라 생계 유지 때문인 경우가 허다하다. 다른 경우는 국가가 전쟁에 졌을 때 포로로 끌려가 성노예가 된 경우다.
이런 현상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윤금이의 경우에서 보듯이 대다수의 성매매여성은 가난에 밀려 기지촌으로 흘러들어 간 것이다. 만일 여성들이 직업전선에서 언제나 이차적인 위치가 아니라, 남성과 같이 인정받고 안정된 직장에서 일할 수 있었다면, 성매매피해여성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빈곤의 여성화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여성의 빈곤화는 여성을 성매매 업소로 몰아넣는다. 제삼세계의 가난한 나라에서 부모들이 어린 딸을 매춘에 넘기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생존권을 저당 잡힌 여성들이 매춘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성매매여성의 문제는 생존권의 문제이고 인권의 문제다. 왜 여성의 인권이 이렇게 몰락하는가? 그것은 남존여비, 여성의 상품화라는 가부장적 가치관 때문이다. 성매매 여성 문제는 생존권의 문제, 인권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며, 성매매가 사라지기 위해서는 잘못된 가부장적 가치관과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
성서는 우리에게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세기 1:27). 이 선언에 의하면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이며 여자도 번성할 권리가 있고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다스릴 권리가 있다. 그런데 역사는 남자만 다스리고 남자만 존엄한 존재로, 여성을 다스리고 있다. 이런 왜곡된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여성들이 성매매로 내몰리고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분단의 희생양 -기지촌 여성
윤금이 사건으로 대표되는 기지촌 여성의 문제는 단순한 매춘 문제가 아니라 빈곤의 여성화와 여성의 성 상품화, 군국주의, 미패권주의가 뒤얽혀 빚어내고 있는 여성의 고난 문제다. 1945년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된 후, 이 한반도는 미소 양국에 의해 분단이 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남한 땅에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들 미군주둔지는 의정부와 동두천, 송탄 등에 자리를 잡았고 이 주둔지 주변에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기지촌 여성이란 이 주둔지에 있는 미군에게 몸을 파는 여성들을 말하며 속칭 ‘양공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기지촌 여성이 되는 경우는 일반 매매춘에 종사하다가 팔려 오는 경우와 곧 바로 이 기지촌으로 오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가난이 주원인이고 남자에게 버림받거나 성폭력을 당한 상처로 자포자기하여 오는 경우도 있다.
미군을 상대로 하는 매춘 여성이 거주하는 이 기지촌 여성은 힘없는 나라에 속한 민족의 아픔과 분단의 비극을 처절하게 몸으로 감내해 내는, 고난의 삶을 살고 있다. 기지촌 여성은 강간을 비롯한 온갖 폭력과 마침내는 살인 등의 능욕을 당하고도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히 서 있는” 그 어린양처럼 침묵을 강요당하는,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주한 미군이 저지르는 범죄는 기본적으로 주둔군으로서, 정복자로서 한국인에 대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미군이 저지르는 범죄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한미행정협정으로 인해 처벌도 되지 않고 된다고 하더라도 가벼운 처벌에 그친다.
처음 서두에서 인용한 윤금이씨 사건은 자본주의에 의해서 배태된 여성에 대한 성상품화로서 가장 인권이 침해된 경우이다. 미군에 대한 기지촌 여성의 접대는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외세에 의한 지배의 역사와 연결된다. 고려시대 원군에 의해 포로로 끌려간 ‘환향녀’, 그리고 일제 식민지시대 때 끌려갔던 ‘일본군위안부’에 이어서 민족분단 하에서 미군의 주둔 하에 ‘기지촌여성’으로 이어진다. 미군 기지촌 여성의 문제는 제 1세계에 의한 제국주의와 다국적 기업 그리고 가부장 문화 등에 따른 힘의 역학 관계가 깊이 개입된 문제이다
일반 여성의 순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성매매제도가 용납되었던 것처럼, 기지촌 여성은 자국 여성의 보호를 위해 이중, 삼중의 사회구조적 모순의 짐을 지고 미군들의 성 착취와 범죄에 내던져 있다. 이들은 민족 분단의 희생양으로, 동족 여성들의 방패막이가 되었는데도, 동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미 제국주의의 성 착취와 유린 속에서 소외당하는 기지촌 여성의 문제는 분단의 극복과 한미행정법 개정의 과제를 안고 있다.
기지촌 여성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호세아서에 나오는 고멜을 회상하게 된다. 고멜은 산상 제의에 참여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편 호세아에게 음탕한 여성으로 낙인찍힌 여성이다. 이 제의 매춘은 누가 만들었는가? 도시국가의 위정자가 종교를 통해 백성을 통제할 정치적 목적으로 만든 매춘제도다. 고멜은 호세아가 보듯이 음탕한 여인이 아니라 오히려 이 제도의 희생자이며 피해자다. 결벽증과 편견에 사로잡힌 호세아의 박해를 견디다 못한 고멜은 집을 나가 다른 남자에게 빌붙어 사는 창녀가 된다. 당시 집을 나가 여자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창녀가 되는 길뿐이었다. 고멜이 집을 나가자 호세아는 자기 자신과 고멜의 관계를 돌이켜 보게 된다. 자신의 잣대로 고멜 위에 군림하고 고멜을 종으로, 비인격 존재로 대한 자신을 반성한다. 그는 이제까지 고멜의 주인으로 군림했던 자세를 고치고 사랑하는 낭군으로 돌아설 것을 다짐한다. 고멜을 데려 오기로 하면서 호세아는 이렇게 다짐한다.
“ 그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호세아서 2장 19절)
오늘날 기지촌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정의와 공평이다. 국가가 힘이 없어 미국의 비위를 맞추노라 만든 불평등행정법을 바로 잡고 기지촌에 정의와 공평의 법이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이들을 위해 예수가 왔다고 한 것처럼, 한국교회가 정의와 공평을 세우는 일에 나서야 한다.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회복을 위한 자매애와 연대가 필요하다.
성매매 여성 문제는 생존권과 인권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며 근본적으로 성매매가 사라지기 위해서는 잘못된 가부장적 가치관과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과제가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문제를 놓고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할 점은 우리 한국의 기지촌 여성보다 더 착취당하는 여성들이 있다는 점이다. 유엔 통계에 의하면 아시아에서 이주노동을 떠나는 사람들의 70%가 여성인데, 이 여성들은 가사노동과 유흥업 종사자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다. 필리핀, 러시아 등 우리나라보다 경제적 수준이 낮은 나라에서 여성들이 관광협회의 초청 형식으로 연예인비자를 받고 입국해서 기지촌으로 내몰려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기지촌 업소의 90%가 이주여성들이다. 이들은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는 한국여성들이 겪는 착취와 인권문제에 외국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 이 또한 ‘빈곤의 세계화’로 파생된 ‘빈곤의 여성화’ 현상 속에서 발생한 ‘이주의 여성화’ 가 빚어낸 결과다. 기지촌 이주여성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엄성을 회복하는 길을 모색할 과제가 있다.
20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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