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여성에 대한 성서적 응답
구약에서는 외국인에 대한 우호적 입장과 차별적 입장이 이중적으로 드러난다. 왕조 중엽까지는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결혼까지도 허용하는 분위기였으나 왕국 몰락과 예루살렘 복구 과정에서 배타적인 입장이 강화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을 보호하는 것은 공동체의 윤리로 부각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나그네 보호법”이다.
복음서의 이방인에 대한 태도는 전반적으로 우호적이다. 그러나 간혹 편견을 드러내 보이고 있고, 예수에게서조차 이중적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이방인 백부장이 자기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했는데 예수는 그의 집에까지 가서 고쳐주겠다고 적극성을 보이면서 백부장을 믿음의 모델로 추천한다(마태 8:5-13). 반면 수로보니게 여인의 경우에 그녀의 딸을 고쳐달라고 하자 예수는 “자녀의 것을 개에게 주겠느냐”고(마가 7: 24-30)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러나” 라고 항의하자 태도를 변경하기도 한다. 바울의 경우는 갈라디아 3장 28절에서 보듯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일치를 강조하고 있으며, 친유대적인 베드로의 경우 이방인에게 편견을 갖고 있었으나 사도행전 10장 이하에서 보듯이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 편견을 벗어버렸다. 신약 전편에서 전반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1) 나그네 외국인보호법
외국인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그들을 위한 복지정책을 펴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외국인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로 이스라엘 민족이 떠돌이였으며 이집트에서 몸 붙여 살던 외국인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신명기 26:10-11).
이스라엘민족에게는 외국인보호를 위한 약자보호법을 지킬 의무가 있었는데 추수법과 십일조 법, 첫 열매를 드리는 법 등 세 종류의 법이 있었다.
신명기 24장 19-22절, 레위기 19장 9-10절에 의하면 이삭은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다. 이스라엘은 추수할 때 이삭을 싹 훑어 자기 집에 가져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외국인, 과부, 고아는 공동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인데 이들을 보호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하셨다. 따라서 외국인, 고아, 과부는 그 공동체에서 가장 힘없는 대상인 바 이들의 보호와 하나님의 복은 서로 직결되어 있다. 약자 편에 서 계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가난한 이들이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남겨놓는 전통을 만들었다.
신명기 14장 28-29절, 26장 11-19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3년마다 소출의 십일조를 떼어 레위인, 외국인, 과부와 고아에게 나누어주어 그들이 성안에서 마음껏 먹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신명기 26장 10-11절에서 이스라엘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며 사는 아람사람으로서 ..... ” 하고 자기 선조가 외국에 몸 붙여 살던 사람임을 고백한다.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어 가나안땅에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예물울 드린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준 모든 좋은 것들을 레위 사람과 외국인과 함께 누리도록 되어있다.
이렇게 하나님은 외국인을 위해 이삭을 남기는 법, 삼 년마다 십일조를 내어 보호토록 하는 법 등을 제정해주실 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해준 온갖 혜택을 같이 누리도록 명령하신다. 온갖 좋은 것들을 외국인과 같이 즐기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결국 외국인이라고 차별하지 말고 자기 동족이나 가족처럼 지내라는 말이다.
한편 성서는 외국인노동자보호법을 자기 민족을 위한 약자보호법의 이상으로 내세울 정도로 외국인을 보호할 것을 지시한다.
“너희 동족 가운데, 아주 가난해서, 도저히 자기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너희 곁에 살면 너는 그를 돌봐주어야 한다. 너는 그를 나그네나 임시거주자(외국인을 말함)처럼 너와 함께 살도록 해야 한다”(레위기 25:35).
이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외국인의 인권보호를 위해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잘 드러난다. 가난한 동족을 보호하듯이 외국인을 돌보아주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자기 동족을 외국인처럼 잘 대우하라고 할 정도로 외국인 대우가 약자보호의 이상형으로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외국인 이주민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복지를 펴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그들이 남의 나라에 몸 붙여 살던 나그네였기 때문이다(레위기 19:34).
