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신학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나타난 하나님

한국소금 2018. 2. 16. 21:23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나타난 하나님

 

한 국 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마태복은 6:9-13절과 누가복음 11:2-4절 두 곳에 나온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기도문 보다 짧고 압축적이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두 기도문이 이치하고 있다. 교회 전통은 마태복음 6:9-13절 기도문을 택하여 주기도문으로 가르쳐왔다. 그런데 많은 경우 주기도문을 주님이 드린 기도로 오해하고 있다. 주기도문은 주님이 드린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다는 것은 그 기도의 참뜻을 알고 그대로 살라는 뜻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며, 우리를 만드실 때 당신의 모습을 닮게 만드셨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에게 온갖 복을 빌어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복을 빌어주셨다. 그 복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세상을 잘 다스려 모든 피조물이 함께 잘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축복해주신 것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가득한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다. 부모의 속성이 자녀에게 이어지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의 능력을 부여받았음을 뜻한다.

누가복음 11장에는 그냥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만 부르고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를 때 거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것, 둘째는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것, 셋째는 우리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마태복음에는 19번씩이나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하나님이 구름 저편 우리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장소를 초월하여 계신 분임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일정한 곳에 매이지 않는 그런 분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란 말에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뜻이 있어있다. 이 세상의 다은 신과는 구별되는, 그러면서도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이다. 요한복은 4장에 보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나온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예수살렘성전에 계신다고 생각해서 예수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다. 도대체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옳으냐? 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의 장소에 매이시는 분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시는 분이라고 대답하셨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이 세상과 구별된다는 뜻이 담겨있고, 인간이 머리속으로 그려낼 수 있는 한정된 분이 아님을 뜻한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보다는 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를 지어내신, 그러한 분으로 우리가 그분을 닮아 온전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살아있는 예배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다. 구약성서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곳이 없다.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한다고 가르쳤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너무도 거룩해서 자기와는 동 떨어진 먼 곳에 계신 분으로 생각해서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갖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는 과감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우리에게 아버지로 부르도록 권면하신다.

주기도문에서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했을 때 그 아버지는 어렵게 아버님이라고 대해는 그런 용어가 아니라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아빠라고 사랑스럽고 다정하게 부르는 그런 압바(예수님 당시에 사용하던 아람어)라는 용어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바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 아버지는 이 세상의 아버지와는 다른 하늘 아버지시라는 점이다. 이 세상의 아버지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 가족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그런 권위를 대표하지만 하늘의 아버지는 사랑과 자비로 부성을 나타내신다. 하늘 아버지란 실제로 어떤 모습인가? 예수는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셨다. 집 나간 아들을 문밖에서 기다리면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 아들이 돌아오자 끌어안고 우시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하늘 아버지의 속성이다. 사실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모습이라기보다 어머니의 속성에 더 가깝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측은해서 달려가 입맞추었다고 할 때 이 때 측은이란 말은 자궁이 떨린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자기 자궁 속에서 기르고 난 자식을 위한 마음이 넘쳐 자식에 불상한 지경에 처할 때 자궁이 떨림을 느낄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성서 곳곳에 보면 하나님을 어머니 같으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호세아 111-4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식을 팔에 안아주고 키워주고 걸음마를 가르쳐주고 볼을 비비고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고 기르는 어머니 같으신 분이다.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호세아 111-4)

 

이사야 463-4절에는 자식을 업고 품고 다니는 그런 분이다.

너희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희를 안고 다녔고,

너희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내가 너희를 품고 다녔다.

