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신학의 흐름과 대안
한국염(한국여신학자협의회 총무, 교회협 여성위원)
1. 생태신학에 대한 요청
“우리는 이 땅에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공해산업이 폐기되고 생명을 북돋아 주는 평화산업이 일어나기를 촉구합니다. 우리는 자연환경이 기술문명의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조화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공생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합니다. 특히 무분별한 에네르기 소비와 원자로의 피해, 폐출방출은 비단 자연과 생명파괴만이 아니라 오고 있는 우리의 후세들에 대한 자연환경적 재앙을 물려주는 일이라 믿습니다. 오늘의 세계자원은 다 소모되고 향락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후세와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분배정의가 갖는 내용일 것입니다....”
위의 글은 1988년 한국 서울에서 열린 JPIC세계대회시에 체결된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한 한국교회의 입장과 결의다. 그런데 이 대회 이후 한국의 생태게 파괴문제는 더욱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는 JPIC대회에 참여해서 결의를 맺었던 사람들을 위시해서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생태걔 보전을 위해 나서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물론 교회협 환경위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 일각에서 창조의 보전을 위해 일해 왔다. 그러나 우리의 환경운동은 자신이 인간으로서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그 기존의 틀을 유지한체 보완하는 입장에서 환경을 개선하려고 하니까 생태계 보전이 안되는 것이다. 환경운동을 한다고 하는 우리 자신 스스로가 편리주의와 소비하는 삶에 길들여져 있다. 우리는 내년이면 새로운 삼천년을 맞는다고 그 준비를 한다. 새로운 3천년을 눈앞에 두고 그 삼천년을 조명하느라 보라빛 꿈에 젖는다. 그러나 생태계의 문제를 생각하면 우리에게 새로운 삼천년이 과연 존재할 것인가? 하는 불안이 앞선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햄릿의 독백인 이 연극 대사가 오늘 오염된 생태계를 살아야만 하는 우리의 처절한 독백이 되고 있다. 오늘날 환경의 위기는 생태계의 위기나 생태계의 파괴를 넘어서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의 생존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이러한 위기를 초래하게 된 근본원인과 책임을 묻게 되는데 그 원인과 책임이 상당수 잘못된 기독교 신학에 있다고 본다. 즉 기독교의 인간중심적 세계관과 창조신앙이 생태계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생태계 위기 문제와 더불어 신학에 대한 새로운 반성이 일고 있다. 왜냐하면 그동안 신학은 자연을 하나님의 구원사의 범주에서 배제시키고 오로지 인간의 정복의 대상으로 간주함으로 자연파괴와 착취의 길을 터놓았고 그 결과 생태계 몰락 현상을 가져왔음으로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점의 신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로테 죌레가 쓴 <사랑과 노동>에 의하면 생물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을 파괴하려는 세가지 차원에서 박멸의 위협이 있다. 자연의 파괴(환경파괴), 가난한 자들에 대한 전쟁(굶주림), 핵무장에 의한 위협(군비증강). 이렇게 박멸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의 근거는 창조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까지의 신학이 가르쳐 온 대로 하나님은 무로부터 이 세상을 창조한 절대자고 세상은 피조물이라는 이분법적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 인간, 세상이 분리되지 않는 통전적인 신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생태신학에로의 전환이 요청된다.
2. 생태위기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논의에 관한 생태학자들의 입장
1) 기독교의 창조관과 생태위기의 책임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을 발표하여 생태계 파괴에 대해 경고를 한 이래 1970에 행해진 “지구의 날” 선포를 기점으로 소위 전통적인 창조신학 즉 기독교의 인간중심의 세계관이 생태계 위기를 초래했다고 비판하는 신학운동이 활발히 전개된다. 생태위기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론을 맨 처음 제기한 사람은 린 화이트다. 린 화이트는 1967년에 “우리 시대의 생태위기의 역사적 뿌리”라는 글에서 기독교만큼 인간중심적 종교는 없다고 지적하면서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창조신앙이 받아들여진 곳에서 인간중심의 세계관이 형성되어 자연에 대한 약탈과 파괴가 자행되었다고 보고 기독교가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라고 맹렬히 비판. 우리 시대의 생태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적용이 아니라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를 재고해 그를 생태주의자를 위한 수호신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란시스가 임종의 자리에서 지은 “창조안에 있는 것이 모두 그의 형제 자매임”을 노래한 찬양소곡 “태양의 성가”는 인간이 만물과 한 둥근 원에서 나왔다는 친족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린 화이트는 과학기술 발달로 인간의 환경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술낙관론자들의 의견에 대해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연파괴를 정당화하듯 과학자들 역시 과학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세계에 대한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관철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과학기술에 의해 생태위기의 극복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린 화이트의 주장은 1970년 선포된 “지구의 날” 안내 책자에 수록되었고 그후 많은 신학자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며 생태계 위기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을 묻는다.