우리 민족도 많은 이주 경험을 가지고 있다. 원래 우리 민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이곳 한반도로 이주해 온 사람이며 일제시대에는 많은 사람이 일본에 끌려가 종살이를 해야 했다. 60-70년대는 조국이 가난하여 돈을 벌러 독일에 광부와 간호원으로 가 외국인노동자로 산 사람도 많으며 대다수가 귀국하지 않고 독일에서 이주민으로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민 간 많은 사람들은 그 나라에 이주민을 위한 복지정책을 세우고 이민자의 인권을 보호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경험을 직접 간접으로 갖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외국인의 인권을 보호하고 이들을 위한 복지정책을 펴라는 성서의 가르침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2) 룻기를 통해 본 외국인이주여성노동자 인권옹호 실제
룻기는 베들레헴에 와서 이주 노동자로 일한 이방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본문으로 우리가 이주여성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좋은 귀감이 된다. 전통적으로 룻기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거나 이방인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이 룻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인종차별, 민족차별, 계급차별, 성차별을 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가난한 이주민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①외국인여성노동자와 함께 하는 연대와 자매정신
룻기의 이야기에는 많은 내용들이 담겨있다. 첫째는 연대와 자매정신의 모습이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자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니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룻기 1장 16절).
여기서 우리는 룻의 자세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룻은 고향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힘없고 소망을 잃은 한 여성의 편에 서기로 한다. 다른 여성의 편에 서기 위해서 룻은 일신상의 편안함은 물론 민족과 종교까지도 포기한다. 자칫 룻이 자기의 신을 버리고 나오미의 하나님을 선택한 것에 대해 하나님 우월주의를 내세우거나 시집을 왔으면 시집종교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나오미의 고향을 자기 고향으로, 나오미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기로 한 것은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맹목적으로 따른다거나 기독교의 우월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나오미와 함께 떠나는 룻의 이야기는 진정한 연대란 힘 가진 자가 약한 자의 편에 서서 철저히 자기 것을 포기하는 데서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외국인노동자에 관심을 갖는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외국인노동자의 인권문제 보다는 외국인노동자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선교적 측면에서 접근한다. 그러나 진정한 형제, 자매애는 자기가 갖고 있는 강한 힘을 바탕으로 개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한 상대의 종교를 포용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편에 서는 것이다. 힘을 바탕으로 개종을 추진하는 것은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바람직한 선교가 아니다.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노동자들이 기독교인이 된 예를 보면 외국인노동자를 사람 대접해주었을 때 감격해서 “그분이 믿는 하나님이면 나도 믿겠다”고 고국에 돌아가 기독교인이 된 경우가 많다. 인권이 종교나 민족 보다 우선해야 함을 룻은 몸으로 말하고 있다.
②“함께 밥을 먹읍시다 .”
룻은 생계를 위해 이삭줍기를 나간다. 보아스가 룻을 누구냐고 묻자 일꾼들은 룻을 나오미의 며느리로서가 아니라 이방여인인 모압여인으로 소개한다. 룻이 모압여인인 것을 알았어도 개의치 않고 보아스는 룻에게 말한다. ”우리 밭에서 일하는 여인들을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줍도록 하시오. 남자 일꾼들에게 댁을 건드리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겠소. 목이 마르거든 주저하지 말고 물 단지에 가서 물을 마시시오.“ 점심시간이 되자 보아스는 룻을 불러 음식을 넉넉하게 나눠준다.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룻을 괴롭히지 말고 오히려 단에서 이삭을 조금씩 뽑아 흘려 룻이 이삭을 넉넉하게 줍도록 배려한다.
룻이 낯선 나라에서 이삭줍기를 한 것은 생계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생계 때문에 많은 외국인들이 그들의 나라를 등지고 우리 나라에 와서 일을 한다. 이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는 일은 룻의 이삭줍기 보다 더 힘든, 우리 나라 사람들이 하지 않는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들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우리는 밥도 넉넉히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온갖 폭력을 행사한다. 더욱이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이 불법임을 미끼로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 보아스의 태도에 룻은 이렇게 말한다. “저를 이처럼 위로하여 주시니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③성적 착취와 성의 상품화에서 보호
보아스가 룻에게 이삭줍기를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먹을 것, 마실 것을 주었으며, 그의 일꾼들에게 룻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여기에서 일꾼들이 괴롭힌다는 말은 룻에게 성 희롱이나 성적 착취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보아스의 이런 행동은 외국인노동자의 생계를 보장함은 물론 여성의 성을 함부로 짓밟지 못하도록 보호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 공동체의 법정신임을 깨우쳐 준다.
