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혜 무기삼아 종교 강요하는 것도 폭력” 이글은 ‘2010 양화진 목요강좌’에서 한국여성인권센터 대표 한국염 목사가 행한 강연으로, 본지가 발췌 요약한다. 강연은 5월18일 지난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 선교사묘원 선교기념관에서 이뤄졌다. <편집자주>
결혼이주여성 중에 후안마이라는 이름을 가진 베트남 여성이 있었다. 그가 어느 날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은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남편이 한국말을 배울 기회도 주지 않고,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아 괴롭다는 내용이었다. 이 여성이 결혼해서 바라는 꿈과 소망도 한국 사람과 다르지 않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런 편지를 나눈 여성은 그 남편과 오래 살지를 못했다. 외국인이 결혼해서 한국에 들어와 살려면 한국어를 알아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데 남편이 한국어를 배우지 못하게 한다. 왜 그럴까. 한국어를 배우러 나가면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 도망간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이 여성은 사실상 24시간 감옥에서 사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았다. 참고 또 참았는데, 문제만 생기면 남편이 “이혼하자” “헤어지자” 하는 것이다. 고향을 떠나 남의 나라에서 잘 살아 보려고 했는데, 툭하면 이혼하자고 하니 이 여성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고향에 돌아가려고 짐을 싸기에 앞서 편지를 썼던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술을 먹고 들어와 부인이 짐을 싸는 것을 보고 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그마치 갈빗대 18대가 부러져 죽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남편은 때려놓고 도망을 갔다. 옆집 사람이 새댁이 안보여 경찰에 신고해서 방문을 열어보니 시체가 썩어있는 것이었다. 남편은 경찰에 붙잡혀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다. 대전 법정에서 판사가 선고를 하면서 이례적으로 자기의 느낌을 문서로 남겼다. ‘타국 여성을 마치 물건 수입하듯 취급하고 있는 한국 사람들의 인성의 메마름, 언어소통이 안 되는 부부를 한 집에 살게 하면 결혼이 다 됐다고 하는 이런 어리석음이 오늘 같은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한국사회의 야만성에 대해서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21세기 경제대국, 문명대국의 허울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내면의 야만성을 가슴 아프게 고백해야 한다.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는 결혼이주여성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부인의 갈빗대를 부러뜨린 그 남편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 SBS가 작년에 실험을 했다. 캐나다 젊은 남자와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를 거리에 내보내 각각 한국사람 15명에게 길을 물어보게 했다. 그런데 캐나다 젊은이가 길을 물을 때는 3명만 빼고 모두 영어를 써가며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줬는데, 방글라데시 노동자한테는 3명만 대답하고 나머지는 모른다며 피해버렸다. 한국 사람들이 외국인이라고 해서 모두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호의적이면서 제3세계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차별하는 시선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고향 가겠다는 외국여성 때려죽이는 한국은‘야만사회’ 기독교 믿으라는 말보다 감동 이끌어 내야 진정한 개종 내 안에 있는 인종편견, 차별성을 들여다보았으면 좋겠다. 우리 내면의 야만성과 미성숙성을 돌아보며 우리사회를 들여다보자. 전 세계적으로 이주민들이 1억9200만명 가량 된다고 한다. 지구 인구의 3%다. 이유는 대부분 경제 문제다. 돈을 벌기위해서다. 제3세계는 개발되지 않아 부익부빈익빈의 만성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게 된다. 이주민들 중에는 여성이 많다. 70%가 여성이다. 옛날 우리 사회에서 먹을 것이 있으면 가장 먼저 가장을 챙겼다. 일하러 가기 때문이다. 다음은 자녀요, 마지막으로 어머니다. 이것이 제3세계에서 지금도 그대로 이뤄지고 있다. 제3세계 여성들은 가장 먼저 가난에 처하고, 가장 먼저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린다.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것이다. 이주하는 방법으로 노동이주, 결혼이주, 연예사업 이주 등 세 부류가 있다. 지난 2007년 일부 언론에서 ‘외국인 100만명 시대 넘어섰다’ ‘한국이 다문화사회로 진입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주민중 노동이주가 47%로, 절반을 차지한다. 