독일의 신학자 카데(G. Kade)는 기독교는 인간이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고 창조에 대해 무제한의 지배권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이러한 창조신앙이 과학기술과 경제가 결탁하고 창조신앙이 시민사회의 이데오로기로 전이하면서 난국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G. Kade, "Oekonomische und gesellschaftspolitische Aspekte des Umweltschutzes", in: gewerkschaftliche Monatschrifte 5. 1971,S.5f, 김균진,<생태학의 위기와 기독교 신앙>,대한기독교서회,1991. p.20)
칼 아메리는 “기독교가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 사이의 계약을 인간중심으로 축소시킴으로 자연을 경시하는 태도를 형성했다고 주장, 기독교가 자연세계를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의 대상에서 제외시킴으로 자연을 오직 인간의 이용을 위한 대상으로 간주하여 생태걔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오영석의 “생태계의 신학적 이해 1”, 기상 1987. 10월호에서 인용) 이들의 주장은자연이 인간의 사용과 향유를 위해 인간에게 맡겨져 있다.”고 한 불트만의 선언을 보더라도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화이트를 비롯한 학자들의 지적이 등장한 후 기독교 안에서 생태문제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 일기 시작했다. 과연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의 참뜻은 무엇일까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은 성서의 가르침은 자연에 대한 착취가 아니라 ‘청지기’라고 주장, 토마스 시거 데어를 위시한 청지기 신학자들은 “인간은 자연에 대한 처분권이 있는게 아니라 사용권만이 있기 때문에 후세대를 위해 자원을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 청직이적 사명이 있다”는 청지기 설을 주장하였다.
2) 소유와 소비적 가치관과 생태계의 위기
이렇게 볼 때 기독교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생태학적 위기의 근본원인이라는 주장들은 큰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생태계 위기의 책임을 기독교의 창조신앙에만 지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학자들이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오히려 창조신앙은 인간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중심의 창조관은 르네상스 이후 자연과 세계를 지배하고 정복하기 위해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지배이데오로기를 위해 변질시킨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한 근본원인은 보다 큰 힘을 얻어서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함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가치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환경보호운동같은 소극적 대책이 아니라 ‘성장과 소비’를 향한 현대사회의 가치관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욕구가 집약되어 나타나는 것이 강대국들의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팽창욕이다. 그래서 몰트만 교수는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계열강들의 팽창욕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무제한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지구 땅덩어리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유와 소비, ‘지배의 원리를 포기해야 하고, 대신에 공생의 원리를 궁극적 가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종과 안종, 국가와 국가,인간과 인간,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등 모든 삶의 관계 속에서 정의와 평화를 수립해야 생태계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이 함께 말해져야 한다.
이들은 소비와 소유,향락주의를 생태계 파괴의 원인으로 규정하면서 이런 가치관을 갖게 하는 주범이 “하나님 없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라고 지적한다. 하나님 없는 인간들의 이기적 욕망으로 표출되는 것이 소유와 소비, 향락이 삶의 목표가 되며 자기 이외의 모든 것을 이용과 지배 대상으로 간주하게 된다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 없는 인간은 물질의 노예가 된다고 본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인 몰트만은 “창조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설정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에 대칭되는 자연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이미 하나의 자연으로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공동피조성, 파트너 관계, 협동관계, 상호작용, 연대성“ 관계다. 물론 이런 관계는 창조의 공동체에 속한 모든 식구들, 자연뿐만이 아니라 인간 사이에서도 유효한 것이다.
3. 창조적 공동체를 향한 JPIC대회
1989년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을 위한 세계대회가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주제로 서울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생태계 위기의 근본원인이 기독교의 인간중심적 세계관 때문이라는 생태학자들의 주장을 신학적 반성의 근거로 받아들이는 한편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힘을 기반으로 한 소비와 소유, 이원론에 입각한 지배적 가치관을 공동체적 가치관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후자의 입장을 실천과제로 받아들였다. 이 대회의 참여자들은 하나님 중심의 창조관을 인간중심의 세계관으로 변질시킴으로 야기시킨 생태계의 위기 앞에서 기독교의 죄책을 고백하고 지구 공동체가 모두 공생의 관계에 들어가는 생태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과제를 모색함과 동시에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인간이 창조의 보전에 임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 대회는 창조의 보전을 위한 명제로 다음과 같은 신학적 고백에서 출발하고 있다.
