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멜, 호세아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본 모습을 알게 하다.
한국염
해마다 이맘대가 되면 ‘ 아 광주여, 영원한 광주여’라는 시가 생각이 난다.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광주는 서서히 달어오르기 시작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1980년 광주민중항쟁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광주사건은 항쟁이 아니라 일부 폭도들이 일으킨 난동으로 오도되었다. 오랜 기간동안 광주항쟁의 진상은 은폐되었고 왜곡되어 전해졌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사건의 윤곽과 은폐되었던 진상이 밝혀지면서 광주항쟁은 일부의 폭동이 아니라 독재에 항거한 민중항쟁이라는,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예회복과 그에 걸맞는 배상이 이루어졌다.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맞으면서 나는 광주민주화운동처럼 은폐시켜서 침묵 속에 묻혀 왜곡된 한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부부간의 관계,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성서 속에서 아니, 교회 역사 속에서 진실이 가려진 채 바람기 있는 여자로 매도되고, 음란한 여자라는 오명을 쓴 채 전해지고 있는 여자, 이 여자 고멜의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은폐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그 고멜의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철저한 진상규명만이 사태를 바로보게 하고 그 사건이 주는 의미를 잘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에 관한 퀴즈 문답중의 하나, “성서에 나오는 3대 악처는?” 답은 아합의 부인 이세벨, 욥의 아내,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다. 음란한 여자의 대명사로서, 여성을 바람기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당위성의 근거가 되는 여자 고멜, 급기야는 하나님과 신앙인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상징으로 부각되는 여자 고멜, 그 고멜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멜의 이야기는 호세아서에 나온다. 고멜의 이야기가 나오는 호세아서는 1장과 2장에서 호세아가 받는 소명을 제3자적인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호세아가 바람기 있는 여자를 아내로 맞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이야기로 시작을 해서 호세아 자신이 자기의 전기를 써나가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장과 2장, 3장과 14장의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다. 1장과 2장의 이야기는 호세아가 바람기 있는 여자와 결혼을 해서 그 아내 고멜의 바람기 때문에 일어나는 분노하고 저주를 퍼붓던 호세아가 마지막에 가서 사랑스러운 남편으로 돌아서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3장에서 14장은 이 이야기를 풀어놓은 구조다. 3장에서는 호세아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바람이 나서 남의 정부가 되어 있는 고멜을 돈을 주고 찾아오고, 그 고멜을 향해 하나님의 진노를 13장까지 계속 퍼붓고 있다. 14장에 가서는 그 진노를 멈추고 다시 사랑의 관계로 돌아서는 이야기로 되풀이 되고 있다. 1장과 2장, 3장과 14장이 다른 점이 있다면 1장과 2장은 호세아의 자서전적인 이야기이고, 3장과 14장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유로 설정하고 있는 점이다.
오늘 생각해 볼 것은 1장과 3장의 초반이야기, 즉 호세아와 고멜의 두 인간의 이야기다. 자, 과연 호세아는 어떤 사람인가? 아내가 바람을 두 번이나 피웠는데도 불구하고 맞아들이는 사랑의 화신같은 호세아상, 반면 고멜은 결혼할 때부터 바람기가 있었고 자식도 호세아의 자식인지 아닌지도 구별할 수 없는 그런 자식을 낳은 여자로서 끝내는 그렇게 호세아가 사랑을 해줌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가서 어떤 남자의 정부가 된 그러한 여자로 묘사되어 있다. 정말 그런가? 호세아는 아내의 음행에도 불구하고 바람기있는 여자를 맞아들이고 용서해주는 그런 사랑의 화신이고, 고멜은 그러한 남편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음행만 하는 그렇게 가증한 여인인가? 우리가 성서를 잘 읽으면 그것이 아니라는 대답이 나온다.