우리 나라에서 외국인여성노동자들은 성차별에 의해 남자 외국인들 보다 적은 월급을 받고 있으며 성폭행의 위협 앞에 노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성매매의 함정이 이들 외국인 여성노동자들 앞에 도사리고 있다. 여성의 상품화가 외국인여성노동자를 겨냥하고 있다. 기지촌에서 유흥가, 밤거리에까지 성과 관련된 직종에 외국인이주여성들이 내몰리고 있다. 성매매의 국제화가 우려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에서 성매매로 희생되는 외국인여성노동자의 인권보호가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
④자기 권리를 적극적으로 찾도록 도와
나오미는 룻의 행복을 위해 보아스와 룻을 결혼시키려고 한다. 룻은 나오미의 계획에 따라 밤중에 보아스의 발끝에 가서 살며시 눕는다. 보아스가 누구냐고 묻자 룻이 대답한다.“접니다. 어른의 품에 저를 안아주십시오. 어르신은 속량자로서 저를 맡아야 할 분입니다.” 영어번역에 의하면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저를 당신의 부인으로 삼아주십시오”라고 되어있다. 룻의 이러한 행동은 신명기 25장 5-10절의 자식이 없이 남편이 죽었을 경우 죽은 형의 동생이 형수를 맞아들여 그 형의 후손과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는 ‘레비라토’ 율법에 근거한 것이다. 룻기에서는 이 레비라토 율법을 직계 형제가 아닌 집안 친척에게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가난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률의 한계가 없음을 뜻한다.
룻과 나오미는 보아스에게 레비라토 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나오미와 룻의 이러한 자세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그저 가진 자들, 힘있는 자들의 자선이나 처분만 바라서는 안됨은 물론 자기들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용기와 지혜로 나서야 함을 뜻한다. 인권이 무시되는 불의한 사회에서의 권리회복은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에서 비롯됨을 룻과 나오미가 가르쳐준다. 외국인 노동자의 권익보호 문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산업연수생으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에 대해 항의했을 때 처우개선이 된 사례가 있다.
1995년 1월 산재를 당하고도 보상을 받지 못한 불법취업 외국인노동자들이 산재보상보험의 적용을 요구하며 한 달간 농성을 벌였다. 이 비인간적인 대우가 국제적으로까지 비난의 대생이 되자 대통령지시로 불법취업자도 산재보상을 받게 되었다. 또한 임금체불과 강제근로 등에 대해 노동부에서 행정지도를 하도록 했다. 역시 1995년 1월에 네팔인 산업연수생 13명이 “제발 때리지 마세요. 우리도 사람입니다. 월급을 제 손에 주세요. 여권을 돌려주세요” 등을 외치며 명동성당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였다. 이 농성으로 산업기술연수생들의 문제가 사회문제로 되었고 시민운동과 노동운동단체들이 문제해결에 동참하도록 만들었다. 이에 정부는 ‘산업기술연수생의 보호 및 관리에 의한 지침’을 마련, 이 지침에 의하면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도 산재보상보험, 의료보험의 적용, 강제근로금지, 폭행금지 등의 적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⑤법을 제정하고 악법을 바꾸는 일에 앞장
나오미와 룻의 소망을 안 보아스는 나오미 집안의 유산지분으로 있는 땅을 속량시키고 이를 통해서 레비라토법을 이행하려 한다. 레위기 25장 24-28절의 속량법에 의하면 누가 가난하여 땅을 팔 경우 가까운 친척이 사서 나중에 형편이 좋아질 경우 되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 능력이 없어 되살 수 없다해도 희년에는 되돌려주어야 한다. 보아스는 이 법에 따라 나오미의 제일 가까운 친척을 찾아가 나오미가 팔려고 내어놓은 땅을 사라고 한다. 그 친척이 사겠다고 하자 그 땅을 사는 대신 룻에게 레비라토법을 이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오미에게서 밭을 넘겨받는 날 당신은 고인의 아내 모압 여자 룻도 떠맡아야 하오. 그리하여 고인의 이름을 이어 그의 유산을 차지할 사람을 낳아주어야 하오.” 그러자 자기 재산만 손해볼 것 같아 그 친척은 자기 속량자의 의무와 그 권리를 포기한다.
그러자 보아스는 나오미의 땅을 사기로 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마홀론의 아내 모압 여자 룻까지도 유산과 함께 아내로 얻었습니다. 나는 고인의 이름을 이어 그 유산을 차지할 사람을 낳아주어서 고인의 이름이 그 형제들과 함께 남아 이 고장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본래는 별개인 속량법과 레비라토법을 서로 뒤섞어 적용하고 있다. 이 상황은 우리에게 가난한 자를 보호하는 것은 어떤 법 보다 우선하며 또한 가난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률마저 바꿀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⑥인종편견을 거부
현재도 간간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외국인노동자의 유입에 따른 국제결혼으로 야기되는 문제가 많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는데 현재 남자 중심으로 되어있는 한국가족법에 따른 고통이 외국인노동자들을 괴롭힌다. 법도 법이지만 배타적인 인종편견을 갖고 있는 한국인의 의식이 더 큰 문제다. 룻기는 이 인종적 편견을 거부한다. 나오미는 외국인 여성을 며느리로 맞았으며 그 며느리와 일심동체를 이루어 산다. 보아스는 이방여인과 결혼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 이방여인이 결국 이스라엘의 민족의 중심이 되는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는데 룻이 아기를 낳자 이스라엘 사람은 룻의 행위를 그들의 옛 조상인 유다의 부인이 된 다말의 행위에 견주어 룻을 축복한다. 이스라엘 민족과의 동질성을 부여한 것이다.