“땅은 주님께 속해 있고
세상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세상을 존재하게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시고 해방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이 세상과 함께 거하고 그 생명을 새롭게 하십니다.“
“여기서 땅이 하나님께 속해있다(시편 24편)는 선언은 인간이 이해하듯 소유하고 지배하는 그런 위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물을 돌보시고 보호하시며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생태계를 창조하시고 서로 다른 생명체들이 서로 번성하기 위해 맺는 관계를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은 인간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로마서 8장에서 보듯이 전 피조세계에 대해 부모와 같이 돌보시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분이다.
이 하나님이 인간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계약의 상대로 삼으시고 피조세계의 대표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는 피조물 위에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조세계에서 창조주의 보호와 사랑을 형상화하고 반영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노아와 맺은 계약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뜻은 인간만이 아니라 전 피조세계에 다 미친다. 계약의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선함과 온전함을 원하신다. 하나님의 계약 안에는 모든 생명있는 존재들이 다 포함된다.
창조질서의 보전이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 조화로운 관계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이 세상을 사랑하신 그분을 통하여 피조세계를 사랑하도록 부름받았고 인간의 사명은 나아가서 피조세계의 사제로서 피조세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중보자가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이 땅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창조의 보전을 위한 신학적 의미다. 이 의미 위에서 JPIC대회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보다 자신을 우월하게 생각하고 청지기직을 망각한 것을 회개하도록 촉구하면서 피조세계 자체의 온전함과 하나님께서 그것에 부여하신 질서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양육하기 위해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인간중심의 욕망을 희생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4.생태위 극복을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생태여성신학
1970년대 인도의 히말라야 산지의 우탁한드 지역에 살고 있던 가활(Garhwal) 부락 원주민 여성들이 나무를 껴안고 생존투쟁을 벌였다. 이 여성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숲을 상업적으로 착취하는 외부인들의 행태에 저항해서 나무를 끌어안았다. 모든 제삼세계의 숲에서 그렇듯이 개발론자들은 고 돈이 될만한 품종을 심기 위해 한 지역에서 고유하게 자라나는 나무를 가차없이 베어버린다. 이들 개발론자들의 머리에는 숲의 파괴나 그로 인한 물의 고갈로 숲이 고갈됨은 물론 그 안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생존 따위는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에 가활 여성들은 정부의 개발계획의 하나인 대규모 벌목으로 부터 숲을 보호하기 위해 벌목공들이 나무를 자르려고 할 때마다 자신들의 몸으로 나무를 껴안고 개발에 맞서 저항하였다. 그 결과 가활 숲은 보전될 수 있었다. 이 ‘나무 껴안기“ 저항 운동은 인도 전역에 확산되었고 계층을 초월한 수 많은 사람들이 간샴 라투리가 지은 노래를 부르며 이 운동에 참여했다.
“ 우리의 나무를 껴안자
나무가 잘려 나가는 것을 막자.
우리 언덕의 자산,
그 자신을 약탈에서 구해내자!“
인도의 칩코운동은 단순히 ‘환경보호’를 위해 벌목을 막은 것이 아니라 나무나 숲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고 생명보전의 차원에서 숲을 지켰다는데 운동의 초점이 있다. 이 칩코운동은 나무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나무의 죽음이 숲의 고갈을 가져올 것이라는 여성들의 생태적 감수성의 표출로서 생명과 직결된 여성들의 경험에서 울어나온 용기와 도전의 행동이었다. 그래서 칩코운동은 아시아여성들이 개발이데올로기의 횡포에 맞서 저항하는 생태계 보전 운동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생명을 살리는 파라다임과 생명을 파괴하는 파라다임을 구분하는 기준이 나오기도 하였다. 인도의 여성신학자 반다나 쉬바는 생명을 살리는 파라다임은 숲과 여성적 원리로부터 나온다면, 생명을 파괴하는 파라다임은 공장과 시장에서 나온다고 본다(반다나 쉬바가 쓴 Staying Alive : Women, Ecology and Development를 참조). 따라서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무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생태적 감수성과 시장으로 상징되는 소비적 자아에서 생태적 자아로의 전환이 요청된다. 생태적 자아란 말은 조안나 머시가 칩코운동을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들어 낸 말로 생태적 자아란 생태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이끌어 주는 자아의 개념이다.