우리가 고멜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햣는 고멜이 살던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당시는 남과 북이 갈라져 있었고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예언활동을 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러보암 2세가 치세하던 말기로서 경제적으로 최대의 부를 누리고 살았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애훼 하나님과 함께 풍요와 다산을 바탕으로 한 농경문화의 종교, 그 바알종교가 이스라엘 민간신앙에 깊이 들어와 있을 때였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한쪽에서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샤머니즘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바알종교를 믿었다. 이스라엘에 야훼 이외에 바알종교가 들어온 것은 솔로몬 때부터였다. 솔로몬에게 300명의 후궁이 있었는데 이 후궁들이 저마다 자기 민족의 신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때 솔로몬은 자기처첩들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이방신들을 다 용납했다. 이방신을 섬기게 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시돈의 여신인 ‘아스타롯’이라는 성의 여신(사랑의 여신)을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모셨다. 한쪽에는 야휘 하나님을 모셔놓고 다른 한쪽에는 아스타롯을 섬기게 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야훼와 바알, 두 신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특히 남북이 분열된 후에 북왕국의 아합왕은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시돈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했다. 그때 이세벨은 당시 자기 나라의 여신인 아세라 신을 이스라엘로 들여왔다. 이 아세라 신은 솔로몬이 허락한 아스타롯과는 또 다른 모성을 가진 신으로서 퐁요와 다산의 신, 출산을 잘하게 하는 여신이었다. 이 이세벨의 지원 아래 바알신을 섬기는 종교가 매우 성행했다. 열왕기에 엘리야와 이세벨이 갈멜산에서 어느 신의 힘이 더 큰가? 하는 대결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쪽에는 엘리야로 상징이 되는 야훼 하나님의 세력과 다른 한쪽에는 바알의 제사장들이 모여서 어느 신의 힘이 더 센가 하는 대회를 연다. 그 결과 엘리야가 섬긴 신 야훼가 이겨서 바알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모두 몰살을 하게 된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엘리야와 대결을 벌이기 위해 갈엘산에 오른 제사장 무리는 바알을 섬기는 450명, 아세라는 섬기는 제사장 합쳐서 900명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엘리야와 대결을 벌인 것은 바알신 제사장들이었다. 그 결과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은, 야훼 하나님의 힘이 더 센 것을 보고 이스라엘 민중들에 의해 맞아 죽은 제사장들은 바알의 제사장들이었지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아니었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왜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들은 재앙을 피하게 되었는가? 바알신을 섬기는 이들이나 아세라를 섬기는 이들이나 이방신을 섬기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바알신을 섬기는 이들은 진노를 받고, 아세라를 섬기는 이들은 진노를 받지 않았을까? 이것은 편집자의 실수인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었을까? 이는 아세라를 섬기는 무리들이 실제로는 야훼 하나님을 대적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 아니냐, 즉 한쪽에서는 야훼 하나님을 섬기면서 아세라를 섬긴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을 해 볼 수가 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아세라는 야훼 하나님과 맞먹거나 대적하는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상대적인 신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당시 이스라엘 민간인들에게 있어서 야훼 종교는 혼합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야훼를 섬기는 사람들 조차 남성신으로서는 야훼를 숭배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생명과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대지의 어머니 신인 아세라를 동시에 숭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세라가 내리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 산상제사에 참석했다. 호세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산상제사였다. 산상제사에는 두 가지 의식이 있었는데 하나는 성년축하의식과 결실의 의식이다. 성년축하의식은 결혼하기 전에 미혼 남녀들이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에게 제물을 바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결실의식은 해마다 산상제사에 참석해서 아세라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다산과 풍요의 축복을 받는 의식이다. 이 산상제사에 아내들, 딸들, 며느리, 농부들, 젊은이들 등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다 산상제사에 참석해서 축복을 받기 원했고, 성의 여신, 사랑의 여신 아스타롯을 섬기기 위해서 축제의 하나로 성창들과 성교를 하였다. 일반적으로 가나안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에 산상제사에 참여해서 7일동안 풍요의 축복을 얻기 위해 남창과 관계를 했다. 산상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행복한 결혼생활, 많은 자식을 얻는 풍요의 축복을 받으려는 여성들의 의무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래서 못생긴 여자는 성창을 맞기 위해 3년씩이나 기다리기도 했다. 이렇듯 산상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행복한 삶을 누리고 풍요와 다산을 원하는 일상 사람들의 보통의식이었다.