너희가 늙을 때까지 내가 너희를 안고 다니고

너희가 백발이 될 때까지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다. (이사야 463-4)

 

창세기 321절은 인간을 낙원에서 추방하시면서 벌거벗긴 채 내쫒기는 것이 안쓰러워 옷을 해 입히는 그런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신명기 3210절과 18절을 보면 우리를 낳느라 고생하고 눈동자처럼 아껴주시는 분으로, 특히 예레미야 3120절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측은히 여기고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 나오는데 측은또는 불쌍히 여긴다는 뜻은 자궁이 떨린다라는 뜻이다. 자궁이 떨릴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해산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분으로, 어미가 자식을 달래듯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성서에 그려져 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측은이라는 단어의 원뜻 자궁이 떨리는은 구약성서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성서는 하나님을 어머니같으신 분이라고 말한다. 이 어머니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그런데 기독교전통은 하나님이 아버지니까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위대하고, 남자가 여자보다 더 우월하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을 압바라고 했을 때 그 하나님은 이 세상 가부장적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 같으신 분이다. 오히려 예수는 이 세상의 가부장적 가치관은 없어져야 할 것으로 보셨다. 마가복음 1019-20절에 예수를 위해, 복음을 위해 집, 형제, 자매, 아버지, 어머니를 다 버리면 집이나 형제, 자매, 어머니를 다시 얻게 된다고 하셨는데 다시 얻는 자리에 아버지 자리는 없다. 왜일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지배하고 다스리는 그런 권위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한 것은 이 세상 아버지와 다를 분임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이 세상 아버지의 부성을 심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은 하나님이 남자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같으신 분이라는 하나의 상징이다. ‘아버지라는 호칭을 절대화하여 하나님을 남성으로 해석하고 섬김다면 그 하나님은 우상이 되고 만다

여성신학자 메리 델리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관인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상은 기부장사회의 여성억압을 정당한 것으로 구조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비판한다. 하나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남성으로 규정하는 신관은 하나님과 남성존재를 동일시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서 남성우월주의를 지지하게 만든다. 남성으로서의 하나님 이미지는 남성은 우월한 존재로, 여성은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우상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이 비록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기도하라고 했다고 해서 아버지 하나님 만을 고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여성의 주체성을 박탈하고, 남성중심적 지배와 억압을 강화시킴으로, 이런 가부장적 언어와 상징들은 깨어져야 한다.  

 

 

우리 아버지

세 번 째로 중요한 개념은 우리 아버지라는 호칭이다. 우리 아버지란 하나님은 어떤 특정인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분임을 뜻한다. 어떤 이들은 기도할 때 네 아버지 하나님을 유달리 찾는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나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이시다. 우리 아버지란 인류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말이다. 백인만을 위하거나 남자만을 위한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라는 공동체적 개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리스인의 가족개념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혈연중심의 가족관계에서 벗어나 온 인류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의식전환을 해야 함을 뜻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한 것은 우리 모두가 형제요, 자매라는 말이다. 내가 낳은 자식 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교회와 사회 모든 어린이들을 내 자녀로 생가가하는 것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첫걸음이다. 우리 사회의 교육문제를 비롯해서 우리 공동체가 일그러진 것은 내 자식만’, ‘내 식구만하는 가족이기주의에서 비롯된다. 마가복음 331절 이하에 보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전하는 제자들의 말에 누가 내 어머니요, 형제나?” 라고 물으면서 진정한 부모와 자녀, 형제와 자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형제자매요, 부모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새로운 가족관계는 혈연중심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느냐 여부에 형성되는 것이다. 내 핏줄 중심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때 자애로운 부모가 아니라 폭군적인 아버지로 인식할 때가 많다. 벌받을까봐 무서워 부모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불효자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받을까봐 무서워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건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께서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그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는 자녀라면, 오늘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또 다른 자녀인 이웃과 화목하게 지냄은 물론 우리 형제자매들 중 가장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잘 살 수 있도록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부모의 마음은 가장 못난 자식에게 가 있고, 그 자식 때문에 가슴 조이는 걸 우린 알고 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고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다른 자식들인 이웃사랑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하나님은 온 인류의 하나님이다. 나만의 하나님, 내 교회, 내 교단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신 한 가족이다. 나만이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생각은 비기독교적이다. 뿐만 아니라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하나님의 가족이라 하면서 사람과 사람사이, 교회와 교회사이, 교단과 교단 사이에 분열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가족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는 하나님이 한 분인 것처럼 너희도 하나되라고 하신다. 기독교인들이 공동제의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을 위해 헌신하는 이유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가족 일원이며, 이 땅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19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