다음으로 결혼이주 11%, 유학생 7%, 귀화 2% 순이다. 노동자를 한국에 파견한 국가는 175국에 이른다. 사실상 유엔에 가입한 숫자와 맞먹는다. 더 놀라운 것은 국제결혼을 통해 들어온 나라 수가 127개 국가다. 이 중 1000명 이상 들어와 사는 국가가 25개국이다. 25개의 언어와 민족과 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다는 이야기다. 인종사회학적으로 보면, 10%는 돼야 다문화사회라고 할 수 있는데, 유네스코와 OECD는 이미 한국을 다문화사회로 분류했다. 워낙 다양한 나라가 들어와 살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 형상으로 평등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이야기다. 유엔 인권선언 제1조는 ‘인류는 모두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고 돼 있다. 그 기반이 창세기 1장 26절이다. 그런데 제2조가 재미있다. ‘피부색, 성별, 종교, 언어, 국적, 신념이 다를 지라도 우리는 평등하다’고 돼있다. 왜 이런 사족을 달아놨을까. 사회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양한 차별이 이뤄지고, 세상이 평등하지 않았던 것이다. ‘피부색 차별(인종차별)’ ‘국적 차별(계급차별)’ ‘남녀 차별(성차별)’이 세계 3대 차별이다. 차별은 무서운 것이다. 인권운동에서 폭력은 주먹질하고, 반쯤 죽였다가 놓는 것인데, 차별이야말로 또다른 폭력이다. 권력폭력도 있다. 태어날 때 평등하다는 개념에서 보면 평등에 위배되는 차별은 결과적으로 폭력을 불러온다. 따라서 ‘차별은 곧 폭력’이라는 개념이 성립된다. 일본에서는 ‘이주민 차별은 곧 이주민 폭력’이라는 정의를 내렸다. 차별하는 사람은 차별 당하는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열린 다문화사회’를 강조하는데, 다문화사회란 다문화 담재자, 즉 이주민들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인종족·민족적·문화적·성적 차별을 당하지 않도록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열린 다문화사회’를 말하면서 이주여성을 차별하는 것은 ‘거짓 다문화사회’임을 알아야 한다. 한국에 약 30만명의 이주여성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이중 13만명은 노동이주이고, 절반은 불법체류자다. 결혼이주가 16만명 정도 된다. 이중 5만명 가량은 한국 국적을 갖고 있고, 11만명은 외국인 신분으로 있다. 연예 비자를 갖고 온 사람이 1만명 가량되는 데, 악덕기업에 몰려 90%가 성매매 산업에서 일하고 있다. 농어촌 결혼의 45%가 국제결혼이다. 해마다 이들의 이혼율이 30%씩 증가하고 있다. 대법원에서는 남편들이 결혼비용을 지불하기 때문에 물질적인 가치관으로 신부를 본다는 점을 이유로 지적하고 있다. 이혼하면 이주여성들은 불법체류자가 된다. 그들이 결국 가게 되는 곳은 성매매 업소다. 주한미군 캠프에 있는 기지촌 여성의 85%가 한국여성에서 이주여성으로 대체되고 있다. 취업사기와 공연예술을 빙자해 인신매매당한 그들은 기지촌에서 여권을 압수당함은 물론, 나체쇼와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구타와 강간도 당한다. 이주여성들이 머무는 인권 사각지대가 한국 사회에 존재한다. 지구촌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울리는 모습인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한다. 교회가 국제결혼에 개입하는 것은 좋지만, 문제가 있다. 결혼을 중개하고, 그들을 돕는 이유가 1차적으로 ‘개종’에 있다는 것이다. 개종시키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1차 목적이 그것이 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주여성이 목사님께 힘들다고 상담하러 가면 ‘하나님께서는 견디지 못할 시련을 주지 않는다’고 대답해주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이주여성들은 결국 죽을 때까지 시련을 견뎌야 한다. 성서를 ‘가부장 신학’에 의해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서 많은 여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기독교가 역기능을 하고 있다. 박노자씨가 쓴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기억이 떡을 먹기 위해 교회에 간 것’이라는 내용을 보고 반성을 했다. 그날로 의무적으로 드리던 예배를 중단하고, 원하는 사람만 드리게 했다. 시혜를 무기삼아 종교를 강요하는 것도 폭력이다. 인천의 한 개신교 장로가 무슬림 여성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사례가 있다. 공장을 운영하는 그는 기독교를 믿으라고 한 마디도 안 했지만, 그의 인격에 감동받은 무슬림 여성들이 스스로 개종했다. 시혜를 조건으로 기독교인이 된 무슬림 여성들은 이슬람권인 자신의 나라에 돌아가면 자연스럽게 종교를 버리는 반면, 이들은 그 나라에 돌아가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다. 포교는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다. 다문화가족을 볼 때마다 창세기 1장 26절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을 되새기게 된다.
[출처] 명사강연/결혼이주여성의 한국가족 통합되기와 폭력 사이에서-한국염 목사 |작성자 화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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