고멜도 예외는 아니어서 자기 민족들의 행태를 따라서 산상제사에 참석했다. 바로 이 모습이 호세아의 눈에는 정부와 놀아나는 음녀로 보였던 것이다. 호세아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명령이란 이유를 달고 있지만 호세아는 고멜이 산상제사에 참여하는 여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혼을 했다. 그래놓고 고멜이 산상제사에 참여했다는 것을 이유로 괴롭힌다. 고멜은 결코 특별히 품행이 어긋나거나 비난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평법한 보통의 이스라엘 여자가 걸었던 길을 걸었을 뿐이다. 이 고멜이 불행하게도 호세아라는 결벽증을 가진 남자와 결혼을 한탓으로 오늘날까지도 바람기 있는 여자, 정부와 놀아난 아내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불행은 고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멜이 낳은 세 아이에게도 이어진다. 의처증이 있는 아버지는 첫 아들 ‘이스르엘’만 빼놓고는 둘째 딸을 ‘천덕꾸러기’라는 뜻이 있는 ‘로루하마’라고 이름을 짓는다. 히브리말로 ‘로’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뜻이 있는 정관사다. 로루하마란 ‘루하마’에 ‘로’가 붙은 것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식’이란 뜻이다. 버림받는 자식이라는 말이다. 그 다음 셋째는 로암미라고 이름짓는다. 암미란 자식이란 말이니 ‘내 자식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노골적으로 내 자식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고멜의 입장에서 보자. 눈에 넣어도 안아플 자기 자식들의 이름이 그렇게 끔찍하게 불릴 때 고멜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부모들이란 자기 자신이 당하는 모욕은 참을 수 있어도 자식에게 가해지는 모욕이나 불행은 견디기 어렵다. 그 모욕이 다른 사람도 아닌 남편의 입에서 나왔을 때 고멜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전입가경으로 호세아의 결벽증은 점점 심해져서 어린 아이들 앞에서 고멜을 사정없이 몰아치면서 목말라 죽어버리라고 악담을 하며 비난을 퍼붓는다. “ 너희 어머니를 고발해라. 너희 어미는 내 아내가 아니다. 나는 너희 어미의 지아비가 아니다. 그 얼굴에서 색욕을 지워버리고 그 젖가슴에서 정부를 떼어버리라고 해라.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태어나던 날처럼 알몸을 만들어 허허벌판에 내던져 메마른 땅을 헤매다가 목이 타 죽게 하리라. 그리고 그 자식도 긍휼이 여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식은 음란한 자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의처증 있는 남편은 자기 아내를 완전히 화냥기 있는 여자로 몰아치면서 내쫒겠다고, 그 자식도 화냥기 있는 여자의 자식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남편의 이렇듯 심한 학대에 못 이겨 고멜은 집을 나간다. 당시 여자들이 집을 나가면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창녀가 되든가 남의 소실이 되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멜은 어떤 남자의 정부가 되었다. 그렇게 고멜이 집을 나갔을 때, 호세아는 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은 15냥과 보리를 주고 고멜을 되찾아온다. 그런데 이번에 고멜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이 참으로 특이하다. “고멜을 더 이상 비난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고멜이 비난의 대상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커다란 전환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멜과 호세아의 관계에서 변한 것은 고멜이 아니라 호세아다. 고멜이 집을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호세아는 진실한 부부관계는 비난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짐을 깨닫는다. 고멜을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 호세아는 완전히 새로운 남편으로 돌아설 것을 결심하고 고멜을 데리고 첫사랑을 나누던 빈들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속삭인다. “지금부터는 나를 바알(주인)이라고 부르지 말고 낭군이라고 불러주시오. 다시는 주인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도 말고 생각조차 하지 마시오. 자, 여기있는 들짐승들과 공중의 새와 곤충들을 내 증인으로 약속하겠소. 나는 이제 당신의 진실한 남편, 정의롭고 공평한 남편,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으로 당신의 남편이 되려고 하오. 그러니 내 마음을 알아주시오.” 이제까지 일방적으로 고멜을 비난하고 저주하던 호세아가, 주인의 행세를 하려고만 들던 호세아가 주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연인이 되기로 돌아선다. 뿐만 아니라 주인에서 낭군으로 돌아서기로 한 호세아는 내 자식이 아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자식이라고 저주하던 고멜이 낳은 자식들도, 내 자식, 내가 사랑하는 딸로, 축복의 자녀로 맞아들일 것을 결심하면서 1장에서 2장의 이야기가 끝이 난다.