생태여성주의자들은 오늘날 생태계 위기의 주범이 가부장적 위계질서에 의한 가치체계로 본다. 희립철학과 유대기독교에 들어있는 이원론적 가치가 생태계 파괴의 근본원인이라는 주장이다. 즉 영/육, 남/녀, 문화/자연, 이성/감성, 신/세계, 인간/자연 등으로 모든 것을 나누어 놓고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한 가치에 있으므로 전자의 후자에 대한 지배를 당연시하는 질서체제를 구축해 왔다. 특히 같이 열등한 계열에 들어있는 여성과 자연의 유사성, 즉 여성은 자연이고 남성은 문화로 보면서 더욱 여성과 자연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해 왔다는 것이다. 독일 녹색당의 창시자인 패트라 켈리는 “ 한 여성이 능욕당하는 것과 지구가 능욕당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로 여성억압과 자연의 억압의 상관성을 표현하고 있다.
생태여성신학은 기독교역사 속에서 자연을 악하고 열등한 대상으로 간주하여 착취와 정복의 길을 터준 인식론적 토대가 ‘여성과 자연의 동일시’에 있음을 간파하고 여성문재 해결없이는 생태문제도 해결될 수 없으며,생태문제 해결없이는 여성문제 해결도 없다"고 주장한다(Lois K. Daly, "Ecofeminism, Reverence for Life, and Feminist Theological Ethics", Liberating Life. 구미정,“생태여성신학의 주요쟁점들,세계의 신학 97 봄호에서 재인용) 더 나아가 자연 지배”라는 개념이 남/녀간의 기본관계인 지배/종속 개념에 기초해 있다는 자각에서 생태여성신학은 인종, 계급,성에 기반한 모든 사외적 지배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는 생태학적 혁명을 꿈꾸게 된다. 그래서 생태여성신학은 통전적이고 총체적인 생명신학이다.
생태여성신학은 자연억압과 여성억압이 상호연관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유기체적이고 종합적이며 직관적이고 여성적 세계관을 추구한다.
생태여성신학에서 중요한 신학적 관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을 전적 타자가 아니라 어머니, 친구, 연인으로 이해한다. 셀리 맥페이그는 절대 타자로서의 하나님은 절대군주적이고 폭력적인 상을 갖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의 상호의존성을 긍정하는 “유기적이고 생태적인 모델”이다. 어머니 하나님이 생명의 시초와 양육과 완성을 이끌어 간다면 연인 하나님은 상처받고 찢어진 세계의 고통응ㄹ 책임지면서 함께 고난당하고 치유하는 구원의 사역을 담당한다. 친구로서의 하나님은 세계를 지속적으로 보전하는 사랑 속에서 증거된다.
둘째 세계는 하나님의 거룩한 몸으로 파악한다. 지구는 하나님의 몸으로 하나님의 분신이며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거룩한 땅이라는 것이다. 세계는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본다. 하나님이 사랑으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았다면 창조는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여성신학자들의 주장이다. 이렇게 세계를 하나님의 몸으로 보는 모델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보게 하면서 하나님의 우주적 아픔에 동참하도록 초대한다. 병들어 서서히 죽어가는 지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사랑과 노동’이라고 도로테 죌레는 말한다.
셋째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관계적 존재로서 이해한다. 땅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몸으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인간관은 만물이 “관계의 그믈망”으로 서로 얽혀져 있다는 인식을 해야 한다. 이런 인간관은 자연이 상처를 입으면 자신이 상처입는 것처럼 느끼는 생태적 영성을 갖게 한다.
넷째 인간중심적 구속사에서 우주론적 치유사로 이해한다. 비버리 헤리슨은 생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연/역사를 분리시키기 보다 양자의 상호의존성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역사적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로즈마리 류터는 “지구를 치유하는 생태여성신학”을 모색하면서 골로새서 1:15-20에 표현된 우주적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창시자요 구속자인 그리스도의 화해와 갱신의 사역을 본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가치판단은 결코 인간중심적이지 않으며 우주중심적이고 생명중심적으로 뻗어나간다. 새롭게 요청되는 창조신학은 하나님의 구원의 지평을 넓혀 우주적 치유까지 포괄해야 한다. 생태학적 감수성을 가지고 자연을 통해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자.
생태여성신학자들은 가부장제의 이원론과 분리주의가 아니라 생명계가 서로 상호의존하며 살고 있다는 연계의 사고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생명중심주의로 나아갈 것을, 그리하여 모든 생명체와 같이 느끼고 같이 고통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기에 생태여성신학은 이제까지 우리 삶을 지탱해 온 의식, 가치관, 세계관, 사회구조와 체계, 삶의 방식등 모든 면에서 총체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이 총체적 변화가 있을 때만이 생태계의 위기는 해결될 것이다.
* 이 글은 2002년 5월 교회협 여성위원회와 환경위원회 주최로 열린 세미나에서 한 발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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