나가는 말
지금 세계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아래 ‘빈곤의 여성화’’가 가속되고 있다. 특히 ‘Asian Migrant year Book’의 통계에 의하면 가난한 아시아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주하는 현상이 늘어나는 추세다. 현재 우리 나라에 유입되는 외국인여성노동자의 수는 남성노동자 수에 못 미치지만 세계적인 추세에 의하면 곧 남성 보다 많아질 전망이다. 이런 현실에서 외국인여성 이주노동자의 인권보호를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1995년 북경에서 열린 제4차 세계여성대회에서 채택된 북경선언 32조항과 관련된 행동 조항에 의하면 “정부는 외국인여성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여성이주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 착취로부터 인권을 보호하고 그 완전한 실현을 보장한다. 불법 체류 여성노동자를 포함한 합법 여성이주자의 힘을 증진시킬 수 있는 조치를 도입한다”고 명시함으로 외국인여성노동자의 인권보장을 규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여성부 장관이 정부를 대표하여 참석한 2001년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열린 ‘인종주의,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 이와 관련된 비관용을 철폐하기 위한 세계회의(약칭 세계인종차별철폐회의)’에서는 여성이주노동자가 증가하는 비율을 고려하여 이주여성이 직면하는 다중의 장애가 교차할 때, 성차별을 포함한 ‘Gender Issues’(성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둘 것을 국가에게 촉구하고 있으며 성과 인종차별에 기초한 차별을 철폐하고 이들의 권리와 존엄, 안전을 촉진하기 위한 행동수칙을 개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1979년에 발효된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과 1999년의 동 협약의정서에 가입하였다. 2001년 ‘남녀 평등한 민주인권국가의 실현’을 목표로 출범한 여성부는 국내의 남녀차별 극복과 여성에 대한 차별, 폭력에 관심하여 제도적으로 모성보호, 남녀고용평등법, 직장내 성희롱금지법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은 외국인여성노동자에게는 그 효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여성부가 여성이주노동자를 위한 사업으로 국제적 성매매 예방 및 피해여성을 위한 쉼터지원을 사업으로 설정하고 있으나 성매매로 유입되는 여성이주노동자의 근본적인 인권보장이나 일반 외국인여성노동자에 대한 대책은 세우지 않고 있다. 여성부는 성매매로 유입되는 여성이주노동자 뿐만 아니라 모성이 보호받지 못하고 성차별과 성희롱과 성폭력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일반 여성이주노동자에 대해서도 모성보호, 남녀고용평등법, 직장내 성희롱금지법이 적용 등을 통해서 이주여성노동자의 인권이 보호되는 정책과 제도 마련을 해야 할 것이다.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연수생 제도라는 편법으로, 그리고 불법체류라는 교묘한 수단으로 고용하고 있다가 많은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특히 80%가 넘는 불법체류문제가 심각하여 3월말까지 강제 출국시키겠다고 정책을 발표하였지만 현실적인 여건으로 이러한 정책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것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외국인력에 관한 법을 제정하려고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이란’ 명목으로 이권단체들의 강력한 반발로 제대로 제정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에서는 악법인 산업연수제를 철폐하고 외국인노동자고용허가제 내지 노동허가제 실시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이주여성노동자를 위해 일하는 단체에서는 여성이주노동자를 위해 한국의 모성보호법, 성폭력특별법, 남녀고용평등법 등을 외국인이주여성노동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하여 이주여성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외국인이주여성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제정과 인종차별문화를 종식시키는 일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가 외국인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고 우리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오미와 룻이 행한 자매 정신, 보아스가 룻에게 한 나그네보호 행동을 우리도 실천에 옮겨야 한다. 한 이주노동자 인권운동가의 말처럼 “이주노동자들을 현대판 노예신세에서 벗어나 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공동체적 사고를 회복해야 한다”. 초대교회에서 세례 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라는 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추상적인 “하나님의 가족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한국인과 외국인이 하나”라는 고백이 절실히 필요하다.
* 이 글은 2008년 가통릭잡지에 게재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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