민영진교수는 이우정선생의 고희기념논문 '고멜을 변호함'이른 글에서 호세아서의 특징은 고멜의 침묵에 있다고 본다. 호세아가 그렇게 몰아치는데도 고멜은 시종일관 침묵을 지킨다. 마치 떨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처럼, 고멜은 호세아의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묵묵히 침묵할 뿐이다. 이 침묵을 통해서 호세아가 새롭게 변신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시 살펴보면 고멜의 침묵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저항의 행동이다. 그냥 침묵만 한 것도 아니다. 침묵의 저항에는 한계가 있다. 남편 호세아의 학대에 침묵하던 고멜은 침묵을 청산하고 행동으로 나서서 이제 의처증있는 남편, 주인 행세만 하려고 드는 남편 호세아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남편을 떠난 생활이 전망이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고멜은 굴욕스러운 삶을 사느니 차라리 창녀가 될 것을 감수하고 호세아를 떠난다. 이 고멜의 떠남이 결국은 남편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고멜이 집을 나가자 호세아는 비로서 진정한 남편이란 아내에게 주인으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연인관계에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호세아와 고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새로운 구원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이제까지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종과 주인의 관계나 다름이 없었다. 한쪽에서는 폭군으로 군림하고, 다는 한쪽에서는 전전긍긍하며 지내던 관계였다. 그러나 아내의 가출이 결과적으로 남편을 사랑스러은 낭군으로, 사랑을 할 줄 아는 남편으로 돌아서게 하는 새로운 구원상이 이루어지게 된다.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에서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할 것은 호세아의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멜이 이제까지 부당하게 취급받아왔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호세아서에 보면 고멜이 회개했다거나 고멜이 변했다는 이야기는 한줄도 없다. 오직 호세아의 변화만 있을 뿐이다. 고멜이 음녀라든가 바람기 있는 여자로서 평가되는 것은 부당하다. 오히려 고멜을 통해서 호세아는 바람직한 남편으로 돌아선다. 고멜은 남편을 회개시킨 구원자로서의 위치에 서 있는, 그런 여성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두 번 째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가 지닌 종교적 측면이다.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는 야훼 종교와 바알종교의 갈등을 호세아와 고멜의 갈등으로 대비시켜서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서 야훼의 예언자 호세아는 야훼종교의 대변자로, 고멜은 풍요의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대변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킨 그 하나님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섬기라고 남성적인 황포를 휘두른다. 그런데 이렇게 섬길 것만 강요하는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설득력이 약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농경문화의 신인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바알에게 빠져버린다. 그러자 야웨는 바알을 신봉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온갖 심판과 저주를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자 하나님은 태도를 바꿔서 심판의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돌아설 것을 선언한다. 이것이 3장에서 14장에 있는 이야기다. 남성중심적인, 남성일변도의 하나님이 이제는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는 그러한 여성성도 함께 포함하는 그런 양성적인 하나님으로 변화됨을 뜻한다. 우리가 이 사실에서 깨달을 것은 하나님이 호세아서를 통해서 고멜과의 관계ㅖ에서 이제까지 그 가부장적인 하나님에게 양성적인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모습이 바뀜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양성적인 하나님, 사람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풍요롭게 하고 감싸주고 보호해주고 생명을 보존해주시는 모성적인 신, 그렇게 남성적인 신과 모성적인 신 두 요소를 갖고 있는 양성적인 하나님이야말로 민중이 원하는 하나님임을 호세아는 고멜과의 관계에서 깨달은 것이다.
고멜은 여기서 두가지 구원자의 역할을 한다. 하나는 우리가 앞서서 이야기한대로 가부장적 일색이던 그러한 남편, 군림하고 지배할 줄만 알았던 남편을 향해서 이제는 보호하고 감싸고 아내를 사랑해줄줄 알고 자식을 받아들일 줄 아는 그러한 사랑이 있는 아버지로 돌아서게 하고 사랑의 남편으로 돌아서게 하는 구원자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들이 잘못생각하고 있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폭군같은 하나님의 상을 사랑의 하나님 또는 생명을 보호하고 감싸는 하나님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상에서도 역시 구원자의 역할을 고멜을 하고 있다.
이렇게 구원자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고멜은 기독교 이천년사를 통해서 중세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악의 화신으로 그 다음에 음녀의 화신으로 상징되어서 마녀로 숙청되어 학살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탕녀로, 음녀로 잘못 읽혀지고 있다. 역사에서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잘못해석되어진 성서의 여성상을 바로 읽는 것도 매우 중요한일이다.
* 2011년 3월 이 글은 여성교회에서 한 설교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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